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전초
* * *
뻘쭘하게 남게 된 민혁은 라거의 눈치를 살피다 뒤돌아 굳어 있는 티샤와 함께 집을 빠져나가려 했다.
“..콜록..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볼 일이 있으신가요?”
그는 나가려던 상태 그대로 우뚝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콜록...네 그렇답니다..하지만 볼 일은 손님이 아니라..제 딸에게 있답니다...”
‘딸?!’
민혁은 라거의 말에 경악하며 옆에서 안색을 창백하게 하고 있는 티샤를 바라보았다. 상태창을 보고 성이 같아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둘은 친족이었다. 그것도 부모와 딸,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티샤의 반응은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거의 눈빛을 알아챘음에도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티샤..”
라거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티샤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은발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어재꼈다.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렸고, 그녀의 귀는 추욱 쳐진 채 자신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이런 반응이었다. 민혁은 티샤를 바라보는 라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애증(??),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아...오히려 과거의 내 실수 때문에 네가 날 무서워하는 것 같아...콜록..슬프구나...”
“......”
그녀의 말에도 티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푹숙이고 있었다.
‘과거의 실수라...’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혁은 라거의 입에서 튀어나온 실수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추리를 시작했다. 그녀는 수인족과 다크엘프의 혼혈이다. 어렷을 적 다크엘프 마을과 수인족 마을 두 곳에서 생활을 했지만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 라거 그란데는 다크엘프 일족 내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작은 실수로 티샤는 라거를 무서워한다.
‘학대인가?’
지위가 높다보면 주위 시선이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런데 수인족과의 혼혈인 아이를 낳았다. 그럼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고, 어렷던 티샤에게 학대를 가해 그녀가 마을에서 도망쳤다. 추측이긴 하지만 꽤 신빙성 높은 추리였다. 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라거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나른하게 웃어보였다.
“손님께서는...콜록..티샤와 어떤 사이이신가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민혁은 잠시 고민했다.
“티샤는...제껍니다.”
“......!”
그의 말에 라거는 어머어머하며 입을 손으로 가렸고, 티샤는 고개를 쳐들고 민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해의 소지가 깊은 발언이었지만 민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 그렇군요..사위인건가요... 그럼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으시겠군요...”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지만 방 안 모두에게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티샤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고, 민혁은 자신의 추리가 정답이 아니길 바랬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쯤인가요...콜록...한 수인족이 저희 마을을 찾았답니다. 모험가인 그는 강인하고 용맹했죠. 당시 남편을 잃고 한참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저는 어린 딸이 있음에도 한 눈에 그에게 반했답니다..오르갈...콜록...티샤의 아버지랍니다..그와의 관계는 플라토닉적 사랑에 가까웠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죠...하지만 그는 절 사랑하지 않았습니다..단지 제 몸만을...콜록...어쨋던 저는 오르갈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아니 강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저는 아닌 척하며 반항하지 않았으니까요...그가 떠나고 티샤가 생겼습니다..충격적이었죠..혼혈...순혈을 중시하는 다크엘프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그래서...콜록..”
기침과 함께 피가 토해졌고, 라거의 말이 잠시 끊겼다. 티샤는 고개를 들고 아주 잠깐 그녀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라거는 티샤의 표정을 보았는지 싱긋 웃으며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 번이고...유산을 시도했습니다..강에도 뛰어들어 보고, 돌로 배를 내리쳐보려 하기도 했습니다...콜록..하지만...도저히 제 손으로는 무리였습니다..콜록...그렇게 10달이 지나고...티샤가 태어났어요..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콜록...하지만 전 그걸 막지 못했어요...오르갈을 떠올리는 귀와 손톱, 짐승과도 같은 눈동자까지..콜록...모든 게 절 괴롭게 했습니다..저는...저 아이를...모질게 대했습니다..손찌검을 하고, 고된 일을 시키며 마치 제 아이가 아닌 것처럼...그러던 어느 날 오르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그는 제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콜록..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티샤를 빼앗아 갔습니다...저는...저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콜록...저주로 인해 이미 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여서.....”
그동안 참아왔던 원을 토해낸 라거는 말을 끝맺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티샤도 붉어진 눈가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정적(??)
“용서를 바라십니까?”
그 속에서 민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라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까진 바라지 않아요...그저...그저..콜록...콜록..!”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잇던 라거는 허리를 숙이고 기침을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기침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얗던 이불보는 이미 붉게 물들었다. 티샤는 차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발을 동동굴렀다.
“어서 가봐”
민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티샤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다.
“.....고맙다..”
한 발자국 라거에게로 발을 내딛은 티샤, 그녀는 뒤를 돌아 자신의 등을 떠밀어준 민혁을 보고 밝게 웃어주었다.
“......”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피를 토하고 있는 라거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티샤를 뒤로 하고 집을 빠져나온 민혁은 벽에 기대 방금 전 보았던 그녀의 웃음을 기억해냈다. 갭 모에라고 할까 평소 무표정했던 그녀의 밝은 미소는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태양과도 같았다. 민혁은 히로인 공략 계획의 수정이 필요하다 여겼다. 충동적인 결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하울보다는 티샤를 더 취하고 싶었다.
“......”
잠시 시간 흐르고, 티샤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눈물 자국이 남은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잘 해결 됐나봐?”
“......!!”
민혁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티샤는 흠칫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행동에 민혁은 얼굴을 찌푸리며 티샤에게 다가가 은발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손을 많이 탄 고양이처럼 그의 손의 머리를 맡기고 눈물자국이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꽤나 귀여워진 그녀, 민혁은 피식 웃으며 쫑긋 솟아있는 귀를 만졌다.
“...그르릉...”
“큭큭”
티샤는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나 내는 소리를 입 밖으로 토해냈고, 민혁은 웃음보가 터졌다. 그녀는 그가 웃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민혁의 가슴팍을 토닥토닥 때렸다. 깜찍한 그녀의 행동에 민혁은 가슴팍에 꽂혀 오는 돌주먹을 무시하고 웃어넘겨버렸다. 그녀의 머리를 마음껏 애완동물처럼 쓰다듬은 민혁은 먼저 뛰쳐나가버린 하울을 찾기 위해 기감을 펼쳐 마을 내부를 훑었다. 목욕을 하는 다크엘프 여인네서부터 뛰노는 어린아이들, 흑마법을 연구하는 이들까지 그런데 그녀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간거지?”
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찾아보고 오겠다.....”
티샤가 나서려 했지만 민혁이 제지 했다. 기감을 더 넓혔다. 마을을 넘어서자 그녀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하울과 아리나는 익숙한 기운의 다크엘프와 함께 입구에 서 있었다. 민혁은 티샤의 손을 거침없이 잡고, 걷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설마?!”
“오르갈...그래! 오르갈의 아이가 틀림없다!”
“......”
로브를 벗은 채 걷다보니 마을 다크엘프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그들은 티샤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대체로 혐오감이 가득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티샤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민혁은 이를 느끼고 주변의 적대감에 이를 드러냈다. 그를 주위로 무무신공의 힘이 퍼져나갔다. 다크엘프들은 그의 힘에 벌벌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똑바로 걸어..”
“......”
민혁의 말에 티샤는 그의 손을 꽈악 붙잡고, 고개를 당당히 들고 다크엘프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을 입구에선 아리나와 하울 그리고 티르빙이 민혁과 티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님!”
아리나는 민혁이 시야에 보이자 양 팔을 벌리고 안아달라는 자세를 취하며 달려왔다. 티샤는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민혁의 눈치를 보다 얼른 그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티샤의 손이 빠져나가자 민혁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다가 포옥하고 안겨오는 아리나의 말랑말랑함에 기분 좋게 웃었다.
“커플 바퀴벌레 얼른 떨어지고 출발하자!”
대기 해놓은 마차 앞에 티르빙과 함께 서 있던 하울이 소리쳤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리나를 품에 안은 채 움직였다. 하지만 티샤는 다리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엘프 때문이었다.
“...티르빙 그란데......”
“...역시 너였구나...티샤....그란데...”
씨 다른 자매의 해후, 티르빙은 그녀가 티샤임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민혁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을 알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녀들의 사정을 모르는 하울과 아리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소환했다. 그는 하울과 아리나를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일행이 마차 안으로 사라지자 티샤는 힘들게 발을 움직였다. 티르빙도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왔다. 1m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둘
“왜 말도 없이 사라진거냐”
티르빙이 북풍한설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티샤는 침묵했다.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시선이 어긋나자 티르빙이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상한 손길로 티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말투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
영혼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그녀의 자애로운 말에 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르빙을 쳐다보았다. 천사와 같은 미소, 어렷을 적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었던 언니의 것이었다. 티샤는 방울방울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티르빙은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티샤를 꼬옥 껴안아주었다. 비록 아버지가 다른 자매고,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녀는 티르빙의 둘 밖에 없는 피붙이였으며, 눈물 많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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