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최강이다-209화 (209/245)

〈 209화 〉 전초

* * *

낮고 삭막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릴리는 떨리는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거칠게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예기가 어둠 속을 비추었고, 어째서인지 잔뜩 흥분한 릴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으아아아­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검은 예리하게 허공을 갈랐지만 그녀가 원하던 파육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너무 흥분하지 말라고...허니?”

“으아아아 그 입 다물어라 클레드!”

능글맞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고, 릴리는 멈출 수 없는 분노에 눈의 핏줄이 터져나갔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오로지 클레드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한 번 검이 빛났지만 그를 베어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천막 내 이곳저곳에서 날아오는 단검들을 막기에 급급했다.

“힘 들어 보이는군?”

걱정스러워 하는 말투, 릴리는 그의 도발에 넘아가 자세를 다 무너트린 채 검격을 날리는 것에 집중했다.

챙­

“......”

그 결과 소드마스터에 이른 릴리의 검이 일격에 바닥에 떨어졌다. 어둠 속에 숨은 클레드라는 남자는 소리 죽여 그녀를 비웃었다. 그리고는 릴리의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흑발 흑안에 평범하게 생긴 얼굴, 머리의 뿔과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제외하면 지나가다 어디선가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릴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 클레드는 그녀의 하나 밖에 없는 약혼자였다. 그는 멍하니 놓친 검을 쳐다보고 있는 릴리의 뒷덜미를 혀로 쓰윽­핥았다. 그녀의 청초한 향이 혀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더욱 맛있는 여자가 되었구나..”

“..소름 끼치는 소리 그만해라..클레드 탈리스만...!”

그렇다 그는 탈리스만가의 남자였다. 릴리와 그녀의 동생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기 전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탈리스만가의 다음 대 가주로 선정된 그와 약혼을 해야만했다. 얼굴은 본 적도 없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쓰레기 그 자체인 남자, 릴리는 이를 악 물고 노력했다. 결국 그녀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전 가주는 그녀가 다음 대를 이었으면 했고, 탈리스만 가문과 논의해 릴리 대신 그녀의 동생이 처가살이를 하는 조건으로 약혼을 파기했다. 그렇게 클레드와 릴리의 연은 끊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1년 전 어느 날 클레드가 홀로 포베너가에 방문을 했다. 릴리는 이미 전대 가주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은 상황, 그녀는 포베너가의 가주로써 탈리스만가의 소가주인 그를 맞이하고 대화를 나눴다.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였다. 평소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그가 구해온 귀한 차를 마시고 순간 경계심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의 수작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옷이 찢겨져 있었고, 그가 릴리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다행히 아직 행위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몸 여기저기에 클레드의 타액이 묻어있었다. 저항을 하려 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져온 차에 미혼향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가주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용병왕이 제 때 그녀를 구해주어서 망정이지 아니였다면 릴리는 그의 손에 의해 더럽혀 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탈리스만가와의 소통이 어려워졌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 죽음을 당했다.

“뭘 그리 바들바들 떠시나...”

귓가로 속삭이듯 말하는 클레드, 릴리는 얼굴 위로 벌레가 지나가는 걸 본 사람처럼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와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며 단검의 날로 릴리의 목선을 살짝 그었다. 피가 뭉클뭉클 솟아남에도 그녀는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인다면 단검을 쥔 손의 반대쪽 손에 들린 검날에 낭자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날 받아드리기만 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야...”

“으윽.....!”

그의 말에 릴리는 겨우 그깟 일 때문에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전쟁이 일어나게 상황을 만든거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단검이 들려져 있던 그의 손이 마치 한 마리 영사처럼 기어가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잡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클레드는 저항을 할 수 없는 그녀의 여체를 마음껏 희롱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젖가슴 부분을 쓰다듬고, 솟지 않은 유두를 돌출 시키기 위해 유륜을 꼬집기도 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릴리에게는 죽을 것 같은 자괴감을 심어주었다.

“감도도 아주 좋아!”

“......”

품평을 하듯 내뱉은 치욕적인 그의 말에 릴리는 눈을 꼬옥­ 감았다. 이렇게 더럽혀질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자진한다면 충성스러운 자신의 가신들이 복수를 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빛이 결심을 한 자의 것으로 변하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하려는 찰나 민혁이 현장에 난입했다. 그는 클레드가 대응을 하기 전에 소매 속에서 단검들을 출수했다. 스무 자루의 단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했고, 정확히 그의 머리와 팔을 노렸다.

챙챙­

클레드는 릴리를 제압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만예어검술의 묘리가 담긴 단검들을 모두 쳐냈다. 하지만 민혁은 이미 목적을 이뤘다.

“괜찮으십니까?”

끄덕

클레드가 단검들을 막기 위해 뒤로 물러선 순간 릴리가 탈출해 민혁의 뒤로 숨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릴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도 민혁이 어찌 이곳에 있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민혁은 자기 전 펼쳐 놓았던 기감에 살기가 느껴지자 곧바로 그녀의 천막으로 향했다. 릴리가 머무는 곳을 지키는 기사들은 누군가에게 당해 쓰러져 있었고, 천막에는 밖으로 소리가 빠져나가기 않도록 기막이 쳐져 있었다. 그는 기척을 숨기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릴리가 용인족에게 희롱 당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모습을 드러냈고, 릴리는 자신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흠...넌 뭐지...?”

단검을 모두 막아낸 클레드가 민혁을 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챙­

뇌전풍신공의 기운이 담긴 천라수라도는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목을 향해 날아갔고, 클레드는 오른손에 들려 있던 장검과 왼손에 들려 있던 단검을 교차시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근력의 차이가 있다보니 클레드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그는 혀를 차며, 있는 힘껏 검을 위로 들어 올려 민혁의 검격을 튕겨냈다.

“제법인데?”

Level: 169

이름: 클레드 탈리스만

종족: 용인

경지: 배틀메이지 5서클 마스터

체력: 21660/21660

마나: 36055/36055

클레드는 마법사임에도 그의 검격을 받아냈다. 민혁은 이것도 받아내보라는 식으로 참격을 날렸다. 클레드는 무지막지하게 큰 그의 참격에 놀라 그레이트 쉴드 마법을 쓰고 그 위에 그리스 마법을 덧씌웠다.

쾅­

다행히 검격은 그리스 마법 때문에 목표에서 빗나갔지만 천막을 감싸고 있던 기막을 찢고 광음을 만들어냈다.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병사와 기사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클레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민혁의 뒤에 서 있는 릴리를 노려보았다.

“뭘 꼬라봐”

“크큭..이건 맛보기 였다.. 다음번에는 꼭 너의 처녀구멍을 꿰뚫어 줄테니 기다려라”

민혁의 거친 말투에도 클레드는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고, 블랭크 마법을 사용해 빠져나가려 했다. 민혁은 검을 날려 그를 막으려 했지만 워낙에 캐스팅 속도가 빠르다보니 그가 손을 쓰기 전에 클레드는 이미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후 병사들과 기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난리가 난 천막 안 상황을 보고 민혁을 경계하며 무기를 겨눴지만 릴리가 손을 내젖자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우......”

“정말 괜찮으십니까?”

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혁은 그나마 성한 책상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릴리는 몇 번 째 괜찮냐고 묻는 거냐며 그만하라고 칭얼거렸지만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묘인족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귀와 꼬리가 추욱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민혁도 이해를 했다. 적에게 그토록 능욕을 당한다면 여자 입장에서 맨탈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는 병사들과 기사들 몰래 손을 들어 릴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냐냥!”

갑작스러운 터치에 놀란 릴리는 루비와 같은 고양이 소리를 냈다. 그녀는 누가 들었을 세라 자신의 입을 봉했다. 릴리는 뒤돌아 아직도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민혁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움에도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민혁의 손이 멈추지 않자 릴리도 고개를 흔들며 말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냐냥...”

그의 손길은 꽤나 기분이 좋았다. 추욱­쳐져 있던 꼬리가 다시 살랑살랑 귀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릴리는 아예 책상에 엎드려 갸르릉거리며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결국 그의 쓰다듬기는 루비가 걱정스럽게 릴리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천막이 망가진 관계로 릴리는 루비와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민혁은 그녀를 끝까지 호위하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해가 벌써 얼굴을 보이고 있었지만 애써 누워 잠을 청했다.

“어제 밤에는 고마웠네...정신이 없어서 말할 틈도 없었군..”

3차 합류지에서 탈리스만가로 진격하는 포베너의 군사들, 선두 말을 몰고 있던 릴리가 뒤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민혁을 힐끗 보며 말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딱딱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의 태도에도 릴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오코도 강에서 말을 몰아 탈리스만가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군을 하는 동안 별다른 습격이나 함정 또한 없었다. 용병들은 탈리스만가가 쫄아서 도망친 것이라며 껄껄거리며 웃었지만 릴리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곧 있으면 살육의 현장이 펼쳐진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렀고, 긴장감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아...알고 있다..”

그녀의 기색을 읽은 민혁이 릴리의 등을 가볍게 툭­하고 쳤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듯 쉼 호흡을 몇 차례 하더니 저 너머 보이는 탈리스만가의 성채를 바라봤다. 성곽에는 궁수부대와 배틀메이지로 보이는 자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는 불과 200m가량, 돌격한다면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였다. 그녀는 배틀메이지 무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흰 머리의 늙은이를 바라보았다. 툰드르 왕국 제일의 마법사이자 탈리스만가의 가주 트리거 탈리스만이었다.

Level: 216

이름: 트리거 탈리스만

종족: 용인

경지: 배틀메이지 6서클 마스터

체력: 19599/19599

마나: 41001/41001

“탈리스만가는 들어라! 내 동생 퍼지 포베너는 너희들의 간악함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나의 충실한 기사는 사신 자격으로 탈리스만가를 방문했음에도 목이 베어졌다. 게다가 너희는 그 충절한 자를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로 하여금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의 오만과 방만을 좌시하지 않음에 이곳에 서 있다! 대화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승리뿐, 자 돌격하자 포베너가의 군사들이여!”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