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전초
* * *
아리나는 민혁이 잡아준 손을 얼굴에 가져가 입으로 따뜻한 바람을 불었다. 상점에서 산 토끼모양 귀마개를 하고, 볼을 발그레 붉힌 그녀, 그 모습이 너무 앙증맞아 그는 그녀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티샤는 그 간질간질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하울의 옆에 서서 함께 걸어갔다. 꽁냥꽁냥거리는 커플을 등 뒤에 두고, 일행은 금세 아센시오 영주성에 도착했다. 성문 입구에는 털옷을 껴입은 병사가 검문을 하고 있었다. 일행은 줄 서 있는 사람들 뒤로 가서 섰다.
“다음!”
줄은 느릿느릿하게 줄어들어 드디어 민혁 일행의 차례가 됐다. 빨리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하울이 로브를 벗고, 신분증을 제시하며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병사가 그녀를 제지했다. 하울은 짜증이 났지만 애써 화를 삭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흐...엄청난 미인이군!’
병사 콜먼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적발의 미소녀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부패병사였다. 통행료를 방자해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아녀자나 소녀들을 희롱했다. 그런 짓을 벌인지 벌써 5년째다. 그는 오늘도 검문을 하며 이것저것 자기 욕심을 챙겼다. 그러던 중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붉은 적발에 작고 슬림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적 취향을 저격했다. 그는 신분증이 이상하다며, 하울이라는 소녀에게 같이 가줘야겠다고 말했다. 뒤에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은 자신을 보며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콜먼은 욕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뒤의 여자들도 그녀 못지않은 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소녀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콜먼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울이라는 소녀를 데리고 평소 아녀자들을 희롱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성문 옆 임시초소로 향했다.
“벗어라”
그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벗으라 명령했다. 소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콜먼은 공포에 잠긴 미소녀의 맛을 보기 위해 히죽거리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울리는 굉음, 이후 임시초소에서 나온 것은 하울 혼자였다. 붉은 얼굴의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일행에게 돌아왔다.
“뭐해 가자!”
씩씩거리며 말하고 앞서 걸어가는 하울, 아리나와 민혁은 키득거리며 그녀의 뒤를 쫒아갔고, 티샤는 임시초소를 잠시 노려보다 빠르게 발을 놀렸다.
“뭐?! 마차가 없다고!”
하울의 분노 섞인 외침에 마차를 판매하는 상인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근래 이민족과의 전쟁이 있어서..전쟁물자로 다 나가버렸습니다..다행히 3일 정도 후면 새로운 상품이 오긴 합니다만...”
상인의 설명에 하울은 고민했다. 3일이라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녀는 은연중에 일행의 리더인 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정도는 괜찮다. 그동안 천사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말이다. 그의 옆에 붙어 있던 아리나는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 그런 걸까 생각해봤지만 민혁의 몸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일행이 여관을 찾고, 밤이 돼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개운하다!”
아리나와의 즐거운 밤놀이를 마친 민혁은 기지개를 펴고 짧게 포효했다. 그는 정액투성이가 되어 기절한 그녀를 방에 두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내려왔다. 1층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주로 용병들이 눈에 띄었다. 어제 마차 상인에게 듣기로 최근 이민족과의 전투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기!”
민혁은 지나가는 소년점원을 불렀다. 그는 점원에게 감자 샐러드와 닭고기 스프를 시켰다. 물론 팁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받은 1실버를 들고 총총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으윽...’
추운 지방이라서 그런지 음식의 맛이 많이 짰다. 그는 닭고기 스프를 한 입 떠먹고는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민혁은 연신 죄 없는 감자 샐러드만 포크로 쿡쿡 찔렀다.
드르륵
“....빨리 나왔군..”
민혁 앞의 의자가 끌리며 티샤가 나타났다. 그녀의 눈 아래에는 다크 써클이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자신과 아리나의 옆방이 바로 그녀의 방이었다. 밤새 들려오는 교성과 신음성에 잠을 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괜스레 미안해진 민혁은 뭔가 그녀에게 해줄게 없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너 무기 부서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녀의 무기인 두 자루의 단검 중 한 자루가 애드민과의 대결에서 부러졌다. 그 때문에 한동안 풀 죽어 있던 것을 기억해낸 민혁은 그녀에게 새 단검을 마련해 주겠다고 말했다. 티샤는 아닌척 했지만 귀가 쫑긋거리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티샤는 볼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여 그가 머리를 쓰다듬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조교..아니 조기교육이 중요하지!’
동물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민혁은 티샤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약간 아쉬운 눈치였지만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정말로 아쉬워하는 건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
그녀는 자신이 시킨 크림 스프를 한입 크게 떠먹었다. 그리고 메두사의 석화에 당한 사람처럼 돌처럼 굳어 움직임을 멈췄다. 민혁은 키득거리며 웃기 바빴다. 티샤는 고장난 기계처럼 덜덜 떨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프를 쳐다봤다. 이렇게 맛이 없어도 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시킨 음식은 다 먹어야지”
그녀가 스푼을 내려놓고 접시를 앞쪽으로 밀어버리자 민혁은 티샤 앞으로 접시를 다시 밀어주며 말했다.
“..농담이겠지..?”
티샤는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덜덜 떨었다.
“아니!”
결국 울면서 겨자 먹기로 소태 같은 아침식사를 전부 먹어치운 두 사람은 늦잠을 자는 아리나와 하울에게 행선지를 일러두고, 여관 주인이 추천해준 무기 공방으로 향했다. 아침 시간대라서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티샤는 새로운 무기를 산다는 생각에 귀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그의 뒤를 졸졸 쫒아왔다. 걷기를 얼마 곧 공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가에는 각종 꽃들이 생생함을 뽐내고 있었고, 입구에는 '오클레앙' 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서 있었다. 아담하고 클래식한 외관으로만 봐서는 찻집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민혁과 티샤는 타이밍 좋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저곳이 무기점이 맞는걸까 민혁은 잠시 들어가길 고민하다 용기를 내서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설치된 유리종이 울렸다. 다행히 내부에는 각종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브론드 보브컷의 여자종업원이 민혁과 티샤를 맞이했다.
“따로 찾으시는게 있으신가요?”
그녀는 친절하게 물었다. 여관주인이 이 가게를 추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검을 찾고 있습니다만..”
“손님께서 사용하실건가요?”
“아뇨 이쪽이.....”
민혁은 뒤에서 무기들을 구경하던 티샤를 가리켰다.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산대를 잠시 비우고 가게 뒤 공간으로 사라졌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족히 수십 자루는 되 보이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종업원은 낑낑거리며 그것을 들고 왔다. 민혁은 계산대 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일부 들어주었다.
“아 감사해요!”
“아닙니다”
웃는 것이 예쁜 그녀, 민혁은 마주 웃어주었다. 종업원씨는 계산대에 단검들을 우르르내려놓았다. 그는 귀를 파닥이며 눈을 빛내는 티샤에게 무기를 보게 하기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피네스의 샤프네스A등급
급소만을 정확하게 찔러 수십 차례 암살에 성공한 피네스의 단검 보조마법 샤프니스와 정화마법이 걸려있어서 날이 상할 일이 없다. 인간을 도축하는 당신을 위한 잇 아이템
보조마법 샤프니스 사용가능
오토르단검B등급
사냥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검 동물의 피를 섞어 만들어 환수, 마수 계열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10% 더 가한다.
카림빗 블랙 엣지A등급
아이지스 왕국 특무대 카림빗이 사용하던 것으로 갈고리 투척용이다. 살상력이 매우 높아 단검 이해도가 높아야 사용이 가능하다. 보조마법 리버스가 걸려 있어 회수가 쉽다. 단 아이지스 왕국 내에서 사용하다 카림빗에게 발각될 경우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보조마법 리버스 사용가능
디어숏소드C등급
날카로운 대거, 이름 있는 대장장이가 만들어 예기가 흐른다.
디어숏소드 빼고는 전부 괜찮은 것들이 많았다. 카림빗 블랙 엣지는 리버스 마법이 걸려있어서 투척용으로 쓰기 좋았고, 피네스의 샤프네스는 암살에 특화되어 있었다. 티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단검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는 카림빗 블랙 엣지를 들어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곧 내려놨다. 샤프네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없나..?”
티샤의 물음에 종업원씨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가게에 있는 단검은 이게 다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게 없어?”
끄덕
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종업원씨에게 좀 더 둘러보겠다고 이야기하고 티샤를 이끌고 다른 공방을 찾기 위해 가게를 나가려 했다. 그 때 여종업원씨가 그들을 잡았다. 그녀는 원하는 옵션을 말해주면 핸드메이드로 검을 만들어주겠다 말했다. 티샤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이 원하는 단검의 디자인, 그립, 보조마법의 종류를 말했다. 종업원씨는 그녀의 요구를 성실히 메모했다.
“흠...이 정도면 5일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마차가 오는 것은 3일후였다. 민혁은 티샤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귀는 기대감에 힘입어 파닥파닥 움직였다. 어지간히 단검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싱긋 웃고 입을 열었다.
“사흘 후에 마을 떠날 예정인데...맞춰주실 수는 없을까요?‘
민혁의 말에 여종업원씨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내 그녀는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색 보석이 그려져 있었다. 민혁은 이게 무엇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