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전초
* * *
1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민혁은 문이 열리자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아의 집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녀가 아직 신입생일 때 선배가 준 술을 거부하지 못하고 잔뜩 먹고 취한 적이 있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민혁은 그녀를 데려다 주어야만 했다. 그는 그 때 기억해놓은 것을 아직도 잊지 않은 것이다. 오피스텔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그녀답지 않게 핑크 핑크한 물건들도 많았다. 그는 소윤을 소파에 눕혀두고 지아를 안아 그녀의 침대에 던져버렸다. 그녀의 몸에선 술냄새와 함께 땀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민혁은 얼굴을 왈칵 찌푸리더니 이불을 들어 지아를 덮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바보...”
그가 나가고 난 뒤 지아는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매트리스를 쓰다듬으니 아직 민혁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김에 취한 척을 하고 내심 기대를 하긴 했지만 역시 그녀에게 기회는 없었다. 애초에 술 먹은 여자를 덮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월요일, 모두가 월요병이라는 정체불명에 병에 걸리는 날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인문관 앞에 모여들었다. 그 이유는 초청강연을 듣기 위해서다. 한국대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을 섭외해 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참고로 올해 첫 번째 강연에서는 외국의 유명 종합검색엔진 가글의 시스템의 개발자가 직접 행차해 강연을 하기도 했다. 기대치는 한껏 높아져 있는 상황, 그것은 소윤과 지아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가 나올까?”
“.....글세....”
소윤과 지아는 저마다 커피를 하나씩 들고 인문관 앞에 붙여진 초청강연에 대한 공고문을 읽으며 말했다. 민혁도 살짝 식은 카페라떼를 조금씩 빨아들이며 공고문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강연을 하는 사람은 게시가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가글의 개발자와 같이 현대 시스템 개발에 큰 이바지를 한 사람이라고 적혀있었다. 민혁은 대충 공고문을 읽다가 소윤이 부르자 그녀를 따라 강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이미 강연장 안은 학생들로 모두 들어찬 상태, 다행히 지아의 친구가 자리를 맡아 놓은 덕분에 민혁과 소윤은 앞에서 두 번째 줄, 썩 괜찮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윽고 강연장이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내부의 불이 모두 소등되고, 강연의 주인공이 노교수와 함께 등장했다.
““와아아아아아~””
“언니 날 가져요!”
“꺄악~!”
“아....어째서 저 여자가....”
강연자의 등장에 학생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환호성을 내질렀고, 민혁은 강연자의 정체를 알고서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교수는 학생들의 기분을 잘 안다는 듯 잠시 기분 좋게 웃으며 그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노교수는 강연자를 소개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기 서 계시는 분은 본 교의 학생회장을 지낸 여러분의 선배이자 지금은 ‘수라’개발팀과 대표직을 맡고 있는 윤세라 씨입니다.”
노교수의 소개를 받은 윤세라는 한 발 앞으로 나서 강연장을 쭈욱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민혁과 지아를 찾아내고는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순간 민혁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윤세라라는 여자가 가진 집요함도 간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이 가는 소리와 살기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가 짐을 챙기려는 모양세를 취하자 윤세라가 마이크를 잡은 것이다.
“거기 남성분 혹시 제 강연이 듣기 싫으신 건가요?”
‘빌어먹을....’
윤세라는 민혁을 콕 짚어 얘기했다. 순간 민혁은 강연장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짧은 시간동안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민혁은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소윤이 눈을 희번떡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민혁은 불에 데인 듯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시선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집중되었다.
“거기 남성분? 앉아 있기 싫으시다면 앞으로 나와주시겠어요 강연 중 제 조수가 필요할 것 같거든요?”
“......”
그녀의 말에 민혁은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옆에서는 소윤이 계속해서 오오라를 발산중이었고, 윤세라는 간사한 혀를 이용해 대중을 현혹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완벽한 중과부적, 학생들의 술렁거림에 결국 민혁은 제 발로 윤세라의 옆으로 걸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지아는 부럽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민혁은 그녀의 입을 당장이라도 막아버리고 싶었다.
“자 그럼 강연을 시작하도록 하죠”
윤세라는 민혁이 자신의 옆에 뻘쭘하게 서자 히죽 웃으며 다시금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들은 현대 증강현실공학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론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신가요?”
윤세라의 질문 학생들 무리 여기저기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론이라는 대답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답이에요.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이론을 토대로 4차원 시공간 회전을 일으켜 가상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프로그래밍을 통해 숲, 공기, 하늘, 땅, 그리고 NPC를 채색한 것이 오늘날에 여러분들이 즐기고 있는 증강현실게임이에요. 그럼 혹시 4차원 시공간 회전을 프로그래밍하는 기초 표현 수단이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강연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공학도들은 머리를 싸맸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윤세라는 싱긋 웃더니 옆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 있던 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에 그는 이 여자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하는 두려움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우리 조수는 알고 있나요?”
유독 ‘우리’라는 악센트를 세게 넣는 윤세라의 행동에 소윤이 이를 바드득 갈았고, 민혁은 귀로 똑똑히 그것을 들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정답을 말했다.
“역시 민혁씨는 똑똑하네요. 정답은 H로런츠, 짧게 H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오늘 여러분께 강연할 내용이 증강현실학이기 때문이죠. 민혁씨 앞에 스크린을 내려 주시겠어요?”
“아.....네”
스크린이 내려가고 윤세라가 노트북을 조작하자 창혼전기의 조작장면이 화면에 띄워졌다. 학생들은 생동감 넘치는 액션장면에 눈을 떼지 못하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5분정도 이어진 플레이 영상이 끝나자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
‘사람은 참 괜찮은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윤세라의 강의를 듣던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버렸다. 물론 화들짝 놀라 얼른 부정해버렸지만 그 정도로 그녀가 강의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자 그럼... 제 강연은 여기까지에요. 마지막으로 부디 제 작은 지식이 여러분의 앞길에 거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짝짝짝짝
박수소리를 끝으로 휴식 시간 없이 이어진 두 시간 동안의 강연이 끝이 났다. 민혁은 무사히 강의가 끝나자 참아왔던 숨을 내쉬며 소윤의 옆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윤세라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민혁이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그의 손을 잡아 멈춰세웠다. 윤세라의 행동에 아직 강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학생들이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로 모였다. 여학우들은 어머어머하고 입을 가렸고, 남학생들은 질투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노교수는 흥미로운 눈길로 둘을 관찰했고, 소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민혁을 노려보았다. 당사자인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한건지 윤세라의 악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수 역할을 해준 만큼 보상이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절레절레
소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민혁은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흐음....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저는 꼭 드리고 싶네요...뭐가 좋을까요...아 그래요 자 여기요”
그녀는 풍만한 젖가슴을 가려주던 정장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한 장의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민혁은 됐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에 억지로 명함을 쥐어주더니 노교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물론 남겨진 민혁은 뒤에서 느껴지는 학우들의 불온한 눈빛과 소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명함을 받아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쳤다.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소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책들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지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혼자 남은 민혁은 윤세라에게 받은 명함을 구겨서 바닥에 던져버리고 재빨리 소윤의 뒤를 쫒았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 바닥에 남겨진 명함에는 그녀의 연락처와 전에 거래와 관련해 꼭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우와 이것도 맛있어 먹어봐 소윤아!”
“....응....”
강의가 끝나고, 민혁은 벌충을 위해 소윤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기 위해 평소 알아봐두었던 레스토랑에 방문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는거야...”
“왜이래... 친구끼리 서운하게..우리 사이에 저녁 한 끼 같이 먹을 수 있잖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