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전초
* * *
“탈리스만가는 들어라! 내 동생 퍼지 포베너는 너희들의 간악함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나의 충실한 기사는 사신 자격으로 탈리스만가를 방문했음에도 목이 베어졌다. 게다가 너희는 그 충절한 자를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로 하여금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의 오만과 방만을 좌시하지 않음에 이곳에 서 있다! 대화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승리뿐, 자 돌격하자 포베너가의 군사들이여!”
멋들어진 릴리의 연설이 끝나고,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장의 서막을 알리는 소리였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파티를 이끌고 준비해둔 사다리와 충차를 이용해 성벽에 올라가려 했고, 배틀메이지와 병사들은 마법과 기름을 이용해 그들을 방해했다. 묘족 기사들은 그들의 특기인 활을 이용해 배틀메이지를 저격하려 했지만 베리어가 있어 쉽지는 않았다.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하단 것을 아는 릴리는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길 원했다. 그녀는 옆에 서 있던 묘족기사에게 활을 받아 들었다.
“아크 스톰(Arc strom)!”
그녀가 활시위에 건 화살은 바람과 뇌기를 끌어모았다. 초자연적인 그것들은 회오리 모양을 이루며, 화살을 감쌌다. 릴리는 컨트롤이 어려운지 활을 든 팔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고 성문에 조준을 했다. 그리고 이윽고 활이 출발했다. 콰앙하고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바람을 가르는 화살은 순식간에 성문에 충돌했다.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고, 모두가 결과를 주목했다.
“말도 안돼!”
“용병왕님께 배운 비기가!”
용병왕의 유일한 제자인 그녀가 쏜 화살은 놀랍게도 성문에 상처 하나 만들지 못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성문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트리거 탈리스만을 노려보았다. 그의 짓이었다. 성문은 투명한 막에 의해 보호되는 중이었고, 그의 주변에는 엄청난 마나 유동이 느껴졌다. 곧 트리거의 머리 위에서 엄청난 크기의 화염구가 생겨났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강하했다.
“모두 피해라!”
릴리는 화염구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깨닫고 주위에 소리쳤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고, 기사들은 대열을 지키며 이탈했다. 릴리도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말을 움직이려는 순간 바인드 마법이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칫! 허튼 짓을!”
그녀는 아쉽지만 정들었던 말을 버리고 몸을 날렸다. 흔히 말하는 나려타곤의 자세였다. 릴리는 바닥을 굴러 화염구를 피했고, 먼지에 휩싸였다. 탈리스만의 병사들을 그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트리거도 그녀가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릴리는 눈앞을 가리는 먼지를 풍압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예기가 허공에서 빛났다. 릴리는 비릿하게 웃고 있는 트리거를 한 번 째려보고, 기사들과 함께 성문으로 돌진했다.
“일이 재밌게 됐네..”
민혁은 릴리와 트리거의 공방을 지켜보다 말했다. 옆에 서 있던 티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아리나는 방금 전의 공방이 뭐가 재밌냐며 물었다. 민혁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방금 전 트리거가 마법을 날릴 때 바인드 마법을 날린 것은 분명히 아군이었다. 누가 날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들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릴리가 과연 그것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성문을 뚫더라도 스파이가 있다면 탈리스만 성을 함락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흠...글쎼...”
민혁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순간 어젯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의 귀여웠던 모습이 떠올랐다. 민혁은 릴리에게 스파이의 존재를 알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리나의 안전도 지킬 겸 그녀와 하울을 릴리에게 보내기로 했다. 하울은 왜 내가 가야하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포기하고 아리나와 그녀 자신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어 모습을 감췄다. 남게 된 티샤와 민혁은 성문으로 향했다. 말보다 빠른 그들의 속도에 포베너가의 병사들과 용병들은 당황했지만 길을 비켜주었다.
“비켜라!”
성문에 거의 도착한 민혁은 허리춤에서 천라수라도를 꺼내들고 문에 붙어 있는 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용병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민혁을 보고, 놀란 그들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기를 잔뜩 머금은 천라수라도를 성문을 향해 휘둘렀다.
채앵
이번에도 트리거의 마법이 그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티샤의 연이은 공격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투명한 막에 막힌 민혁의 검 위에 자신의 검을 덧대었다. 강대한 충격에 트리거의 마법은 깨진 유리처럼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용병들은 릴리도 해내지 못한 것을 같은 용병이 해내자 와아아아함성을 지르며, 성 안으로 돌격했고, 트리거와 배틀메이지들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민혁은 씨익 웃고는 티샤와 함께 탈리스만의 반지가 있을 영주성으로 향했다.
시가지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용병들이 각자 탈리스만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용병측 마법사들은 배틀 메이지를 막는 데 주력했다. 민혁은 그들을 지나쳐 유유히 지나갔다. 간혹 그의 앞을 막는 겁 없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단칼에 죽임을 당했다. 영주성 내부의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피난을 간 것 같았다. 그는 탈리스만의 반지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고위급 인사를 찾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성으로 바로 가는 게 좋겠지?”
끄덕
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멀리 보이는 큰 첨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금세 영주성에 침투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유명한 탈리스만가답게 곳곳에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아쉽게 작동은 되지 않았다. 민혁은 기감을 넓혀 성 내부를 훑어 보았다. 밖의 전부 때문인지 내부를 지키는 인원은 많지 않았다. 그는 성 내부를 관찰하다 낯익은 기운을 발견했다. 최상층, 클레드의 것으로 보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자”
“...알겠다.”
그의 제안으로 둘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중간 중간 배틀메이지들이 길을 막아섰지만 티샤의 암기술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생과 이별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민혁은 영주성 최상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트리거는 전쟁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아들인 클레드가 이곳에 남은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별 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티샤가 경계를 했고,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응...?”
내부는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붉은 색이었다. 마치 사람의 피와 같은 색이었다. 민혁은 그것을 보고서 의아해 했지만 방 중앙에 앉아 있는 클레드를 보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꽂은 채 죽어 있었다. 손은 바닥에 떨어트리고 있었고, 고개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민혁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죽어 있는 자세가 이상했다. 티샤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시체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자살이 아니다..”
“자살이 아니라니 그럼?”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한 것 같다......”
티샤는 암살을 한 것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민혁도 동의했다. 그의 레벨은 무려 169였다. 시프마스터인 티샤마저도 쉽지 않은 상대인 것이다. 그런 그가 암살을 당하다니 민혁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생각을 하다 혹시 포베너가가 벌인 일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릴리에게 별 다르게 들은 말은 없다. 물론 그녀가 아직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에 비밀로 한 것일 수도 있다. 민혁은 괜히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탈리스만의 반지를 찾기 위해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티샤 반지 같은 걸 찾아봐 혹시 비밀 공간이 있으면 말해주고”
“알겠다”
딱히 비밀금고 같은 것은 없었기에 민혁은 티샤에게 비밀 공간을 찾아보라고 말했고, 그는 클레드의 시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상의는 온통 피에 젖은 상태였다. 민혁은 자켓 형태로된 상의를 벗겨 안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안타깝게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바지주머니에 무언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상의와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있었다. 민혁은 혀를 찼다. 영주방이나 후계자인 클레드에게 탈리스만의 반지가 없다면 트리거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민혁!”
그 때 티샤가 무언가를 찾은 듯 그를 불렀다. 민혁은 반색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티샤는 비밀 금고 같은 것을 찾았다. 그림 액자 뒤에 숨겨진 것으로 하얀 벽지로 마감처리가 되어 있어서 찾은 것이 용했다. 민혁은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티샤는 갸르릉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자 어떤 게 있나 볼까?”
그는 손을 비비며 벽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그 속에는 금속으로 된 금고가 있었다. 부분부분 금으로 도배된 것이 기대감을 상승시켰다. 민혁이 다이얼을 돌리는 곳에 손을 대자 치칙하고 스파크가 튀겼다. 마법진인 것 같았다. 민혁은 무력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안의 내용물이 다칠까봐 그럴 수 없었다.
“통째로 떼어갈까?”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마법해제야 하울의 손짓 한 번이면 가능하다. 티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죽은 클레드의 시체를 보고 무언가 떠올랐다. 예전 그녀의 아버지인 오르갈에게 금고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 때 들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민혁에게 방법을 귀띔해주었다. 그는 티샤가 추천해준 방법에 감탄했다. 민혁은 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는 죽어 있는 클레드에게 다가가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촤악
그리고 그의 손을 베었다. 피가 찔끔 흘러나오긴 했지만 죽은 후라 분수처럼 튀진 않았다. 민혁은 클레드의 손을 혐오스럽다는 듯 들어 금고에 가져다댔다. 다행히 스파크가 튀기지 않았다. 이후에는 간단했다. 티샤가 몇 번 다이얼을 툭툭 돌리니 금고가 열렸다. 민혁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티샤는 부끄러워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같은 반응에 민혁은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다음 금고 속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
금고에는 그가 원하던 탈리스만의 반지는 없었다. 몇 가지 서류와 수표 용도로 보이는 지폐가 뭉텅이로 놓여져 있었다. 민혁은 종이로 된 서류들을 들고 찬찬히 읽어보았다. 주로 거래내역과 뇌물이 오고 간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중에서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 제국의 황태자에게서 온 편지였다.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포베너가를 자극해라. 릴리 포베너의 동생을 죽여라. 주로 이런 것이었다. 민혁은 의아했다. 탈리스만가가 코로나 제국의 황태자의 말을 그대로 실행한 것도 이상했지만 코로나 제국의 황태자가 굳이 이런 일을 꾸민 것도 이상했다. 혹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다른 것이 더 없나 구석구석을 살피던 민혁은 편지 한 통을 바닥에서 발견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제국의 황태자가 탈리스만의 반지를 요구하는 듯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곳에 탈리스만의 반지가 없는 이유가 이 편지 때문인걸까 민혁은 설마 가문의 비보를 제국의 손에 넘기는 일을 할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지금까지 황태자의 뜻대로 일을 벌인 것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왜 툰드르 왕국의 절대 권력자 중 하나인 그가 아직 황제도 되지 못한 황태자의 말을 따른 것이냐다.
“티샤 일어나 아리나 쪽으로 합류하자”
여태 키스에 헤롱헤롱하고 있는 티샤를 깨운 민혁은 빠르게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릴리의 곁이었다. 이미 하울과 아리나는 그녀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아리나는 정령으로 아군을 보호했고, 하울은 대충대충 4서클 마법을 휙휙 던졌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아군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오 자네!”
릴리는 민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적을 베어 넘기고 주위를 살피지 않고 바로 달려올 정도로 매우 반겼다. 그가 아리나와 하울을 보내준 덕분에 스파이로 의심되는 자를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나와 티샤의 눈치가 이상했다. 눈빛이 묘한 것이 민혁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고, 양 팔에 찰싹달라붙었다. 그녀들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것은 릴리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약간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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