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전초
* * *
짓궂은 미소를 짓는 하울, 분명 그녀는 라거가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을 발설한 이유는 처음부터 치료를 받지 않은 그녀가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두 딸의 압박에 라거는 두 손을 들었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건 이유는 티샤를 학대했고,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르비뉴와의 계약으로 인해 불노의 육체를 얻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한 명씩 떠나갔고, 사랑했던 남편까지 떠나갔다. 그러던 중 티샤의 아버지인 오르갈에게 배신을 당하고, 티샤까지 잃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사는 고르비뉴와의 계약 때문에 불가능했고, 자살은 남게 될 티르빙에게까지 피해가 갈까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스스로에게 죽음의 저주를 거는 것이었고, 그건 6서클 마스터인 그녀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
“......”
“내 ,내가 잘못했단다...콜록..너무 그렇게 따가운 눈초리로 보지 말아주렴!”
진실을 고백한 라거를 티샤와 티르빙은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라거는 그녀들의 눈빛에 기침을 하면서도 울상을 지었다. 기묘한 모녀관계에 하울은 기분 좋게 웃으며 7서클 마법인 디스엔체트(Disenchant)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그러자 기침은 씻은 듯 사라졌고, 안색이 밝아졌다. 민혁이 상태창을 살펴보니 저주로 인한 스텟도 모두 돌아온 상태였다.
“..콜록..고맙습니다..위대하신 분이여..”
“...정말 감사합니다..”
“됐어..오글거리니까 그만하고 우린 이만 나갈테니까 셋이서 쌓인 이야기나 나누라고”
그녀들의 감사인사에 하울은 손사레를 치고는 민혁과 아리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세 모녀간에 이야기꽃이 피었다.
다음 날, 일행은 다크엘프 마을 앞에 모였다. 민혁은 아리나와 티샤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 나누느라 다크써클이 볼까지 내려온 상태였고, 하울은 그를 놀리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반면 아리나는 티샤와 꼭 붙어 서열정리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물론 티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뿐이었다. 길을 떠나는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라거와 티르빙이 나왔다.
“...그럼...다녀오겠습니다..”
티샤가 볼을 붉히며 라거와 티르빙을 보고 말했다.
“다녀오렴...”
라거는 눈물을 글썽이며, 생이별을 하는 부모처럼 티샤를 배웅해줬다. 반면 티르빙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티샤..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아리나님에게 지지 말고 꼭 매부의 마음을 쟁취하렴!”
으드득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옆에 있던 라거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혁은 어젯밤 세 모녀간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티르빙의 말에 아리나는 이를 갈았다. 티샤는 이를 듣고 덜덜 떨었지만 끝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울은 민혁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인기가 많아 좋겠다고 놀렸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나 있는 아리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혁은 아리나의 곁으로 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화를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몸 조심하렴!”
“티샤 내 말 꼭 기억해야한다!”
배웅이 끝나고, 하울이 텔레포트(teleport)마법을 사용했다. 목적지는 탈리스만의 반지가 있는 툰드르 왕국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일행이 사라지고, 라거와 티르빙은 아쉬운 표정으로 티샤가 서 있던 곳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툰드르 왕국은 12종의 이종족들이 모여 공화정이라는 특별한 정치체계를 이룬 곳이다. 12종의 이종족들은 종족당 1명씩 대표자가 있으며, 이 대표자들이 정책을 내면 국민들이 뽑은 상의원이라는 자들이 찬반 투표를 실행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공화정을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툰드르 왕국에는 엄연히 귀족들이 있다. 바로 2개의 공작가들이다. 300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가진 툰드르 왕국 건립 초기,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우며 공이 너무나 큰 두 가문을 공작가로 임명해 권력을 분산 시켰는데 이것이 현재의 탈리스만가와 포베너가다. 탈리스만가는 용인족들이 세운 가문으로 마법에 능통하지만 용인족 특유의 탄탄한 육체를 바탕으로 전투에 직접 나서는 배틀메이지를 육성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포베너가는 묘족이 중심이 된 가문으로 상재가 뛰어난 이들이 많아 툰드르 왕국의 금줄은 포베너가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금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가문은 툰드르 왕국 내에서도 유일하게 국가의 땅을 사적으로 보유하고 영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나라 안의 귀족들에게 주기에는 너무 큰 권한일 수도 있겠지만 국민들은 두 가문을 나라의 기둥이라 생각했고, 두 가문도 명예를 알고,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기에 지금껏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탈리스만 가문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화전민을 받아들인 다는 명분하에 땅을 야금야금 늘려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탈리스만가를 견제할 포베너가는 최근 후계자 선정으로 인해 내부가 시끄러워 밖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다.
그런 포베너가의 영주성에 민혁과 일행들이 나타났다.
“...이 나라는 꽤나 더운 편이군...”
추운 지방에서만 생활을 했던 티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민혁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내주었다. 티샤는 볼을 살짝 붉히더니 그것을 잡아채듯 받아들었다. 많이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민혁님...저도 더운데요?”
팔짱을 끼고 있던 아리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티르빙의 문제 발언 이후 그녀는 민혁이 티샤를 챙기는 행동을 보이면 그녀에게 해준 행동을 그대로 받고 싶어 했다. 지금도 그랬다. 민혁은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토끼처럼 덜덜떨며 인벤토리에서 손수건을 한 장 더 꺼내주었다.
“히히...고마워요!”
그제서야 다시 환하게 웃는 아리나, 민혁은 이것도 다 내가 잘난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뭔가 재수 없는데?”
하울이 태클을 걸어왔다.
“조용히해 무쓸모 드래곤!”
그녀의 발언에 민혁은 흥하고 콧바람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평소였다면 화를 버럭버럭 내며 덤벼들었겠지만 그녀는 잠잠했다. 아니 오히려 시무룩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본래 탈리스만에 있어야할 일행이 포베너에 있는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울은 탈리스만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포베너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클리스만과 포베너를 착각한 것이다. 마차라도 가져왔으면 거리가 멀지 않아서 금방 닿았겠지만 그녀가 마차는 뭐하러 가져가냐고 말하는 통에 다크엘프 마을에서 가져오지도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의 재사용기간은 5일
마차를 다크엘프 마을에서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는 5일은 기다려야 했다. 마차를 타고 포베너에서 탈리스만까지의 거리는 8일, 총 13일이 걸린다. 만약 걸어서 간다면 보름 정도 걸리는 거리, 민혁은 걸어서 가자고 제안했지만 하울은 죽어도 걸어서는 못 가겠다고 떼를 썼다. 결국 일행은 포베너에서 마차를 구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차를 구매하는 절차가 꽤나 복잡했다. 포베너에서는 타국의 사람이 마차나 호송용품을 사려면 툰드르 왕국의 신분인증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용병길드에 가입하거나 상인길드 혹은 왕국에서 직접 발급하는 임시 신분증이 필요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용병길드에 가입하는 방법이었고, 일행은 용병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영주성 내부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포베너가 사람들이 상재에 능통하다고는 하나 그를 뒷받침할 무력이 없다면 공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툰드르 왕국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포베너는 개인의 무력이나 치안은 담당하는 병사들 외에 영지군을 필요 이상으로 늘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용병 길드의 존재 덕분이었다. 포베너 영지가 툰드르 왕국의 금줄이자 경제 중심지인 만큼 많은 수의 상인들이 상행을 위해 방문을 하고, 호위를 하는 용병들이 따라다닌다. 포베너는 그 점을 이용했다. 300년 전 왕국 건립 초기 용병왕이라는 불세출의 무인에게 자본을 주고, 영지성 내부에 그가 직접 운영하는 용병 길드를 세운 것이다. 많은 수의 용병들이 그의 아래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포베너의 무력적 부분은 해결이 되었다. 외부 세력이 침입할 경우 마르지 않는 금력을 동원해 많은 수의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병들은 금전적 부분만 확실하다면 죽음도 불사하며, 의뢰주에게 충성을 다했다.
초기에는 용병들이 소란을 일으켜 문제가 많았지만 영지군과 용병왕이 직접 나서서 치안을 관리하고 나서부터 문제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300년이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는 당시 정착했던 용병들과 영주민들이 융화되어 용병들이 영주민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포베너가 최고의 선택이라고 칭송했다.
“하암~따분하다냥...”
오늘도 하품을 하며 프론트를 지키고 있는 묘인족 용병 루비의 부모도 300년 전에 포베너에 둥지를 틀었다. 브론즈 컬러의 단발머리, 노랑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그녀는 언뜻 보면 초등학생 같지만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숙녀였다. 그녀에게는 프론트 직원들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용병왕의 손녀라는 것이다. 긴 수명을 자랑하는 묘인족답게 300년 전 신화적 무력을 자랑하는 그는 아직도 팔팔해 가족들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그를 걱정하는 것은 손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어렷을 적 보여주었던 늠름했던 모습을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최근에는 어린애 같이 놀러만 다니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원래 오늘도 용병왕인 그가 직접 프론트 직원들을 만나 고생을 들어주고, 치하를 해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잘나신 용병왕님께서는 일부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루비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만을 남겨둔 채 근처 호수로 낚시대를 들고 갔다.
“냐냥...포베너가의 일 때문에 일도 많은데...냐앙...지금쯤 싱싱한 활어를 물어뜯고 계시겠지냥...”
상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딸랑
“어서오라냥!”
루비가 입맛을 다시며 침을 입가에 흘릴 무렵, 용병 길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툰드르 왕국에서는 보기 드문 인간과 엘프들이었다.
“용병증을 발급 받고 싶습니다만..”
인간 남자는 곧장 프론트로 다가와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냐냥~신분증을 보여달라냥”
“여기있습니다.”
루비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민혁이 그것을 내밀자 그녀는 빠르게 그의 신분증을 훑었다. 남자는 아이지스 왕국 출신이었으며, 이미 그곳에서 용병패를 발급 받은 이력이 있었다. 루비는 그에게 서류를 몇 가지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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