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전초
* * *
그리고 고막을 관통하는 하울의 고함, 어버버 거리던 민혁은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아채고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울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짐 속에서 옷을 한 벌 꺼내 아리나에게 건내주었다.
“흠 맞을까요?”
아리나는 한눈에 봐도 기장이 좀 더 긴 하울의 옷을 리나에게 대보며 말했다.
“안 맞으면 어쩔 거야 대충 입혀놓고 생각해야지”
“흐음....어쩔 수 없죠 제 옷이나 티샤님의 옷은 가슴 부위 때문에 맞을 리가 없으니까...”
고의성 없는 아리나의 공격에 하울은 으윽하고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가슴을 살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티샤와 옷을 갈아입히고 있는 아리나의 것과 비교해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하울의 완패가 분명했다. 그녀는 울상으로 지으며 속으로 너희들이 쓸데없이 큰 것이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밖에서 먹으면 안 될까? 응? 응?”
하울이 보기 드물게 애원조로 말했다.
“안돼”
하지만 민혁은 단호했다.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민혁도 하울의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리나를 두고 외출을 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저녁 식사는 여관에 부탁해 방으로 음식을 가져와 해결했다. 하울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잘 익은 송아지 고기를 포크로 열심히 집어 먹었다. 민혁은 자기 몫의 음식을 조용히 그녀의 앞 접시에 덜어주고, 하울이 좋아할만한 와인을 추가로 주문해야만 했다.
“깨어날 기미가 없네...”
“그러게요....”
“....걱정이군...”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도록 리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민혁은 회복 마법으로 고치지 못한 곳이 있나 숨소리나 몸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지극히 정상이었다. 티샤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몸에 쌓여있던 피로가 겹쳐서 그런 것 같다며, 좀 더 지켜보자 말했다. 하울도 긍정했다. 회복마법은 신체에 입은 데미지를 없애는 것이지 피로와 정신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럼 잘 준비 하자”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지친 일행은 결국 취침 준비를 시작했다. 아리나와 하울은 침대에 눕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어버렸고, 티샤는 단검을 잠시 손질하다 잠을 청했다. 마지막으로 민혁은 리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고릉고릉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채웠다. 그러자 기절한 듯 누워 있던 리나가 유령처럼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
리나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옆에 누운 민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살글살금 침대를 빠져나와 일행의 짐을 뒤적거리더니 로브를 하나 꺼내 몸에 둘렀다. 기장이 길어 땅에 쓸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민혁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그는 리나가 지나간 자리를 한번 쓰윽 훑었다. 사라진 물건을 로브 하나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쫒아갈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도망가려면 노예증서라도 가져갈 것이지 그것도 안 챙기고 가버렸다. 해가 진 밤이라면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만 해가 뜬다면 경비병이나 병사들에 잡혀 다시 노예 장사꾼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어휴...”
그는 옆에 누워 있는 아리나가 깨지 않도록 조용조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리나의 기감을 읽고 그녀를 쫒기 시작했다.
“하아..하아..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신물이 나고, 거친 숨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참았다. 그녀는 온 몸이 망가진다고 해도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리나는 머리 위를 스치는 바람에 로브를 손으로 꾸욱 눌러 잡고 성문을 향해 뛰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인 시간, 다행히 길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해도 부랑자와 술에 거하게 취한 주정뱅이들이 전부였다.
“하아..하아..”
겨우 도착한 성문,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도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서둘러 성문 앞 과일가게 수레에 의지해 몸을 숨겼다.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
횃불을 들고 있던 경비병이 창을 잡고 있는 경비병에게 물었다.
“아니 난 아무것도 못봤는데....너 어제 안나랑 너무 놀아서 헛것이 보이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하체도 부실하면서 크큭큭!”
“뭐,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다행히 경비병들은 리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나는 긴장을 한 탓인지 온 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영지의 병사들에게서 붙잡혀 잘린 귀를 잠시 쓰다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도와줘....”
그리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 작은 불꽃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불의 정령들이었다. 리나는 정령들에게 가게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불꽃들은 작게 일렁이더니 그녀가 숨어있던 곳의 반대편 가게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은 빠르게 번졌다. 그러자 난리가 난 것은 경비병들이었다.
“어, 어엇 불이다!”
“제임스 빨리 경비대장님을 불러와!”
그들은 깜짝 놀라 자리를 비우고 불을 끄기 위해 움직였다. 그 틈을 타 리나가 몸을 날렸다. 그녀는 작은 보폭으로 도도도 성문을 향해 뛰었다.
“빨리 물을 더 가져와!”
“제,제임스 대장님은 아직이야?!”
경비병들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지를 빠져나가기까지 이제 세 걸음 정도, 리나는 부모님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귀를 빼앗아 간 이 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잠깐 꼬마야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게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막는 남자의 목소리에 온 몸이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고 말았다. 리나는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남자가 직접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뒤돌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
“.......”
눈빛이 마주쳤다. 리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본 남자는 거침없이 그녀의 로브 후드를 내려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잠시간의 정적, 남자 아니 제임스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리나가 이종족이라는 것을 알아챈 병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 또한 지금은 식물인간이 된 전 영주에게 은혜를 입고 병사가 될 수 있었던 본디 부랑자였던 이다. 병사는 창대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제임스는 잠시 움찔거리며 병사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
퍽!
리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의 창대는 정확히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가녀린 몸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병사는 그도 분에 차지 않았는지 창대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몸을 말고, 강타당한 배를 감싸 쥐고 있는 리나를 즈려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팔을 허우적대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병사는 리나가 저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자비하게 발을 놀렸다.
‘죽는 거야...?’
점점 얕아지는 의식, 죽는다. 반드시 죽을 거라 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병사의 발길질은 점점 거세졌고, 몸의 온기는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원통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부모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취급을 받고 무관계한 남자의 발길질에 죽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녀는 억울했다. 그리고 살고 싶었다. 리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손을 뻗었다. 자신과의 눈 마주침에서 유일하게 비틀린 성욕과 혐오가 아닌 정상적인 눈빛을 보여준 제임스에게 말이다.
“.......”
하지만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몸을 돌려버렸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저주했다. 자신을 부모님을 이렇게 만든 인간을,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들을 모두 씹어 먹으리라 리나는 한이 서린 저주를 마음속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다른 가족들이 아닌 자신을 구해준 인간 남자였다.
“하아..하아..하아...하아..”
분노와 흥분으로 점칠된 발길질이 멈춘 것은 리나의 몸이 이미 엉망이 된 이후였다. 병사는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차오르는 숨을 참지 못하고, 격한 호흡을 내뱉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꿈쩍 안 하는 리나에게 침을 찍 뱉더니 창대를 주워들었다. 아직도 들썩거리는 노예년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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