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전초
* * *
스토크는 자신의 금발을 뒤로 넘기며 온 몸에 흘러넘치는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이내 강기처럼 거대한 덩어리가 그의 손에 뭉쳤고, 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이교도에게 심판을! 이교도에게 죽음을!”
광기에 찬 그의 외침, 민혁은 몸을 움찔거리며 피하려 노력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사지 멀쩡한 곳 없이 데미지를 입은 상태로 바로 게임오버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스토크는 미친 듯이 웃으며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민혁은 최후를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이미 세이브 포인트는 저장 해놓은 상황, 다음 회차에는 반드시 스토크의 얼굴을 갈아버리겠다 맹세했다.
“죽는 건 너야!”
광소하는 스토크의 뒤로 하울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레이피어 대신 천라수라도를 들고 돌진해왔다.
“흥 웃기는.....!”
스토크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공격을 튕겨내려 뒤로 돌았다. 아니 돌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온 몸이 마치 조각상에 금이 간 것처럼 쩍쩍갈라져 있었고, 균열이 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는 신성력을 끌어올려 치료를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멸신에 당한 피해와 블레스의 중복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한꺼번에 몰아친 것이다.
“죽어!”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하울, 스토크는 입을 벌려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입도 벌어지지 않았다.
푸욱
천라수라도가 그의 심장을 직격했다. 튀랑의 사도, 스토크는 눈앞에 그분이 자신을 배웅하러 온 것을 확인하고 미소지었다. 이것이 진정한 순교였다. 전사들의 성지 발할라로 갈 수 있다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강철의 전사처럼 똑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스토크가 믿는 그분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
“하아..하아...빌어먹을 튀랑의 개..하아..”
스토크를 신의 곁으로 보낸 하울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상처는 온 몸 가득했고, 팔목도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녀의 몸은 이미 폴리모프가 반쯤 풀려 드래곤으로 돌아가기 직전, 겨우 겨우 인간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용인족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붉은 머리카락 위에는 고동색 뿔이 피부에는 비늘이 살짝 돋아있었고, 용의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드래곤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아..이 빌어먹을 검!”
하울은 지친 몸을 이끌고, 베르할렌의 손잡이를 잡았다. 천칭검이라는 칭호와 맞지 않게 검신에서 마기가 세어 나왔다. 그녀는 발로 검신을 쾅하고 차며 베르할렌을 뽑아들어 아공간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안티마법존이 사라져버렸다.
“하아...이제야 마법이....아 참 민혁!”
목표를 회수하고 대성전 바닥에 누우려고 했던 하울은 반죽음 상태였던 민혁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대자로 뻗어있는 그에게 걸어갔다. 다리는 박살이 나 있었고, 복부는 움푹 파여 들어갔다. 도저히 산사람이고 보기 어려웠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단지 피를 많이 흘려 기절한 상태였다. 하울은 그가 살아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치유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으윽...’
그러자 심장 즉 드래곤 하트에 무리가 왔다. 베르할렌이 내뿜고 있었던 안티마법존의 여파와 몸에 입은 피해가 겹쳐 마법의 조종이라고 하는 드래곤의 힘의 근원에도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마법을 사용한 대가가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하울은 이대로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리커버리(Recovery)!”
환한 빛과 함께 마나가 요동쳤고, 7서클의 대마법 리커버리가 발동됐다. 빛은 그를 감쌌고,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박살난 다리도 제 자리를 찾았고, 민혁은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눈을 뜨고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하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치운 거야?”
“그래 이 누님이 샤샥하고 스슥해버렸지!”
키득거리며 웃는 하울, 하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많은 상처들과 용족의 꼬리, 피부 곳곳에 드러난 비늘까지 금방이라도 폴리모프가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민혁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다리가 풀리려고 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축해주었다. 하울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민혁은 아니라며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울이 민혁보다 작다보니 그의 시선이 아래로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고의가 아니지만 찢어진 옷 틈 사이로 보이는 작고 앙증맞은 가슴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울도 그의 시선을 읽은 것인지 얼굴이 붉었다. 셋의 대결에 의해 대성전은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천장과 벽면이 무너졌고, 레이건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관뚜껑을 열고 나와 그의 머리를 부수려 했을 것이다.
“아리나! 티샤!”
하울이 베르할렌을 회수한 것을 안 민혁은 아리나와 티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의 부름에 천장이 무너진 잔해 속에서 땅의 정령 노움이 튀어나왔다. 민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그가 아리나의 정령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노움의 뒤로 아리나와 티샤가 잔해를 뚫고 나왔다.
“아리나!”
“민혁님!”
아리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달려왔다. 민혁은 팔을 벌려 그녀를 받아주었다. 감동적인 해후 그 뒤에는 둘 사이에 껴서 숨도 못쉬고 켁켁거리는 하울이 있었다. 그녀는 ‘어이...환자도 좀 생각해 주지 그래!’ 라고 소리치며 안고 있던 둘을 분리시켰다. 아리나는 이제야 하울이 보였는지 그녀의 상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엉엉 흘렸다. 결국 일행은 아리나의 눈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대성전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대성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민혁은 창혼을 종료했다. 그는 한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민혁은 안 골던 코까지 골았다. 그의 책상 위 컴퓨터에는 그동안 작업했던 소스파일이라던가 데이터파일이 수두룩하게 열려져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빼꼼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것은 소윤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자고 있는 민혁을 발견하고는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콕콕
“으으음..”
소윤은 장난스레 그의 볼을 콕하고 찔러보았다. 민혁은 그녀의 손길에 고양이처럼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잠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앞으로는 그의 옆에서 일어나 이 얼굴을 매일 아침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윤은 약간 부끄럽지만 너무나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다. 잠시 그 상태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소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지지고 볶는 소리가 집에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민혁은 숙면을 취했다.
“...일어나..”
소윤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벽면의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두시였다. 그녀는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아 민혁을 흔들어 깨웠다. 뒤척뒤척거리던 그는 눈을 반쯤 떠서 자신을 깨운 사람을 봤다. 민혁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덥썩 끌어 안았다.
“꺄~”
그의 장난에 소윤도 응해주었다. 그녀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겨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민혁은 히죽웃으며 그녀를 놓치지않겠다는 듯 꼬옥 끌어 안았다. 잠시 서로의 온기를 느끼던 둘은 주방에서 찌개가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들리고서야 침대에서 벗어났다.
“오 많이 늘었네?!”
대파가 잔뜩 올라간 김치찌개를 한 입 떠먹은 민혁은 소윤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그녀는 그의 칭찬에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를 마친 민혁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소윤에게 함께 씻자고 졸라보았지만 그녀는 민혁의 등짝에 스파이크를 날리며 거절했다.
“큰 짐은 다 붙인거지?”
두 사람은 봉국에게 미리 빌려놓은 차를 타고 함께 소윤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내부는 이미 짐을 거의 다 옮겨 휑한 상태였다. 하지만 몇몇 작은 짐들이 남아 있었다. 민혁은 미리 준비한 큰 박스를 꺼내 남은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음... 이건?!”
민혁은 방을 정리하던 중 서랍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검정색의 섹시한 란제리였다. 흔히 말하는 승부 속옷이었다.
“..그거 내려놔.....”
소윤은 정색하며 말했다. 민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뭘,뭘 하려는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혀로 속옷의 음부 부분을 핥으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윤의 제지에 행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와 그의 손에 들린 속옷을 가로챘다. 민혁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속옷을 바라보았다.
“...죽어!..”
소윤은 으르렁거리며 그를 위협했다. 민혁은 깨갱하며 휘파람을 불고, 나머지 짐을 마저 치우기 시작했다. 곧 짐을 싹 치울 수 있었다. 민혁과 소윤은 차에 두 박스 정도되는 짐을 싣고 잌게아로 운전대를 돌렸다. 그의 집에 기본적인 가구들은 비치되어 있지만 전에 쓰던 가구 대부분을 버리기로해 화장대나 수납장 등은 새로 골라야 했다. 소윤과 민혁은 신혼부부가 새집을 꾸밀 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가구를 골랐다.
“이건 어때?”
민혁은 분홍색 가득한 공주풍의 화장대를 가리켰다. 소윤은 질색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는 검정색 단색으로 된 모던한 화장대를 선택했다. 민혁은 그녀가 평소에 귀여운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쁜것도 좋지만 하양색은... 때 타..”
그의 생각을 읽은 소윤이 말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대를 고른 둘은 그것말고도 서랍과 수납장을 더 골랐다.
“...다 골랐어..”
카트에 놓인 조립식 가구들을 보며 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직이야 침대를 골라야지!”
침대라는 말에 소윤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민혁은 짖궃게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음란마귀가 씌인것 같다고 놀렸다. 소윤은 그의 팔뚝을 꼬집을 뿐 더 이상 뭐라 입을 열진 않았다.
“고객님 어떤 상품을 찾으시나요?”
“침대는 어느 쪽에 있나요”
“침대라면 이쪽입니다.”
완제품을 판매하는 코너, 민혁은 직원에게 침대 코너가 있는 곳을 안내 받고 소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귀까지 빨갛게 만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직원이 잘 어울리는 부부라고 말했다. 소윤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변해 마치 토마토 같이 변했다. 민혁은 싱긋 웃으며 발걸음을 더욱 경쾌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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