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전초
* * *
과일주라는 말에 티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의 귀는 파닥파닥거리며 자신이 고민중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하울과 민혁은 흐뭇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샤는 이내 결심이 섰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서 과일주는 맛있냐며 물었다. 아리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티샤는 과일주를 앞세운 최종 보스 아리나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냐!”
마을 초입 경비를 서던 엘프가 그들에게 활을 겨눴다.
“두데 아저씨 저에요!”
“아리나!!”
아리나가 로브를 벗으며 앞으로 나왔다. 두데라고 불린 엘프는 그녀를 보고 환히 웃으며 활을 내렸다. 일행은 장로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가는 중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민혁을 치료해준 라돈과 카샤 영지에서 구한 엘프 세 명, 그들은 각자 민혁과 아리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러게 험한 일을 겪어서...적응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엘프 삼인방이 마을에 잘 정착한 것 같아 아리나는 다행스러웠다. 민혁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티샤는 바짝 얼어 붙어 있었다. 하울은 장난스럽게 그녀를 콕콕 찔렀다. 평소라면 화를 내며 노려보았겠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어서오려무나”
장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환영했다. 아리나와 민혁을 고개를 꾸벅 숙였고, 티샤는 로브를 더욱 더 깊게 눌러썼다. 하울은 로브를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하울님!!!”
장로는 언제 무릎을 꿇었나 의문이 들 정도의 속도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아리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울은 장로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뒤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향했다.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고 자리에 앉았다. 아리나와 티샤도 착석했다.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장로가 눈치를 보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로였다. 그는 마신족에 관한 일이 해결됐는지 궁금해했다. 아리나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고생했구나...애썼다..”
장로는 아리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묘한 눈길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 보다 적개심이 많이 가신 것 같았다.
“몬스터트럼을 해결한 것은 우리 마을로써도 은혜를 입은 것과도 다름없는 일...마을을 대표해 감사한다.”
그는 꾸벅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민혁은 180도 변한 그의 태도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의 시선이 이번에는 티샤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다크엘프라는 것을 들은 장로는 그녀의 출신성분을 물었다.
“....페, 페투사...일족이다..”
티샤는 긴장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울 앞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딱히 다크엘프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후 대화는 주로 하울과 장로 둘이 이어나갔다. 뭐가 그리 쌓인 이야기가 많은지 1시간을 쉬지도 않고 말했다. 천사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는지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하울은 그녀가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참...”
장로의 집을 나가던 하울이 무언가 까먹은 게 있는지 우뚝 멈춰섰다.
“무언가 필요하신 거라도?”
장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울은 웃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는 술잔을 들어 마시는 척 연기를 했다. 장로는 하울의 제스쳐를 유심히 보다 생각난 것이 있는지 집으로 들어가 유리병 여러 개를 꺼내왔다. 장로가 매우 아끼는 과일주였다. 제라르 산맥에서만 나는 프뢰비라는 과일을 으깨서 1년 정도 숙성한 것으로 먹으면 달콤한 과일향과 술 특유의 알콜맛이 없어서 엘프들이 유일하게 마시는 술이었다. 그중에서도 장로가 직접 만든 과일주는 다른 엘프들이 만든 것과 차원이 달랐다. 다른 과일주들은 수확량이 많지 않은 프뢰비가 아까워 다른 과일들을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맛과 향이 들쑥날쑥 했지만 그가 만든 것은 프뢰비만을 으깨 넣은 엘프 마을 최고의 과일주였다.
“이야~숙성이 잘 됐네 언제나 고마워!”
과일주를 받아든 하울의 말에 장로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민혁에게 과일주를 건내주었다. 병마개를 했음에도 풍겨오는 과일 향에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그도 침을 꿀꺽 삼켰다. 분홍빛 과일주의 일렁임에 티샤의 붉은 눈동자도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하울은 키득키득 웃으며 아리나에게 길안내를 시켰다.
“오 테르겐 오랜만!”
“안녕하십니까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하울님..그리고 아리나!!”
“......!”
아리나의 집에 도착한 일행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과일주를 따서 파티를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히드라가 아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드라는 테이블에 앉아 먹이를 노리는 눈빛으로 날카롭게 아리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방울방울 흘리며 뒷걸음질 치다 민혁의 뒤로 숨어버렸다.
“아리나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이리 나와”
독을 가득 품은 히드라의 말에 아리나는 바들바들 떨며, 하울의 옷자락을 꽈악 붙잡았다. 민혁도 히드라의 기세에 할 말을 잃었다.
“테, 테르겐...그,그게...”
아리나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말이 많네...?!”
번뜩이는 눈동자, 아리나는 히끅 딸꾹질을 하며 끌려 나오듯 히드라 아니 테르겐의 앞에 섰다. 그녀는 아리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와락하고 아리나를 끌어안았다.
“걱정했잖아..바보야..”
“히잉...미안해...”
테르겐의 안도 섞인 말에 아리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답했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울과 민혁 그리고 티샤도 두 엘프의 감동적인 재회를 가만히 지켜봐주었다. 테르겐은 이내 아리나를 떼어내고 눈을 빛냈다.
“무사히 돌아온 건 좋아.. 그러면 이제 벌을 받아야겠지?”
“테,테르겐..!”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아리나는 벌벌 떨었다. 그녀는 테르겐의 잔소리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그녀에게 잡혀 끌려가게 되었다. 아리나는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며 민혁에게 손을 뻗고 ‘살, 살려주세요 민혁님~!’ 소리쳤다. 그는 차마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꼬옥 감으며 그녀를 구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크윽..미안해..아리나 내가 부족해서..!!’
“뭐해 과일주 안 마실거야?”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는 민혁, 하울은 용사를 유혹하는 서큐버스(Succubus)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과일주 병을 흔들었다.
“아니 마실거야 그보다 안주는 뭐가 좋을까?”
민혁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하울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인벤토리에 보관된 고기나 음식들을 꺼내놓고 무엇을 과일주에 곁들여 먹어야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뒤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티샤는 약간 깬다는 표정으로 민혁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녀도 과일주의 향기에 져서 곧장 테이블에 착석했다. 일행은 과일주 파티를 벌였다. 장로가 준 술은 넉넉해서 테르겐과 그녀에게 혼나고 시무룩해져 있던 아리나도 껴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셨다. 덕분에 아리나의 집 근처 엘프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셌다. 성격 같아서는 찾아가서 항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위대하신 분이 찾아오셨다는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암....”
민혁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그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고 옆을 보니 어젯밤 먹었던 안주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티샤도 구르고 있었다.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일주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정작 그녀 자신은 술이 약했다.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세 잔 째 완전 꽐라가 되어버렸다. 민혁의 평소 지론대로 예쁜 여자라면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된다. 하지만 어제는 좀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술병과 쓰레기들을 모아 삼매진화로 녹여버리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룰루 랄라 룰루 랄라~”
기분 좋게 이곳저곳 특히 중요한 부분을 깨끗이 했다.
벌컥
“......”
“......!”
그가 막 물건에 거품을 묻혀 닦고 있을 때 쯤 하울이 유리로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혁은 미간을 찌푸렸고, 그녀는 문을 연 그 상태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어지는 정적 민혁은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몸이 으슬으슬 떨리자 입을 열었다.
“저기...문 좀 닫아줄래 춥거든..”
“꺄아아아악!”
평소 아리나를 상대로 성희롱을 하는 그녀답지 않은 소녀와 비슷한 비명을 지른 하울은 얼굴을 토마토처럼 붉게 만든 뒤 샤워실 문을 쾅하고 닫았다. 민혁은 유리문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
“왜 문을 안 잠그고 씻는 거야 이 멍청아!!”
하울은 유리문에 등을 기대고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여기 아리나 혼자 사는 집이라 문 잠그는 기능 같은 거 없거든!”
민혁도 지지 않겠다는 듯 큰소리를 쳤다. 결국 진 건 하울이었다. 그가 ‘구경 잘해놓고 뭘!’ 이라고 말하자 대꾸도 하지 않고 잽싸게 도망을 친 것이다. 민혁은 흥하고 콧바람을 내뿜고는 다시 즐거운 샤워를 이어갔다. 술에 취한 이들이 늦게 일어난 관계로 아침식사는 생략되었고, 아침 겸 점심식사를 먹었다. 티샤는 어제 자신이 벌인 추태를 떠올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식사에 집중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신 테르겐은 그녀의 남편이 데려갔다. 그녀의 남편은 엘프치고는 못난 얼굴이었지만 테르겐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보지 못했다고 서로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나..어제도 말했지만 네가 여행을 떠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내가 화낸 이유는 네가 혹시라도 다칠까봐 걱정한거야...음...말이 좀 꼬였지만...어쨋든 꼭 몸 조심해야해”
남편과 러브러브하던 테르겐은 떠나면서까지 그녀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대하던 성각검 베르할렌을 꺼내볼까?”
하울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공간주머니는 7서클 마법이라 그곳에 보관했던 천칭검을 꺼낼 수 있었다. 만약 8서클 마법이었다면 하울의 상태가 호전되기까지 손가락을 빨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검은 공간속에서 순백의 대검을 꺼냈다. 검신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며, 손잡이와 해드 부분에는 아이지스 왕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박혀 있었다. 매력적인 검이었다. 그 매력은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민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베르할렌을 잡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다. 만약 하울이 검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그의 손에 베르할렌이 잡혀 있었을 것이다. 티샤와 아리나도 멍하니 베르할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무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두 사람을 보호했다. 그제서야 둘은 정신을 차렸다.
“드래곤 로어의 위치는 어디에 쓰여져 있는거야?”
민혁은 베르할렌을 자세히 관찰하며 물었다. 하울은 작게 웃더니 아공간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거침 없이 찢었다. 그러자 스크롤에서는 빛이 세어나왔고, 그 빛은 베르할렌에 흡수되었다.
“이제 됐어 기다리기만 하면 돼”
잠시 시간이 지나고 반응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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