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전초
* * *
니드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물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펄쩍펄쩍 뛰다가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님에게 그런 부탁까지 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마음씨 고운 아가씨의 말에 민혁은 그럼 다른 방도가 있냐고 물었다. 니드는 입을 꼬옥 다물었다. 대책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좋은 방도가 생각났다. 민혁은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님프족을 무찔러 줄테니 그들에게 주려고 했던 물복숭아의 반을 달라고 말이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세이레네스들에게는 좋은 조건이다. 잠재적 위험 요소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니 말이다.
“그,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니드는 하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조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과즙이 잔뜩 터져나오는 물복숭아를 생각하면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민혁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자 퀘스트창에서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퀘스트 ‘님프와 세이레네스’
50년 전 님프족의 왕은 세이레네스들이 키우고 있는 물복숭아와 호숫가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는 님프들의 승리였다. 그들은 강력한 병장기와 왕의 압도적인 힘으로 세이레네스들을 무참히 살육했고, 당시 마을의 장은 종의 보존을 위해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 님프의 왕은 세이레네스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지만 신의 제사와 물복숭아 재배를 맡을 이가 필요했다. 그는 그들을 과수원의 관리자로 임명했고, 마을의 우두머리 자리를 없애버리고 무녀가 마을의 대소사를 관리하게끔 만들었다. 어색한 평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5년 전 물복숭아의 출하량이 낮아지면서 님프의 왕 게드욘은 세이레네스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다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퀘스트 성공: 님프의 왕 게드욘의 죽음, 님프 족과의 협정
퀘스트 실패: 전쟁 발발, 플레이어 죽음
보상: 물복숭아 800개, 게드욘의 지팡이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그는 주저 없이 Y를 선택했다. 일행은 일단 니드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세한 상황이나 지도 따위를 넘겨 받아야하기 떄문이다. 그녀는 싱글벙글하며 일행을 안내했다. 니드의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니레스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을 보아 니돈에게 하울의 정체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쳐박았다. 그리고는 연신 죄송하다며 소리쳤다. 하울은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니레스의 머리를 콰악 밟았다.
“뭐가 그리 죄송할까?”
“위대하신 분을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를 짓고서도 숨을 쉬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하울의 미소를 보지 못한 니레스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악취미에 민혁은 그만하라며 발을 치웠지만 그럼에도 니레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하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히죽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일어나 피곤하니까 빨리 쉬고 싶거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레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니드는 동생의 철없음에 한숨을 내쉬더니 민혁 일행이 님프족과의 분쟁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것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니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이번에는 감사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하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혁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아리나는 싱긋 웃으며 민혁에 팔에 달라붙었다. 티샤는 잠시 엎드려 있던 그를 바라보다 민혁의 다른 쪽 팔을 잡아 끌었다.
이튿날 민혁 일행은 니돈과 다른 세이레네스들의 배웅을 받으며 니드와 함께 님프 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원래 그녀를 따라오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니드가 꼭 따라가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니레스도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하울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님프 족의 영역으로 가는 길은 호수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둠만이 피어오르는 길목, 그 안에는 에메랄드로 이루어진 동굴이 있었다. 아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와 동굴 벽이 모두 에메랄드로 되어 있어요!”
“정말 예쁘죠? 이 동굴은 호수의 자랑거리 중 하나랍니다....비록 님프들이 장악하고 와 볼 기회가 적어지긴 했지만요..아 그리고 벽을 만지면 안돼요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있거든요!”
니드의 말에 벽을 만지려던 티샤는 흠칫 놀라며 벽으로부터 떨어져 민혁의 뒤에 섰다. 그는 피식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려주었다. 갸르릉 거리는 티샤를 곁에 두고 일행은 앞으로 전진 했다.
“잠깐 정지!”
얼마 가지 않아 창과 방패 그리고 갑옷으로 무장을 한 님프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쇠로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등 뒤에는 나비의 날개와 비슷한 것이 달려있었다. 그들은 앞서 나가던 니드를 창을 세워 멈추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깨에 매고 있던 작은 가방 속에서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패를 하나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님프 병사들은 패를 찬찬히 살피더니 니드의 뒤에 서 있던 민혁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 이분들은 저희 세이레네스 부족의 손님들이에요!”
“너희 세이레네스의 손님이지 우리 님프의 손님은 아니다. 저들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다. 너도 알다시피 외부인을 들여보내는 것은 금지......”
깐깐한 병사의 말에 편히 들어가기는 글렀다는 것을 느낀 하울이 앞으로 나왔다. 님프 병사는 왠 키 작은 꼬마가 돌발 행동을 취하자 창을 내밀며 경계를 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수강을 만들어 창대를 잡아 꺾어버렸다. 님프 병사는 기함을 토하며 창을 얼른 던져버리고 목에 달린 호각을 불려했지만 하울의 마법은 이미 발동된 상태였다. 그녀의 마법으로 인해 님프 병사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눈만 뒤룩뒤룩 굴리다 하울의 주먹을 복부에 얻어맞고 기절해 버렸다.
“생각보다 약한데요?”
“그러게.....”
병사가 맥없이 쓰러지자 아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드래곤의 마법이라고는 하나 최소한 발버둥 정도는 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혁은 기절해 누워 있는 님프족 병사의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Level: 82
이름: 드론
종족: 님프
경지: 정예 병사
체력: 19006/19006
생각 외로 레벨도 높고, 강했다. 그는 왜 세이레네스가 전쟁에서 패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민혁과 일행은 기절한 병사를 버려두고 님프 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이레네스들의 집이 뿔소라 모양과 비슷했다면 님프 족의 건축 양식은 마치 옛 그리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군데군데 약간 낡은 곳이 많았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멋이 있었다. 님프들은 세이레네스족의 무녀와 인간들이 같이 마을로 들어서자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 병사들이 제지를 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드욘이 있는 곳은 어디야?”
“음...그는 주로 성이나 해마장에 기거해요”
“해마장?”
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마장이란 경마장처럼 해마를 말 대신 타는 경기장이었다. 게드욘은 해마를 타는 것을 즐겨한다고 한다. 하울은 우선 성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민혁도 동의했다. 니드는 그들을 님프족의 왕이 사는 성으로 안내했다. 사실 성이라고 해서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다른 집들이 1층집 정도라면 왕이 사는 곳은 5층집 정도의 크기였다. 다만 병사들이 주위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니드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병사들은 당연히 창을 세워 들며 정지하라고 외쳤다.
“세이레네스의 무녀여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가 그리고 뒤의 외지인들은?!”
“물복숭아 열매와 관련해 협상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쪽 분들은 물복숭아 재배를 도와주기 위해 초빙한 분들이에요”
그녀의 말에 병사는 그런 말을 왕에게서 듣지 못했다며 돌아가라 말했다. 하지만 니드는 물러서지 않고, 꼭 게드욘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병사는 잠시 고민하다 상급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병사가 나왔다. 그는 니드에게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달려 있는 단검을 병사에게 건내 주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민혁과 아리나, 하울이 들어갔다.
“잠깐!”
“......?”
병사는 티샤의 앞을 막았다. 그녀는 왜 자신의 앞만 막은 건지 의아해하다 그의 시선을 읽었다. 님프족 병사는 티샤의 단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를 맡기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민혁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티샤는 지금껏 살면서 단검을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렷을 적부터 절대 몸에서 무기를 멀리 하지 말라고 세뇌에 가깝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민혁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티샤의 귀가 추욱 쳐졌다. 그녀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단검을 병사의 손에 쥐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다.....”
단검을 맡기고 나서야 티샤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옆에 있던 민혁은 안쓰러운 티샤의 얼굴을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정신력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바보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티샤의 허리를 잡아 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민혁은 부드럽게 티샤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님프족 병사의 안내에 따라 성 내 복도를 걸었다.
“들어가라 왕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병사는 왕이 머무는 방까지 일행을 안내해주고, 자리를 떴다. 왕의 방 답지 않게 호위 병력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막상 게드욘과 만날 생각을 하자 니드는 긴장이 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용기를 내 문을 똑똑하고 두들겼다. 안에서 게드욘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들어오라고 말했다. 니드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오 무녀 어서오게나”
Level: 159
이름: 게드욘
종족: 님프
경지: 위대한 통치자, 5서클 마스터
체력: 38566/38566
마나: 21109/21109
꽤나 화려한 능력치였다. 세이레네스들이 전쟁에서 진 것도 이해가됐다. 세이레네스들의 마을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이는 니돈으로 100을 겨우 넘겼었다.
“안녕하세요 게드욘님...”
“오랜만이구만...뒤에 분들은...흐음...일단 앉게나”
민혁이 게드욘의 능력치를 파악하고 있는 사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게드욘의 호의에 니드는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리나와 하울도 자리에 앉았다. 민혁은 자리가 모자른 것을 보고 티샤와 함께 서 있기로 했다. 그는 니드의 뒤로 가서 마치 호위를 하듯 자리를 잡았다. 그를 눈여겨보던 게르욘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무녀여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물복숭아의 출하량 때문인가?”
“그렇습니다...5년 전부터 물복숭아의 출하량이 줄어들어 이번 해 공물은 양이 적어질 거 샅아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니드의 말에 게드욘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네...그렇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