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전초
* * *
루비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민혁이 그것을 내밀자 그녀는 빠르게 그의 신분증을 훑었다. 남자는 아이지스 왕국 출신이었으며, 이미 그곳에서 용병패를 발급 받은 이력이 있었다. 루비는 그에게 서류를 몇 가지 들이밀었다.
“이걸 작성하면 되는건가요?”
“그렇다 냥”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프론트에 놓여져 있는 팬을 들어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어려운 것은 없었다. 고향의 위치, 성이 있다면 귀족 출신인지 아닌지 무력은 어느정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 사인란에는 지장을 찍는 곳이 있었다. 서류에 내용을 전부 기재한 민혁은 그것을 루비에게 건내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서류를 훑어내렸다. 젊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 최근 베르할렌 탈취로 인해 소란이 일어난 아이지스 왕국사람 이라는게 걸리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한 뒤 프론트를 비웠다.
“여기있다 냥!”
돌아온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용병임을 상징하는 동패였다. 민혁은 루비가 가져온 용병패를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순간 허공을 가를 수 밖에 없었다.
“뭐하시는...?”
루비가 민혁의 손을 피해 용병패를 뒤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냐낭하고 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설명해줄게 있다냐앙... 이 동패를 받으면 툰드르 왕국에서 자신을 입증하는 신분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냥 만약에 한 번이라도 잃어 버리면 재발급이 안되니까 주의하라냥 또 뭐가 있냥...아 맞다냥..동패에서 은패가 되고 싶다면 의뢰 5가지 정도를 수행해야 하고, 은패에서 금패가 되고 싶다면 길드에서 시험을 봐야한다냥 플레티넘이나 다이아패는 금패가 된 후에 설명을 해줄테니 지금 설명 안해줘도 되겠지냐앙...”
설명을 모두 마친 루비는 민혁에게 동패를 건내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설명해주어 고맙다고 말하며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게 다가갔다.
“이제 마차를 살 수 있는거겠지?”
마차 애호가 하울이 물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빨리 마차를 사러가자고 말했다.
“잠깐 기다리라냥!”
그 때 뒤에서 루비가 일행을 불렀다. 민혁은 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는 프론트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아..하아..마차를 사려는거냐앙~?!”
그녀는 체력이 약한 것인지 살짝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헥헥거리며 민혁에게 질문을 건냈다. 루비의 말에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냐앙... 미안하지만 용병패로 마차를 구매하려면 최소 은패를 가져야만 한다냥!”
루비의 말에 민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를 구매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는 뒤를 돌아 하울을 바라보았다. 그냥 걸어가자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으윽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동패에서 은패로 업그레이드 하려면 5개의 의뢰를 완수해야한다. 민혁은 루비에게 은패를 받기 위해 몇 일 정도가 걸리는 지 물어보았다.
“냐앙...보통 한 달 정도 걸리지만 실력만 좋다고 하면 하루에 5개 의뢰를 완수하는 것도 가능하다냐!”
“아.. 그렇습니까 그럼 의뢰를 어디서 받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다행히 실력만 좋다면 승급은 어느 때나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는 루비에게 의뢰를 어디서 받는지 물었다.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일행과 민혁은 그녀를 따라 가려 했지만 다른 길드 직원이 그것을 막았다. 2층은 용병패를 가진 사람들만 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어째서인지 불안에 하는 아리나와 티샤 능글 맞게 웃는 하울을 두고 민혁만 루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 간단한 의뢰로만 추려봤다냥!”
“아 감사합니다!”
민혁은 그녀가 건내준 의뢰지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가죽공방에서 내려온 의뢰로 가방을 만들 천이 부족하니 오크 가죽을 100장만 구해다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세공사의 의뢰였다. 새로운 조각에 도전해보고 싶어 트롤의 손톱을 구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연금술사의 의뢰였다. 최근 개발한 포션이 있으나 재료가 부족하다고 한다. 오우거의 피를 2L 정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포베너가에서 내려온 의뢰였다. 어떤 옵션이 걸린 것이던 아티팩트를 구해오는 자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한다. 다섯 번째는 길드의 의뢰였다. 도시 외곽에 기거하는 미노타우로스들이 실종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범인을 잡아 데려오거나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오면 의뢰 성공이다.
“마지막 의뢰를 제외하고는 지금 의뢰 완료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정말이냐아?”
끄덕
의뢰에 표시된 재료템들을 인벤토리에서 모두 꺼냈다. 꽤 양이 많았다. 루비는 어느새 재료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민혁은 그녀가 재료템들을 세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냐냥 모두 개수가 맞다냥! 그런데 아티팩트는 없는데냥?”
“아 여기 있습니다.”
장비창에서 샤프니스 마법이 걸린 단검을 한 자루 꺼내 루비에게 주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단검의 날을 살펴보았다.
“샤프니스 마법이 걸려있는거구냐앙!”
“오..한 눈에...마법사이신가요?”
루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 허리에 팔을 올리며 가슴을 쭈욱 앞으로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봉우리가 없어서 가슴이 강조되는 일은 없었지만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민혁은 환하게 웃었다. 의뢰를 네 개 클리어했고 남은 것은 미노타우로스 실종에 관한 정보를 찾는 것뿐이었다. 민혁은 루비에게 미노타우로스들이 주로 사라진 장소들을 듣고 내려가려 했다.
“저기 냐냥”
그를 루비가 막았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민혁에게 달라붙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그가 뒤로 물러서자 키득키득 웃었다.
“귀여운 구석이있다냥!”
루비는 고혹스러운 미소를 띄우고는 그의 볼에 쪽하고 키스를 했다. 기습에 놀란 민혁은 벙찐 상태로 그녀에게 키스당한 볼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루비는 혀로 입술을 낼름 핥더니 찡긋윙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민혁은 어이가 없어 잠시간 굳어 있었다. 얼어 있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민혁님 기다렸......!”
“......!”
“큭큭..야 너 볼에 하하하!”
그를 마주하는 그녀들의 자세는 여러 가지였다. 아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오다가 조각상처럼 굳어버렸고, 티샤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굴었다. 반면 하울은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다가 이내 빵하고 터져버렸다. 민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단검을 꺼내 검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
그는 자신의 얼굴을 살피고,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나의 눈치를 보았다. 왜냐하면 민혁의 얼굴에는 루비의 키스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민혁님...”
아리나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다가왔다. 민혁은 늑대를 만난 가녀린 양처럼 덜덜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도망친다면 더 혼날 것을 알고 있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행동을 프론트에서 지켜보던 루비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결국 아리나에게 붙잡힌 민혁은 여관에 도착해 짐을 풀 때까지 한동안 몸을 단정하게 하라는 그녀의 잔소리에 시달려야했다.
“휴...정말 죽을 뻔했네..”
겨우 아리나의 잔소리 폭탄에서 벗어난 민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일행을 두고, 미노타우로스들이 실종된다는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본래는 아리나도 따라오려고 했지만 민혁은 그녀가 티샤와 좀 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를 남겨둔 채 왔다. 솔직히 말해서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여관을 나설 때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티샤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하울 같은 경우는 걷는 것이 피곤했는지 짐을 풀고 바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쯤인가?”
천천히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걷던 민혁은 루비에게 들었던 미노타우로스 거주지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2m를 훨씬 넘기는 소머리를 한 수인족들이 두 발로 서서 인간처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민혁은 신기하게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았기에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고, 의뢰자를 만나러 갔다. 거주 지역에서도 가장 큰 집, 촌장의 집이었다.
똑똑
“의뢰차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민혁은 문을 똑똑 두드리며 용건을 말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가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미노타우로스였다. 그는 민혁을 한 번 훑어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집 안을 구경하며 촌장을 따라갔다. 미노타우로스의 키가 크다 보니 모든 가구나 집의 높이가 컸다. 그 외에는 인간의 생활양식과 다를 게 없었다. 촌장은 민혁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그가 의자에 앉자 그는 밀크티 한 잔을 들이밀었다. 꽤나 향이 좋았다.
“용병인가..”
차를 마시던 민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은 침음성을 내뱉더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눈빛을 그에게 보내왔다. 울컥한 민혁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전사의 일족이라는 미노타우로스 일족답게 늙은 그라도 무기가 품안에서 나오자 잽싸게 반응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살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제 자리에 앉았다. 민혁은 피식 웃으며 단검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그걸 본 촌장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인간이 그 젊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라니 대단하군!”
방금 전까지 머뜩찮은 표정으로 그를 보던 촌장은 감탄성을 자아내며, 의자 옆에 있던 서랍에서 몇 장의 그림을 꺼냈다. 그것은 자화상 같은 것이었다. 민혁은 촌장이 건내준 그것을 살펴본 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건 뭡니까?”
“지금까지 실종된 미노타우로스들의 몽타주일세”
촌장의 말에 민혁은 자세히 그림들을 살펴보았지만 얼굴의 주름이나 몸의 굴곡들을 제외하면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판별이 쉽지가 않았다. 촌장도 그의 기색을 읽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실종된 미노타우로스들의 특징들을 상세하게 읊어주었다. 그걸 민혁은 모두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 잘 부탁한다는 촌장의 부탁을 뒤로하고, 민혁은 실종자들이 사라진 장소로 향했다.
첫 번째 실종자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실례합니다. 칸머스씨의 가족이신가요?”
그녀가 살고 있던 집에 도착한 민혁은 텃밭을 가꾸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홱하니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민혁은 화가 났지만 꾸욱 참고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소박한 집안 풍경, 칸머스와 그의 남편으로 보이는 미노타우로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따라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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