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전초
* * *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자 환수는 여지껏 니드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내보였다. 하지만 하울이 입을 빨리 닫으라는 모양새를 취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민혁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자 아리나와 티샤를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환수는 그를 보고 으르렁 거렸지만 하울이 제발 닥치라고 소리치자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그 꼴이 꽤나 웃겨 민혁은 피식 비웃어주었다.
“야 너 얘 포기해”
[네?! 그,그게 무슨 전 포기할 순 없습니다 전 이 아이를 사랑합니다!]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말에 환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울은 뒤를 돌아 니드를 바라봤다. 그의 사랑고백에 그녀는 분명 볼을 붉히고는 있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드의 부정적인 반응에 환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내보였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그의 진실된 얼굴에 니드는 잠시 흔들렸지만 역시 이런 결혼은 사양이었다.
“봤지?”
[기,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치 딸을 달라는 사위와 장인어른의 관계 같은 대화, 환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울은 한숨을 쉬며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니드에게 어쩔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니드는 환수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푸른 거체에 근엄한 용의 형상을 한 그, 그녀는 왜 자신을 사랑하냐고 지금껏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환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밝혔다. 좀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급한 성격 때문에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고 말했다.
“조금만......천천히 다가오셨다면 저희의 관계는 달라졌을 지도 몰라요....”
[미안하다....]
진심이 담긴 그의 사과에 니드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동안의 오해를 풀며 천천히 한 발자국 씩 서로에게 다가갔다. 민혁은 두 사람의 관계가 꼭 봉국과 그의 아내 꼭 형수님 사이 같다 여겼다. 둘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형수님이 봉국에게 들이댔고, 봉국은 그녀가 헤픈 여자인줄 알고 피하기만 했다. 결국에는 그의 중재로 오해를 풀고 결혼까지 골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풋풋한 사랑이었다. 두 사람도 그러했다. 니드는 어느새 볼을 사르르 붉히고 있었고, 환수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쑥쓰러워하고 있었다. 민혁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둘이서 잘 해내갈 것이라 생각했다.
“우린 이만 빠져주자”
“히힛..네!”
“...흐음....알겠다......”
아리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티샤는 아직 환수를 미심쩍게 쳐다보았지만 그의 말을 따랐다. 민혁은 니드와 환수 사이에 서서 무시하지 말라며 자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하울을 끌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록 퀘스트는 실패하게 되겠지만 오작교 노릇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민혁 일행은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여관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에 하울이 이유 모를 짜증을 냈지만 마음 넓은 민혁은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우르르르 콰앙
호수를 지나 숲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하늘에서 먹구름이 피어올랐다. 민혁과 여성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환수가 큰 날개를 펄럭이며 낙하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환수는 바닥에 착지해 가장 먼저 하울에게 예를 취했다.
“뭐야 니드는 어쩌고 여기 왔어?”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며 말했다.
[니드와는 이야기가 잘 됐습니다..천천히 알아가는 관계가 되는 것으로...그래서 말인데 그 쪽 인간 분에게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퀘스트 ‘세이레네스 무녀의 우울’
용의 신전 근처에 위치한 호수 아래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마을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세이레네스들이 호수의 신 하쿠를 모시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태어날 세이레네스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1년에 한 번 무녀를 통해 호수의 신 하쿠에게 노래를 공양한다. 환희의 무녀 니드도 어머니에 이어 무녀가 되어 호수의 신인 하쿠에게 노래를 공양했다. 허나 그 노래를 듣고 나타난 건 신이 아니라 한 마리 망종이었다. 그는 호수의 마을까지 찾아와 막무가내로 혼인을 강요했고, 그녀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해 1년의 말미를 얻은 상태다. 그녀의 노래에 끌린 당신은 못돼먹은 환수로부터 니드를 해방하고 마을을 지켜야만 한다.
퀘스트 성공 조건이 플레이어의 노력으로 인해 변경되었습니다. 환수 ‘라 데네이루’와 무녀 ‘니드’는 사랑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라 데네이루’로부터 보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데네이루 즉 환수가 건내준 동그란 환을 받자 놀랍게도 퀘스트 내용이 변경되어 완료 상태로 변했다.
“이게 뭡니까?”
[계약의 문입니다. 환수와 계약을 할 때 쓰는 것이지요....사용법은 위대하신 분께서 알고 계실겁니다.. 전에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되어 브레스를 날린 것을 사과드릴 겸 선물하는 겁니다..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어제 브레스를 날리던 그 성난 환수가 맞나 싶은 태도였다. 민혁은 데네이루가 준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는 방긋 웃더니 하울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하고 하늘로 날아올라 호수 쪽으로 사라졌다. 하울은 왜 자신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냐며 투덜거렸다. 민혁은 그녀가 있었기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하울에게 뭔가 줄만한 것이 없나 인벤토리를 뒤져보았다.
“그럼 이거라도 가질래?”
“......!”
민혁이 건낸 것은 세공이 된 목걸이였다. 예전에 북해빙궁에서 퀘스트를 깨고 얻은 빙정의 정수라는 S등급 장신구였다. 목걸이를 만들 때 소량이지만 빙정이 들어가 음기가 흘러 남자인 그가 끼기에는 옵션이 반감돼 가지고만 있던 것이다. 하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민혁은 그렇게 좋은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니 됐다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아리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제껀요!’라고 그에게 달라붙었지만 수중에 있는 게 저것 하나뿐이었다. 민혁은 그녀에게 나중에 벌충하겠다고 말했다. 아리나는 장난이라며 주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난 줬으면 좋겠다......”
“......!”
티샤의 역습에 아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인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민혁은 그녀에게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약속에 티샤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고, 아리나는 그녀에게 달라붙어 세치기는 안된다며 앙탈을 부렸다. 이후 민혁은 아직도 목걸이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하울을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용의 신전에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일찍 쉬기로 했다.
용의 신전은 폭군 알터 라이고가 생을 다한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드래곤의 사체가 대륙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드래곤의 이름은 베글렛 암브로시오 블루 일족의 장로 드래곤들 중 하나였다. 보통 드래곤의 사체는 자연으로 환원되지만 그는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베글렛은 본래 용의 신전의 터가 있던 곳에 레어를 짓고 살았다 현재 로랑 영지라 불리는 곳에서는 그를 받들어 모시며 10년에 한 번 꼴로 여자를 받쳤다. 베글렛은 동족을 제물로 받치는 그들의 행위를 혐오했지만 자신이 여자를 받지 않으면 제물로 받쳐질 예정이었던 여자가 마녀사냥을 당하며 죽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물로 받쳐진 여자들은 대게 그의 레어에 들어서면 공포에 젖어 바들바들 떨었다. 베글렛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손도 대지 않았건만 그런 반응이라니 그는 금세 호기심이 떨어져 제물로 받쳐진 여자들에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녀들이 굶어죽나 가디언에게 밟혀죽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제물로 들어온 여자가 레어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베글렛을 찾고 있었다. 그는 당시 긴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드래곤은 유희를 마치면 동면 가까운 잠을 청해야만 했다. 긴 세월을 살면서 미치지 않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잠을 방해받자 짜증이 났다.
[내 잠을 왜 깨운 것이냐]
화가 난 그는 곧장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해 자신을 찾는 여자의 앞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은 좀 더 나은 삶이었다. 제물로 받쳐져 자신의 인생이 엉망이 됐으니 베글렛에게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청을 받아드렸다. 왜냐하면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용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베글렛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던지 들어주었다.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가르쳤고, 먹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마계를 찾아서라도 갖다 바쳤다. 그의 극진한 태도에 그녀도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인간인 그녀에게 그의 레어는 너무 좁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은 싫었다. 좀 더 빛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녀는 베글렛에게 밖으로 나가고 싶다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아니 된다 말했다. 베글렛이 여자의 청을 거절한 후 그녀는 빛을 잃어갔다. 탄력적인 몸은 점점 말라갔고, 눈동자에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여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단 한 달이었다. 그의 제안에 그녀는 기뻐하며 여행 짐을 꾸렸다. 베글렛에게 마법과 무예를 배운 그녀는 소드 마스터라 해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심해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마취독이 든 술을 마시고, 그녀의 미모를 노린 도적들에게 처참하게 능욕당한 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베글렛은 1년 , 10년 , 100년 더 이상 시간이라는 단위가 소용이 없어질 때까지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균형자라고 불릴 그조차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베글렛은 마지막으로 염원했다. 그녀의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여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생각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 자신의 레어를 여자가 원했던 것처럼 빛이 잘 드는 신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죽고서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신의 시체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전에 비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다.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용의 신전이 지어졌고, 그 안에는 베글렛이 눈을 부릅뜬 채 지금도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슬픈 이야기네요......”
“......”
하울의 옛날이야기를 들은 그녀들의 반응은 동일했다. 아리나는 울상을 지었고, 티샤도 표현 하지는 않았지만 귀가 추욱 처진 것이 그녀의 감정을 대변했다. 민혁은 솔직히 말해 드래곤이 호구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퍼주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다. 그는 이런 결말이야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진들은 제각기 생각을 말하며 용의 신전으로 가는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상아로 만든 반지입니다! 소중한 연인에게 선물해보세요!”
“맛있는 크램스프 맛보고 가세요!”
관광지답게 용의 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장사꾼들과 상인들이 가득했다. 커플들은 팔짱을 끼고서 괜찮은 물건이 없나 살피고 있었고, 간혹 보이는 신혼부부들은 세공사들이 내놓은 반지와 목걸이 등을 구경했다. 민혁은 쓸만한 아이템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대부분 C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아리나와 티샤는 상아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구경했고, 하울은 민혁이 어제 주었던 목걸이를 만지작거릴 뿐 다른 것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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