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전초
* * *
니드의 말에 게드욘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네...그렇습니다....”
그의 질문에 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세나 애초에 출하량이 줄어든 것은 인간들이 호숫가에 쓰레기들을 무분별하게 버리는 탓인데 자네들에게 뭐라할 수는 없지 암....”
평소 그의 태도가 아니었다. 전에 이런 말을 꺼냈을 때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것처럼 노발대발 성을 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노신사처럼 니드와 세이레네스들의 사정을 이해한다며 인자한 척을 했다. 그녀는 눈가를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의 끝은 하울에게로 향해 있었다. 게드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넙쭉 엎드렸다. 하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어찌된건지 모르겠으나 그는 하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게드욘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하울을 바라봤다. 중년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그녀는 당장 눈을 내리 깔으라며 소리쳤다. 그는 찔끔하며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하울은 다리를 꼬며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봤는지 물었다. 게드욘은 머리를 숙인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어렸을 적 육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게드욘은 그 때 블루 드래곤 탈리스아를 만나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드래곤은 그에게 몸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비보를 주었다. 덕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님프들을 이끌고 세이레네스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저는 그 분과 1년 가까이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아무리 작은 드래곤 피어라도 감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흠...탈리스아라....”
잠시 생각을 하던 하울은 게드욘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말하는 블루 드래곤 탈리스아는 옛부터 고생을 하거나 난처한 상황에 빠진 이종족이 있다면 발 벗고 나서기로 유명한 드래곤이었다. 게드욘은 하울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것에 기뻐했다. 그는 하울에게 혹 세이레네스가 그녀의 비호를 받는 부족이라면 물복숭아와 관련된 협상을 백지로 돌려놓겠다고 말했다. 니드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하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녀여 올해부터 물복숭아는 공물로 바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재화를 내고 구입하도록 하지”
퀘스트 ‘님프와 세이레네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니드에게 물복숭아를 받으십시오. 게드욘의 지팡이가 보상으로 추가됩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네..’
상황을 봐서는 피까지 볼 작정을 하던 민혁은 시스템 창으로 퀘스트가 완료 상태로 변한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 감사합니다!”
돌아가던 상황을 살피던 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게드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위치한 지팡이를 가져왔다. 그는 하울에게 그것을 건내 주었다. 그녀는 이걸 왜 자신에게 주냐며 그를 쳐다보았다. 게드욘은 혹시 블루 드래곤 탈리스아를 만나게 된다면 이것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울은 게드욘은 양보한 것이 있기에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물론 만나게 된다는 전제하였다. 드래곤은 유희를 떠나고 긴 잠을 취한다. 그것이 맞물린다면 둘의 만남은 게드욘이 죽은 이후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몇 백 년 몇 천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시간이 남으신다면 해마장이라도 보고 가시는게...”
성문 앞, 게드욘은 돌아가려고 하는 하울을 보며 물었다. 그는 얼굴 가득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됐다고 말하며 성을 나섰다. 일행이 떠나고 나서도 게드욘은 한참 동안 성문에 서서 하울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길, 일행은 하울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님프 족의 성에서 나온 후부터 저기압이었기 때문이다.
“민,민혁님....”
아리나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민혁은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리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그에게 고난의 길을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조심스레 성큼성큼 걷고 있는 하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하울은 고개를 홱돌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기세가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독오른 살모사와 같았다. 민혁은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하울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왜 왔어...”
짜증이 오를대로 오른 그녀의 목소리, 민혁은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 아니 그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 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후우.....야 넌 드래곤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녀의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곤과의 사랑이라 민혁은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긴 수명을 가지고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데 남자 입장이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하울에게 괜찮을 것 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볼을 사르르 붉히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래곤은 만년을 사는 생물이야..사랑은 한다고 해도 같은 동족 혹은 신족과 나누지 왜냐 다른 생물들의 수명이 너무 짧으니까...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혹은 미쳐버릴까봐...”
“흠...확실히....사랑하는 사람이 늙어 죽는데 나만 쌩쌩하면 이상할 것 같긴하다...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방금 전 님프...”
하울은 게드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 게드욘?”
“그래 그 녀석 나를 탈리스아와 겹쳐보고 있었어....”
탈리스아라면 게드욘이 목숨을 구해지고 은혜를 입었다는 블루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어?”
“하아...뭐 겹쳐만 본다면 문제가 없지 어차피 같은 드래곤인데....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 탈리스아에게 빠진 것 같더라고...”
그가 보기에도 게드욘은 드래곤에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은 설마하는 생각으로 하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드욘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탈리스아를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 상대가 드래곤이라니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보답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랑 따위 질색이었다. 퀘스트 ‘님프와 세이레네스’를 마친 민혁은 로그아웃을 했다. 증강현실 기계가 멈추고, 민혁이 그 안에서 나왔다. 그는 목과 허리를 우드득 소리를 내며 풀었다.
“너무 오래있었나...”
온 몸이 찌뿌둥했다. 오늘은 4월 29일 토요일, 꿀 같은 주말이었다. 소윤은 친정댁에 볼 일이 있어서 집을 비운 상태였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서툴게 만든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토스트와 닭가슴살 샐러드, 민혁은 바보 같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는 이내 의자에 앉아 랩에 감겨져 있는 토스트를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안에는 햄과 치즈, 계란이 들어 있었다. 모양은 약간 그랬지만 맛은 매우 좋았다. 토스트를 다 먹어치운 그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샐러드와 곁들여 먹었다.
음식을 깔끔하게 비운 민혁은 싱크대에 빈 접시들을 집어넣고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소윤과 만나기 전 혼자 살 때에는 음식, 설거지, 빨래 기타 등등 혼자 할 게 너무 많았지만 최근 동거를 하며 많이 편해졌다. 물론 심적으로도 많이 안정을 찾았다. 그는 설거지를 마치고 거울을 봤다.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는 이마가 드러나게 머리를 뒤로 넘기며 욕실로 향했다. 칫솔꽂이에는 민혁의 것과 소윤의 것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응 알았어 거기로 갈게”
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리고 몸단장을 끝낸 민혁은 단정한 옷을 꺼내 입고 봉국과 전화를 마쳤다. 오늘은 그가 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배웅도할 겸 빌렸던 차도 돌려줄 겸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민혁은 차키를 챙겨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가구 장만을 위해 봉국에게 빌린 SUV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인천공항까지는 40분이 소요됐다. 햇살이 좋아서 길이 막힘에도 별로 지루하거나 하지 않았다.
“형!”
게이트에서 짐을 끌고 나오는 사람들, 민혁은 그 무리 속에서 봉국을 발견했다. 그는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불렀다. 봉국은 두리번거리다 민혁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짐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민혁은 그것들을 일부 받아 들어주었다. 봉국은 너희 선물도 있다며 조심히 들라고 말했다. 민혁과 봉국은 짐을 차에 싣고 인천공항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봉국의 집이 있는 인천이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추욱 늘어졌다.
“좀 씻고 자...”
“어휴...힘들어...씻기도 귀찮아...”
봉국의 말에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어느새 잠든 봉국을 내버려두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념품 등은 모두 식탁에 올려두었고, 짐 가방에 든 빨랫감은 세탁기에 분류해서 넣었다. 정장은 드라이크리닝을 위해 직접 세탁소에 맡겼다. 집에 돌아와 보니 봉국이 깨어나 있었다. 그는 컵라면 하나를 비우고 있었다.
“그럼 나 이제 간다”
“야 이거 가지고 가 선물이야”
그가 건내준 쇼핑백을 들여다보니 마카롱과 과자가 여러 가지 포장되어 담겨져 있었다. 민혁은 직접 고른 거냐고 물었다. 봉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지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초이스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봉국을 쳐다봤지만 일단 선물이었기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쇼핑백을 들고 봉국의 집을 나선 민혁은 지하철을 타고 한국대역에서 내렸다. 그는 대학가 먹자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이 즐비한 이곳에선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된 젊은 청춘들이 넘쳐났다.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민혁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제 갈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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