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전초
* * *
바로 모리슨이었다. 그는 지옥의 악귀처럼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로도 죽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레이지는 깜짝 놀라 그가 있던 자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리슨의 검이 반짝였고, 그는 이미 자신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싱긋 웃었다.
“언니처럼 나도 죽일 생각인가요?”
“......!”
목 바로 앞까지 출수되었던 그의 검은 레이지를 베지 못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귀신처럼 날뛰던 모리슨을 잠재운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과 충혈된 눈동자, 그 아래로 타고 흐르는 피눈물이 모리슨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레이지의 웃음은 곧 비웃음으로 뒤바뀌었고, 그녀는 그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털썩하고 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모리슨, 레이지는 그의 피눈물 자국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пoдавлять”
청아한 초록빛이 줄기줄기 엮어져 밧줄과도 같은 모양을 이루었고, 그것은 모리슨의 몸을 휘감아 결박했다. 기다렸다는 듯 서리 부족의 전사가 검을 들고 다가왔고, 레이지는 검을 잡아들었다.
“그 추한 얼굴도 이제 볼 일이 없겠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지는 검을 하늘 높이 들어 모리슨의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챙
“......?!”
하지만 살을 파고드는 파육음이 아니라 검이 무언가에 튕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지의 검은 실제로 그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모리슨의 몸을 보호하는 투명한 막에 막혀 검날이 전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법이었다. 그것도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위급 마도사의 마법,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모리슨을 죽이는 걸 방해한 이를 노려보았다.
“뭘 꼬라봐 이년아!”
그곳에는 마치 동네 양아치와 같이 건들거리는 하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 민혁과 아리나가 한숨을 쉬고 있었고, 티샤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리고 아리아와 마리아가 아리나의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내밀고 모리슨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쌍둥이를 본 레이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안색을 고치고 차가운 눈동자로 하울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성질 나오게 만드네 죽을래! 어디 한 번 온 몸의 뼈가 아우성치게 만들어 줘 앙?!!”
그것이 하울의 심기를 건드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아도 용서해줄까 말까한데 저런 싸가지 없는 눈빛이라니 지금이라도 메테오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뒤에서 지켜보는 쌍둥이 때문에 겨우겨우 참았다. 뒤에서 하울이 성을 내는 것을 지켜보던 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발광하는 이유가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방금 전만 해도 꿀 같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차가 흔들리며 잠을 방해 당했다. 그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녀는 대노(大?)하였다. 실수던 아니던 간에 서리 부족의 전사들은 잠자는 드래곤의 코털을 건든 것이다. 결코 모리슨이 걸레짝처럼 당해서가 아니었다.
“...칫...”
하울의 거친 말투와 살기가 가득 담긴 째려봄에 레이지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후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현재의 전력으로는 마도사를 상대할 수 없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지체했다면 지금도 화를 견디지 못하고 방방 뛰고 있는 드래곤에게 통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혀를 차..? 저 년 잡아!”
화가 가득 들어찬 하울의 외침, 레이지가 갑자기 후퇴하자 정신을 못 차리던 서리 부족 전사들도 하울에게서 느껴지는 광폭한 기운을 그제서야 깨닫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움직였다.
“야야 진정해”
그들이 도망쳤음에도 민혁은 메테오를 안면에 날리겠다며 난리를 치는 하울을 뜯어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리 부족 전사들이 사라지자 아리나와 쌍둥이들은 쓰러져 있는 모리슨에게 달려갔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온 몸에는 자잘한 검상들과 화상이 가득했다. 게다가 검을 잡고 있던 오른손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하울님!!”
민혁의 품에서 이거 놓으라며 발버둥을 치던 하울도 아리나의 다급한 외침에 이성을 되찾고 달려왔다. 그녀는 모리슨의 상태를 보고 혀를 쯧쯧찼다.
“그레이트 힐(Great hill)”
치유의 빛이 그녀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화상은 차츰 나아갔지만 오른손의 상처는 회복이 어려웠다. 쌍둥이는 울상을 지었다. 하울은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대마법을 펼쳤다.
“리커버리[Recovery]”
환한 빛과 함께 마나가 요동쳤고, 7서클의 대마법 리커버리가 발동됐다. 빛은 그를 감쌌고, 오른손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아리아와 마리아는 반색을 하며 하울을 격하게 껴안아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헤실헤실 풀릴 때 쯤 쌍둥이는 의식이 없는 모리슨에게 달라붙었다.
“...여긴...?”
의식을 잃었던 모리슨이 정신을 차리고 본 광경은 마차의 천장과 자신을 내려다보며 울먹거리고 있는 쌍둥이의 얼굴이었다. 그녀들은 모리슨이 눈을 뜨자마자 꽈악껴안았다. 그도 쌍둥이를 품안에 안아주었다. 축축해지는 가슴팍, 모리슨은 그저 그녀들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줄 뿐이었다.
“정말 미안하오...”
기절한 후의 상황을 전해들은 그는 일행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내상이 아직 낫지 않았을텐데 일어나세요”
민혁은 그를 일으켜세웠다. 모리슨 버티려 애를 썼지만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모리슨을 바로 세운 민혁은 마차를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물었다. 그는 쌍둥이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서리 부족의..전사들....그리고 여전사의 이름은 레이지, 내 아내의 동생 즉 쌍둥이의 이모되는 자요”
모리슨의 말에 쌍둥이들은 흠칫 놀랐다. 표정을 보아 레이지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았다.
“어째서 그 사람들이 모리슨님을 쫒는건가요?”
아리나가 의문을 표했다. 심드렁하게 있던 하울은 이를 갈며 거지같은 년이라고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녀는 낮잠을 방해당한 것에 화가 나 있었다. 모리슨은 하울의 짙은 살기에 식은땀을 닦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가 다음 대 족장으로 선정되기 전 서리부족에는 두 가문이 번갈아가면서 족장의 위를 차지했다. 그게 레이지의 가문과 모리슨의 가문이었다. 당연지사 경합을 하는 두 가문의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다.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빴다. 레이지의 가문에서는 그녀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역대 족장 중 여족장은 없었다. 결국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그녀는 족장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모리슨이 레이지의 언니와 눈이 맞으며 두 가문이 화합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쌍둥이를 낳고 그녀가 죽으며 평화가 깨졌다. 레이지 가문에서는 쌍둥이를 낳게 하고 딸까지 죽인 모리슨을 죽일 놈 취급했다. 그건 레이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와 마리아, 아리아가 부족을 떠난후에도 쌍둥이들을 죽이기 위해 모리슨의 뒤를 쫒았다.
“사실 저주 받은 땅으로 온 것도 그녀 때문이오..여기라면 제 아무리 끈질긴 레이지라고 해도 쫒아오진 못할터이니..”
하지만 그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그녀는 원귀처럼 그를 쫒아 세헬렘까지 쫒아왔다. 모리슨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소.. 더 이상 함께 머무는 것은 폐가될 터...만약... 내가 전사들의 추격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 다면 평생 그대의 종복이 되겠소”
짐을 챙겨드는 모리슨은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나섰다. 쌍둥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손인사를 건냈다. 아리나는 떠난다는 그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의 굳은 결심이 담긴 표정을 보고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울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떠나는 모리슨의 등 뒤로 블레싱(blessing) 마법을 걸어주었다. 신성마법인 블레스와는 다르지만 행운을 올려주는 버프 마법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그냥 의외다 싶어서”
민혁의 의외라는 말에 하울은 광분하며 마차에서 날뛰었다. 아리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둘이 울적한 자신을 위해 일부로 장난을 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모리슨과 헤어진 일행의 마차는 곧 세헬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에픽 퀘스트 ‘마신족(???) 강림’
획득조건: 퀘스트 ‘흑관의 조각’ 해결, 퀘스트 ‘음양오행신공’ 소유, 칭호 천마의 후계자 소유, 신녀의 호감도 일정 수치 이상 충족
위 네 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 자동 발생되는 퀘스트로 플레이어와 신녀가 제물로 받쳐졌을 경우 발동하게된다. 제물로 받쳐진 플레이어는 천마신교의 땅에 소환된 마신족 대신 무대륙에서 로기아 대륙으로 이동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주술진이 불안정해 마신족은 천마신교에 소환된 후 1년 간 천마신교 밖으로는 이동할 수 없다. 플레이어는 드래곤들과 협력을 통해 무대륙으로 돌아가 마신족을 섬멸할지 로기아 대륙에서 일반 플레이를 할지 결정해야 한다.
1. 레드 드래곤 하울을 찾아라.
2. 드래곤 로어
1.저주 받은 땅 세헬렘을 찾아라.
2.다크엘프 장로 라거 그란데를 찾아라.
3. ?????????????????????
성공조건: 무대륙으로 귀환, 마신족을 섬멸
실패조건: 플레이어의 죽음
세헬렘에 들어서자 퀘스트의 내용이 바뀌었다. 민혁은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 퀘스트창을 닫았다. 대지를 감싸는 어두운 기운에 아리나는 물론이고 티샤도 얼어붙어 있었다. 민혁은 다크엘프인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쌍둥이가 떠나고 우울해하는 아리나를 달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다크엘프는 어떻게 찾지?”
“고르비뉴가 알려준 방법이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하울은 자신에게 걸어놓았던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숨겨졌던 용의 꼬리와 고동색 뿔, 찢어진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드래곤 피어를 쏟아냈다.
“잠시만 기다리면 될 거야”
“응...근데 너... 드래곤 맞구나?”
“..죽을래....?”
민혁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하울은 피식 웃더니 그에게 스파크(Spark)를 먹여주었다.
“으악!”
온 몸을 짜릿짜릿하게 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민혁, 진짜 공격을 할 줄 몰랐기에 놀란 마음도 컸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쉽사리 그녀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만약 덤벼들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레벨이 깡패라는 것을 민혁이 다시 한 번 통감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리 전사들인가..”
민혁은 천라수라도를 꺼내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무리, 육안으로 그들의 정체가 확인되자 민혁은 검을 내렸다. 그들이 다크엘프였기 때문이다.
히힝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일제히 멈추고, 다크엘프들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들은 하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