〈 230화 〉 전초
* * *
민혁은 그녀의 상태창을 살피며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리나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깨어나려는 것 같았다. 민혁은 그녀가 놀라지 않게 머리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으음.....”
약간 괴로운 것 같은 신음소리와 함께 리나가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을 더듬거리더니 헤죽헤죽 웃었다. 잠에서는 깼지만 아직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이불에 잠시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지켜보고 있던 아리나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 티샤는 혹여 그녀가 다시 도망칠까 문으로 가는 동선을 차단했다.
“...여,여기는....?!”
“라이너 영주성이야”
민혁의 대답에 리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물들었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인 라이너 영주가 사는 곳인 만큼 그녀의 반응이 저런 것도 이해가 됐다. 민혁은 하얗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눈가에는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리나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이불을 적시기 시작했다.
“......”
그는 아무런 말없이 리나의 가녀린 몸을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눈물을 참느라 숨이 거칠어진 리나가 흐끅거리며 숨을 고를 때까지 허그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눈물이 멈추자 그의 품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무릎을 꿇었다.
“정말...흐끅..죄송해요...구해주셨는데...두, 두번이나...구해주셨는데...흐끅...저..사실...어젯밤, 다 봤어요...구해주신 것 모두 보고 있었어요...단지 말을 할 힘이 없었어요...흐끅....정말..흐끅...죄송해요...”
진심 어린 그녀의 사과에 민혁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눈물을 더욱 더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리나와 티샤가 나서서 리나를 달래주기 전까지 요령 없는 민혁은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잘 자네요...”
리나와의 간단한 통성명 후 그녀는 아리나의 무릎을 베고 잠에 들었다. 아리나는 귀찮을 법 하건만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다 아리나와 리나가 마치 모녀 사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문득 혹시 자신과 아리나가 아이를 낳으면 리나와 같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는 상상을 펼쳤다. 뇌내망상만으로 흐믓해지는 광경, 하지만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인벤토리에서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꺼내보았다.
라이너 성 지하감옥 26번방의 열쇠
본래는 리나의 부모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어째서 이종족인 그들이 영주성 지하감옥의 열쇠를 가지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허나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당신이 용기 있고 목숨을 아깝워 하지 않는 자라면 라이너 영주성 지하감옥 26번방을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보상치고는 애매한 아이템이다. 아마 다음 연계퀘스트의 단초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민혁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열쇠를 다시 넣어 놓았다. 잠깐의 소소한 시간이 지나가고 찾아온 저녁 시간, 방금 전 일행을 안내했던 집사가 찾아와 라이너 영주가 민혁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고 알렸다. 하울과 아리나는 만찬이라는 소리에 눈을 빛냈지만 리나는 몸을 떨고 거부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아리나와 하울 민혁은 라이너 영주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다 어서 가라...”
티샤는 리나와 방에 남아 따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민혁도 남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민혁은 배웅을 해주는 티샤를 뒤로 하고 기다리고 있던 아리나와 하울의 옆에 서서 만찬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히히 정말 기대되요!”
“흐흠..맛있는 포도주도 나오겠지?”
약간 심란한 민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먹보 둘은 라이너 영주가 준비해준 드레스를 입고 만찬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만찬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걸어서 5분정도, 집사를 따라 만찬장에 도착한 일행은 그 규모와 음식들의 휘황찬란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진미, 커다란 테이블에는 족히 20인분은 되어보이는 음식들이 자신들을 먹어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는 라이너 영주가 미소 짓는 얼굴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손님분들게 음식을 대접하는 건 집주인의 의무와 같죠. 어서 앉으세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때에 맞춰 먹지 못한다면 맛이 없답니다.”
라이너 영주에게 반감을 보였던 하울과 아리나는 그녀의 의견에는 동의하는지 아무런 말 없이 집사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민혁도 그녀들을 따라 착석했다. 그러자 메이드들이 잔에 백포도주를 따라 주었고, 라이너 영주는 자연스럽게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맛있는 식사되시길.......”
그녀의 말을 끝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울은 백포도주를 한입 머금더니 입을 행구고 가장 먼저 칠면조 고기에 손을 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에 하울은 눈을 반짝이며 포크를 날래게 놀리기 시작했다. 잘 익은 베이컨에 라즈베리 소스를 곁들인 요리서부터 두꺼운 돼지고기에 온갖 과일을 넣어 찐 바비큐요리까지 종류는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하울의 눈길을 끈 것은 조갯살을 발라 백포도주에 절인 요리였다. 살짝 뿜어져 나오는 와인향과 야들야들한 조갯살, 하울은 포도주와 함께 요리를 먹더니 자신의 볼을 감싸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아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양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전투적으로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그랬다면 품위 없다고 혀를 찼을 행동이었겠지만 아리나가 그리 행동하니 귀엽기만 한 뿐이었다. 한참을 그녀들이 먹던 것을 구경하던 민혁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포크를 들었다.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나요?”
“네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많던 음식들은 두 먹보의 배로 들어갔다. 두 여자의 식사량에 라이너 영주도 놀랐는지 식사 도중 웃는 얼굴에 금이 가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메이드들은 커피와 간단한 디저트를 가지고 나왔다. 아직 배가 남았는지 하울과 아리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먹었다. 민혁도 이번에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그녀들을 쳐다보았고, 라이너 영주는 애써 그녀들을 무시하고 민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도에는 이틀 후에나 출발할 예정이에요..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있어주세요.”
“이리 환대해주시는데....지루하다뇨..”
민혁의 말에 라이너 영주의 입가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녀는 싱긋 웃더니 그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도중 만찬장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판금 갑옷을 입은 자로 라이너가의 기사인 것 같았다. 그는 노크도 하지 않고, 만찬장에 들어와 영주의 바로 앞까지 걸아왔다.
“필라스크 무슨 무례죠 전 손님을 상대 중입니다.”
“흠....무례라.......”
기사는 무례라는 라이너 영주의 말에 고개를 돌려 민혁과 그의 일행을 훑어보았다. 민혁을 보았을 때에는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지만 하울과 아리나를 볼 때에는 눈에 음욕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몸을 훑는 듯 한 그의 눈빛에 하울과 아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기사는 코웃음을 치더니 라이너 영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딴 평민들을 상대할 시간이 있나 보군..나는 아버님을 시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불철주야 이종족 사냥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
그의 말에 라이너 영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손짓으로 당장 나가라는 축객령을 내렸다. 기사는 이번에도 코웃음을 치더니 갑옷을 덜컹거리며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고 만찬장은 마치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해졌다. 하울은 기분이 나빴는지 얼굴이 구겨져 있었고, 민혁 또한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허나 직접적으로 모욕을 당한 라이너 영주보단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태연한 척 말을 꺼냈지만 이마에는 힘줄이 빠직 박혀있었고, 잡고 있던 찻잔 손잡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동생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요....원래 안 그러던 아이인데.....”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동생?’
그럼에도 그녀는 침착하게 사과를 먼저 했다. 민혁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필라스크가 문을 활짝 열고 나간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전 영주의 슬하에 남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방금 전 개차반 같은 녀석을 라이너 영주는 동생이라 칭했다. 민혁은 무언가 뒤에 얽힌 사연이 있으리라 직감했다. 하지만 그걸 라이너 영주에게 묻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포지션은 손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후 차갑게 식은 만찬장의 분위기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고, 그렇게 저녁 만찬은 끝이 났다.
“..민혁 잘 다녀왔나..”
“응. 식사는 괜찮아?”
방에 돌아와 보니 티샤와 리나는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만찬에서 먹었던 것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식사였다. 리나는 그가 오자 쪼르르 달려와 수줍게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그에 아리나와 하울은 조용히 그의 팔뚝을 꼬집었다. 몸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의 고통에 민혁은 억울해졌다. 잘난 것도 죄란 말인가.
“리나”
“네,넵!”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