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 전초
* * *
그가 건내준 쇼핑백을 들여다보니 마카롱과 과자가 여러 가지 포장되어 담겨져 있었다. 민혁은 직접 고른 거냐고 물었다. 봉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지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초이스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봉국을 쳐다봤지만 일단 선물이었기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쇼핑백을 들고 봉국의 집을 나선 민혁은 지하철을 타고 한국대역에서 내렸다. 그는 대학가 먹자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이 즐비한 이곳에선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된 젊은 청춘들이 넘쳐났다.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민혁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제 갈 길을 갔다.
“아 여기야!”
152cm 언뜻 보면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 주위 술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미소녀가 민혁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바로 지아였다. 짧은 치마와 봄과 잘 어울리는 분홍색 니트, 그녀는 한껏 치장을 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술집 안에 늑대들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민혁은 그녀의 무방비함에 혀를 찼다. 그는 지아의 손목을 잡아 끌고 근처에 자주 가던 꼬치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어휴 넌 왜 이리 위기의식이 없냐!”
자리에 앉자마자 민혁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지아는 그가 잡아 끌었던 손목이 아팠던지 그곳을 매만지며 삐졌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그녀의 태도에 민혁은 이를 갈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아의 이마에 딱콩을 선물해주었다.
“아야... 너 이씨...!”
“뭐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꺼야!”
화를 내려던 지아였지만 그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리자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민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소윤에게 빨리오라고 문자를 했다. 지아는 괜히 거울을 꺼내 멀쩡한 화장을 고쳤다. 냉전은 소윤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나서야 풀렸다. 지아는 울먹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겼다. 소윤은 갑작스러운 허그에 놀랐지만 익숙한 듯 그녀를 안아주었다. 지아는 소윤의 품에 안긴 채로 민혁에게 혀를 메롱하고 내밀었고,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히기 위해 냉수를 들이켰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이렇게 셋이 모인 이유는 오늘이 바로 지아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은 소윤은 케이크와 포장된 선물을 지아에게 건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건 곰 인형이었다. 테디베어 모으는 게 취미인 지아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소윤이 선물한 인형을 꼬옥 끌어안으며 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오 뭐야 현금?”
“아니거든!”
장난스런 대화가 이어지고, 지아는 히죽 웃으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선물의 정체는 바로 호텔 2인 식사권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 위치한 곳의 것이었다. 꽤나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었고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지아는 해맑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꼬치 집답게 여러 가지 꼬치와 함께 식사가 준비됐다. 소윤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음식들을 흡입했다. 지아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라도 보고 갈까?”
“....좋아....”
“나 보고 싶은 거 있어!”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3시쯤 됐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던지라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들리기로 했다. 영화 선택은 지아가 맡았다. 그녀는 최신 공포 영화를 선택했다. 소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지만 민혁도 그 영화를 보고 싶었기에 지아의 선택을 지지했다. 간식 배는 따로 있는 터라 그렇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점에서 팝콘과 콜라를 사서 입장했다. 주말이라 빈 좌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자리는 스크린으로부터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었다.
“히힛 재밌겠다..”
지아는 영화가 기대 됐는지 연신 신나보였다. 민혁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윤이 그를 올려다봤다. 어딜 가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화장실을 간다고 말하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영화 시작 전이라 화장실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민혁은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잠시 스피커를 통해 삐익 소리가 났다. 영화가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0여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볼 일을 볼 수 있었다.
“뭐야....벌써 앞부분은 지나갔잖아..”
보통의 호러 영화나 공포 영화를 보면 괴기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이유나 일련의 사건 과정이 그려진다. 영화는 이미 그 과정을 뛰어 넘어 주인공이 귀신에 들리는 장면에 도달해 있었다. 민혁은 어두운 영화관 계단을 천천히 걸어 자리로 돌아왔다. 바깥 쪽 자리에 소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반 기절을 한 상태였다. 무서운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였기에 민혁도 이해했다. 그는 되도록 소윤이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옆을 보니 지아는 이미 영화에 몰입해 그가 오던 말던 신경 따위 쓰지 않고 있었다.
꺄아아악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을 덮치려고 하는 귀신을 피하기 위해 제 다리를 자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크린 속 영상에 몰입하던 관람객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기 바빴다. 하지만 민혁은 팝콘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무미건조하게 영화를 봤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쪼는 맛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반면 지아는 몸을 좌우로 뒤틀며 소리를 꽥꽥질러댔다. 그녀가 몸부림 칠 때 마다 들고 있던 팝콘이 여기저기 날려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기에 조용히 넘어갔다.
크아아아악
영화는 이내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아갔다. 주인공은 귀신에게 완전히 먹혀 애인을 살해하기에 이르렀고, 경찰들이 그를 쫒기 시작했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에 몸을 던져 투신한다. 하지만 귀신의 저주는 풀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붙어 이어져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민혁은 하품을 했다. 꼭 미국 B급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와 다르게 지아는 꽤 재미있었는지 미소가 얼굴에 가득 피어있었다. 반면 소윤은 덜덜 떨며 민혁의 등 뒤에 숨었다.
“와악!”
“..꺄악!”
지아는 그런 소윤의 뒤로 숨어들어가 놀래키기 바빴다. 민혁은 그녀의 정수리에 당수를 먹여주고, 눈물을 글썽이는 소윤을 달래주었다. 일행은 영화관에서 나와 조그마한 카페에 들어갔다. 민혁과 지아는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소윤은 어른 둘이 먹고도 남을 파르페를 시켰다. 그는 좀 있으면 저녁을 먹을 텐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소윤은 파르페 위에 얹어진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달달한 디저트를 맛있게 먹는 소윤, 민혁은 입을 작게 벌리며 그녀에게 한 입 달라고 말했다.
“음...맛있네”
“......”
“아우...염장 좀 그만 질러!”
소윤은 볼을 발그레 붉히면서도 그에게 아이스크림 떠먹여주었다. 그는 입 안에서 사르르 없어지는 단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맛있었다. 옆에서 둘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지아는 솔로는 못 살겠다며 몸서리를 쳤다.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 일행은 카페에서 나와 한강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음에도 사람은 많았다. 연인 혹은 가족 단위로 한강의 야경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다. 좋은 날에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민혁과 지아 그리고 소윤은 저녁 대신 가볍게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안주는 푸드 트럭에서 샀고, 술은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왔다.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맥주 캔이 부딪치고, 소윤과 민혁은 그녀의 생일을 다시 한 번 축하해주었다. 지아는 히죽 웃더니 들고 있던 맥주를 원샷했다. 그녀는 아저씨처럼 크흐소리를 내며 빈 맥주 캔을 편의점 봉투에 집어넣고 새로 맥주를 개봉했다. 민혁은 그녀가 처음부터 달리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벗과 함께 경치와 함께 술을 들이키다 보니 바닥에는 금세 빈 캔들이 나뒹굴었다. 소윤은 볼을 발그레 붉히며 민혁의 무릎에 기대 잠이 들었고, 지아는 맥주를 더 사와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에 쓰레기들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는 소윤을 조심스레 깨웠다.
“일어나 이제 집에 가야지”
“...응....”
민혁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우며 말 못할 걱정을 했다.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회식 자리가 있을 때, 혹시나 주변 동료 남자들이 흑심을 품는다면 그녀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그가 혼자서 일을 해도 충분히 두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무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한국대학에 입학한 재녀 중에 재녀다. 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을 것이다. 그는 지금부터라도 그녀와 술 마시는 연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뭐야...오늘 정도는 나 먼저 신경 써줘도 좋잖아...’
한편 민혁이 소윤을 챙기는 것을 술을 마시며 쳐다보던 지아는 시무룩해졌다. 절대 자신의 마음을 티내지 않겠다는 각오도 술 앞에 무너진 것이다. 그녀는 맥주캔을 거칠게 쓰레기 봉투에 집어 던지더니 큰 걸음으로 민혁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는 스페인산 황소처럼 다가오는 지아를 보며 의아해했지만 이내 그녀가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자 두 팔로 받아주었다. 그는 술에 취해 꼴아 떨어진 지아를 보며 혀를 찼다.
“택시!”
한쪽에는 소윤을 부축하고 다른 한쪽에는 지아를 부축한 민혁은 택시를 잡기 위해 한강 대로변으로 나왔다. 저녁이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다행히 택시는 많았다. 그는 앞에 멈춰선 차문을 열고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는 쌩쌩달려 강남구를 지나 대치동 근처에 도착했다. 민혁의 집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지아의 집이 이 근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홀로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을 눌렀다. 같이 탄 남자 승객은 민혁을 보며 부럽다는 시선을 연신 날렸다.
띵똥
1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민혁은 문이 열리자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아의 집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녀가 아직 신입생일 때 선배가 준 술을 거부하지 못하고 잔뜩 먹고 취한 적이 있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민혁은 그녀를 데려다 주어야만 했다. 그는 그 때 기억해놓은 것을 아직도 잊지 않은 것이다. 오피스텔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그녀답지 않게 핑크 핑크한 물건들도 많았다. 그는 소윤을 소파에 눕혀두고 지아를 안아 그녀의 침대에 던져버렸다. 그녀의 몸에선 술냄새와 함께 땀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민혁은 얼굴을 왈칵 찌푸리더니 이불을 들어 지아를 덮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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