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전초
* * *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민혁은 남은 자리를 확인하고 주차를 했다. 옆 차가 많이 낯익은 차였다 . 차량번호를 살펴보니 그녀의 차였다. 이지아!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삭히고 소윤의 손을 잡고 정보관으로 향했다. 캠퍼스에는 이미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민혁과 소윤은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길을 걸었다.
“주말에 벚꽃 구경 갈까?”
끄덕
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벚꽃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수업을 듣는 정보관에 도착했다. 민혁은 아쉽지만 그녀의 손을 놓으려했다. 소윤이 다른 학우들 앞에서 스킨쉽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윤아?”
“...응..”
“정보관 다 왔어”
“..근데?”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 소윤, 오히려 그의 팔에 찰싹달라붙었다. 민혁은 피식 웃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는 소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정보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 애정과시를 하지 않는 커플이 대놓고 찰싹 붙어있으니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신경쓰지 않고 강의실로 향했다. 하지만 소윤은 주변 시선이 의식됐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소윤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갈색머리의 미소녀가 소윤에게 달려들었다. 152cm 언뜻 보면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 민혁은 소윤에게 달려오는 그녀의 머리를 잡아챘다.
“이지아!”
그녀가 바로 소윤에게 못된 거짓말을 알려준 친구였다. 민혁은 소리를 버럭지르며 지아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완벽한 아이언 클로였다.
“으아아아앙~”
지아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민혁의 손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꽤 컸기에 누가 말릴 법도 하건만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민혁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지아는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아아아앙~♡”
그러다 달콤한 신음성이 섞여 나왔다. 민혁은 기겁하며 얼른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지아는 켁켁거리면서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윤은 안타까운 친구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으앙~ 소윤아 네 남자친구가 나 괴롭혀!”
그러자 지아는 우는 척 하며 소윤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우유같이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소윤은 '...떨어져...'라며 차갑게 일갈했지만 지아는 빈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괴롭혀 다 네가 소윤이한테 거짓말을 시킨 인과응보잖아 그리고 떨어지랬지!”
민혁은 한 번 더 지아의 머리채를 잡아 소윤에게로부터 떨어트렸다.
“아앙~♡ 너무 거칠다 자기!”
바닥에 모로 주저앉으며 볼을 발그레 붉히고 입가를 농염하게 혀로 핥는 이지아
“자기는 얼어죽을!”
민혁은 소름이 온 몸에 돋았다. 그가 그녀를 상대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주체할 수 없는 장난기도 한 몫 거들지만 그녀가 M적 성향이 짙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일련의 행동은 장난이 아니라 정말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 심지어 소윤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의 성적 취향을 안지는 벌써 1년 신입생 신고식 때였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민혁은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소윤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지아는 그가 장난을 더 받아주지 않자 혀를 칫하고 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지가 잔뜩 묻은 엉덩이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는 소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 강의가 시작됐다. 민혁과 소윤이 듣는 과목은 증강현실의 역사였다.
"증강현실이란 사용자가 눈으로 보는 현실세계에 가상 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현실세계에 실시간으로 부가정보를 갖는 가상세계를 합쳐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므로 혼합현실(Mixed Reality, MR)이라고도 하며, 현실환경과 가상환경을 융합하는 복합형 가상현실 시스템(hybrid VR system)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일본을 중심으로 연구·개발이 진행되었지 현재에는 그 기술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znpq사나 코리아사에 적용된 것이고, 현실세계를 가상세계로 보완해주는 개념인 증강현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환경을 사용하지만 주역은 현실환경이야. 컴퓨터 그래픽은 현실 환경에 필요한 정보를 추가 제공하는 역할을 할뿐이지! 사용자가 보고 있는 실사 영상에 3차원 가상영상을 겹침(overlap)으로써 현실환경과 가상화면과의 구분이 모호하는 것이야말로 증강현실의 힘이지! 하지만 최근 현실환경과 가상화면 구분이 모호한 것을 정신적 증세에 비유해서 부르는 언어가 있는데 아는 사람이 있나?“
노교수는 강의실을 쭈욱 둘러 둘러보았다. 드문드문 손을 들어올려 내가 답하겠다는 학생이 있는 반면 이지아처럼 책상에 머리를 박고 아이컨택을 거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는 전자의 학생들에게 대답을 시키지만 노교수는 달랐다.
“거기 이지아양”
그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지아를 지목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몸을 움찔떨었다. 소윤은 어서 일어나라며 그녀의 볼을 콕콕 찔렀지만 지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민혁은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죽었나 봅니다”
민혁의 말에 강의실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누워 있는 지아의 귀도 시뻘겋게 바뀌었다. 교수도 허허하고 웃었다.
“이거 큰일이군.. 그럼 119에라도 연락을 할까?”
센스 있는 교수는 핸드폰을 양복 앞 주머니에서 꺼내 전화를 거는 척을 했다. 지아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전화기를 다시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죽었던 지아양이 살아났군 기적이야!’ 라고 외쳤다. 덕분에 강의실에 다시 한 번 웃음이 번졌다.
“그럼 지아양 내 질문에 답해주겠나?”
“......”
웃음이 멎고, 교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아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뛰룩거리며 굴렸다. 그러다 민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지아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힐을 신은 상태로 그의 발을 꾸욱 밟았다.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허허 그래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민혁군이 답해주겠나?”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노교수가 말했다.
“......”
집중되는 시선, 민혁은 지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휘파람을 불며 나는 모른다는 자세를 취했고, 두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던 소윤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리셋 증후군입니다.”
“그래 맞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혁과 지아에게 앉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며 옆자리 지아의 발을 툭툭쳤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문제 있냐는 지아의 표정에 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셋 증후군이란 컴퓨터가 오류를 일으켰을 때 시스템을 초기화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뜻하는 ‘리셋(reset)’과 증후군을 뜻하는 ‘신드롬(syndrome)’의 합성어라네 컴퓨터를 초기화시키듯 현실세계에서도 잘못되거나 실수한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가리키지 과거에는 컴퓨터에 친숙한 세대에서 나타나며, 일부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치료법도 많이 생겼다네 리셋증후군의 대표적 특징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근래 증강현실의 발전으로 인해 이는 점점 더 심해져 리셋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나 인간관계를 쉽게 버리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회 부적응 현상을 보이게 되지 심할 경우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범죄행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네 절도나 폭행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을 단지 게임의 일종으로 여기고, 자신의 죄책감을 리셋하면 자신의 행위도 없던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노교수는 하얀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열성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10시에 시작한 수업은 12시 가까이 돼서야 끝이 났다. 민혁과 소윤은 지아와 함께 점심을 먹고 마지막 수업까지 같이 들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셋이 수강시간표가 같다 보니 가능한 것이었다. 민혁은 소윤과 비슷하게 시간표를 짰고 지아도 소윤과 비슷하게 시간표를 짰기 때문이다.
“우리 저녁 뭐먹을까?”
벌써 어두워진 하늘, 지아가 정보관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라고 표현하지 말아줄래...”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소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의 차가운 반응에 지아는 커플지옥이라고 외치며 둘을 기준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뛰어다녔다. 민혁과 소윤은 지아의 장난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히히 웃었다 그러면 같이 저녁 먹는 거다 혼자 먹으면 맛없단 말이야 응응?”
“...그러면...우리 집으로와...”
결국 마음이 약한 소윤이 승낙 했다. 아침에 소윤이 운 일 때문에 마음이 걸려 오늘밤은 연인들끼리의 오붓한 저녁식사를 계획했던 민혁은 입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걸 본 지아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소윤 몰래 그를 약올렸다. 민혁은 다시금 봉인되었던 아이언 클로를 사용할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이 도M 때문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전에 알려줬던 그 주소로 가면 되지?”
지아가 차문을 열며 물었다. 소윤은 고개를 저었다.
“응? 뭐야 나한테 말도 안하고 이사라도 했어?”
끄덕
“어디로?”
소윤은 손가락을 뻗어 차에 시동을 걸고 있는 민혁을 가리켰다. 순간 지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민혁에게 도둑놈이라고 소리쳤다.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소윤을 차에 태우고 먼저 출발해버렸다. 지아는 흥하고 콧바람을 불고는 차문을 쾅하고 세게 닫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켰다.
뚝뚝
“......”
네비게이션 화면을 누르는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지아는 이를 악 다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고 있었다. 그 둘이 언젠가 결혼이라는 이름의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먼저 좋아했음에도 고백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고, 그를 놓쳤음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주변을 얼쩡거리는 미련한 내가 미웠다. 그녀는 민혁이 원망스러웠다. 차가운 척 무심한 척 해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그가 미웠다. 소윤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의 친구라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다면
“흑...흑...”
지아는 쿡쿡 쑤셔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핸들에 머리를 기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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