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전초
* * *
그가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자 황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한 번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드록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툰드르 왕국과 아이지스 왕국이 이유 없이 국경을 넘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혹 그들이 국경을 넘은 이유가 있사옵니까?”
아이지스 왕국과 툰드르 왕국 연합 그리고 제국의 당장 기용 가능한 장병의 수만 해도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게다가 마도사나 고위 기사의 수는 비교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제국이 우세하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다? 결코 사소한 문제로 두 왕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큰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록샤는 그 문제가 황태자에게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프랑코”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는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드록샤의 눈빛을 보고 프랑코를 불렀다.
“예 전하, 이걸 대신들에게...”
프랑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신들 뒤에 나열해 있던 시종들에게 서류를 나눠주었고, 그들은 대신들에게 흰 종이뭉치를 나눠주었다. 의아함에 차있던 대신들은 서류뭉치를 받아 들어 읽고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황태자가 툰드르 왕국과 탈리스만가에 행한 공작에 대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대신들은 굳이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툰드르 왕국에 내정간섭을 벌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이미 내전에 모인 대신들 대다수는 황태자의 사람들이었고, 황제 자리가 눈앞인 그의 눈 밖에 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문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지 않겠지...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껏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두지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대륙 아니 이 세계의 모든 땅이 제국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이다.”
“......!”
황태자의 말에 대신들은 모두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먼 옛날부터 바래마지 않아 왔던 일이다. 통일제국의 건립, 로기아 대륙 역사 이래 그 어떤 강성한 제국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이다. 그것을 지금 황가의 권력이 최고점을 찍은 상태에서 황태자는 언급한 것이다. 일부 대신들은 모두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되어 눈을 반짝이며 황태자를 바라보았고, 드록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프랑코를 째려보았다.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는 상태, 이미 그는 알고 있던 것이다. 드록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적어도 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알려주었으면 했다.
“신 재무대신 드록샤 온 몸을 받쳐 폐하의 원을 이루어보이겠나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불만을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드록샤가 황태자를 칭하는 표현은 전하에서 폐하로 변했고, 대신들도 자신들이 역사적인 현장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드록샤를 필두로 대신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황태자의 결의에 고개를 조아렸다. 프랑코 또한 자신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꺼내 황태자에게 내밀며 자신의 목숨을 맡기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남은 것은.....’
그 장관 속 황태자 아니 이제 대신들의 지지 속에 황제가 된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으스러질 듯 꽉 말아 쥐었다.
제국의 주인이 통일을 천명한 그 때, 민혁 일행은 로랑을 떠나 제국의 군신이자 수호신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라이너가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민혁이 탈리스만의 반지가 있는 황도가 아닌 라이너가로 이동하는 이유는 릴리가 준 시계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릴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국의 군신 라이너가는 반지를 가진 자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하나 들어주어야만 한다.
“그 소원을 빌어서 라이너가의 가주와 함께 황태자를 만나겠다고?”
“응”
하울이 어처구니 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민혁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반응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민혁의 옆에서 와구와구 식사를 하고 있는 아리나와 티샤를 바라보았다. 의견 없음, 애초에 그녀들이 의견이 있더라도 민혁이 낸 의견과 충돌된다면 아리나와 티샤는 민혁의 의견을 우선시할 것이 분명 했기에 물어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하울은 지금이라도 당장 제국의 황도를 향해 가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대책 없는 그의 다음 계획을 들어보기로 했다.
“뭐? 날 이용해서 탈리스만의 반지를 빼앗겠다고?”
“그래 뭐 잘못된거라도 있어?”
아니 없다. 반지 위치를 확인하고 하울이 나선다면 탈취를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라이너가의 가주가 멍청한 자도 아닐터인데 신분이 불분명한 게다가 지금은 전쟁을 선포한 툰드르왕국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포베너가에 주었던 반지를 들고 온다면 일행을 현재 황제나 다름없는 황태자에게 데려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금 혹은 스파이로 몰려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휴....니 맘대로 해라.....”
그리고 민혁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 말이다. 분명 무언가 믿고 있는 것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에 하울은 더 묻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국의 땅덩이가 넓은 만큼 용의 신전이 있던 로랑 영지에서 라이너가문이 자리 잡고 있는 라이너 영지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대략 마차로 이동한 시간이 15일 도보로 이동한 시간이 3일정도였다. 마차를 끝까지 타고 갔으면 이동 시간이 줄어들었겠지만 라이너 영지는 고산지대 그것도 깎아지듯 가파른 절벽위에 지어진 성채라 마차가 더 진입을 할 수가 없었다.
“정지”
커다란 성문 앞 라이너 영지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 경비병들이 민혁 일행을 가로막았다. 그는 민혁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는 라이너 영지를 방문하기 전 미리 발급해둔 상인길드의 신분증을 경비병에게 건내주었다. 그는 잠시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일행의 모습을 살폈다. 민혁과 여인들은 이미 등에 짐을 메고 로브로 얼굴을 가려 두부상처럼 위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경비병은 별 다른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통과!”
쿠구구궁
경비병이 성채 위에 서 있는 다른 병사에게 손짓을 하자 커다란 성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민혁은 경비병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너 영지 내부는 생각보다 궁핍해보였다. 또한 영지민들 또한 생기를 잃은 표정이었다. 민혁은 의아해했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라이너 영지에서 지낼 동안 묵을 곳을 찾기 위해 발을 옮겼다. 외지인들을 위한 여관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외관이 제일 깨끗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어서옵셔”
들어가자 종업원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4인실 하나에 이틀 정도 묵을 것 같은데 얼마입니까”
“식사까지 하시면 6골드이고,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5골드입니다요.”
민혁은 의견을 묻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나와 티샤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태도였고, 하울은 고개를 세차게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식가인 그녀로써는 여관의 평범한 맛보다는 맛집에서 질 좋은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녀의 의중을 읽은 민혁은 종업원에게 5골드를 넘겨주고, 방 키를 건내 받았다.
콰앙
갑자기 울리는 파괴음, 다름 아닌 여관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나무문이 부서지고, 먼지가 비산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던 손님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개중에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은 화가 났는지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콜록.. 콜록..”
먼지가 잦아들고 보이는 건 부서져 여기저기 흩뿌려진 문의 파편들과 그 사이로 누운 소년이었다. 몰골이 추례한 것으로 보아 노예나 거지로 보였는데 그 미색이 아주 고왔고, 기름지기는 했으나 그 빛을 잃지 않은 은발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뒤로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들이닥쳤다.
“이익...이 개자식 피곤하게 만들다니!”
리더로 보이는 자는 이를 갈더니 얼굴을 능금처럼 새빨갛게 붉히더니 소년을 마구잡이식으로 짓밟기 시작했다. 여관 사람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아까 전 무기를 집어 들던 용병들도 슬그머니 무기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주인장!”
“아..예! 칼립소나리!”
그 이유는 소년을 짓밟는 남자가 영지 내에서도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1급 용병 칼립소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관 주인을 부르더니 은화 5개를 던져주었다. 문 수리비로는 모자란 금액이지만 여관 주인은 그것을 받고 해코지라도 당할까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야 들어라 가자”
볼 일을 다 마친 칼립소가 부하를 시켜 소년을 들게 하려는 찰나
“잠깐 거기 그 애는 두고 가”
민혁이 나섰다. 칼립소는 웬 검은 머리 애송이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려하자 목 뒤로 열이 뻗쳤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에 머리를 쳤겠지만 머리가 정갈하게 손질되어 있고, 장신구와 값나가 보이는 검을 찬 행색으로 보아 귀족이나 혹은 그 자제 정도로 보였다. 그가 아무리 실력 좋은 1급 용병이라 하여도 결국에는 평민, 칼립소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도련님 이 아이는 노예입니다. 노예 그것도 제가 직접 영지에 세를 내고 적법하게 구매한 것이란 말입니다. 정의감에 나서는 것도 좋겠지만 낄 때 끼고...하아.. 여기까지만 말해도 알아들으셨겠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