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전초
* * *
민혁이 질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티샤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라도 아픈걸까 하는 생각에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온도는 정상이었다. 민혁은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의아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티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드래곤이라고 하던데....혹시....농담...?”
티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아니..농담 아닌데 말 안했었나 얘 드래곤이야”
“네네 드래곤입니다~”
하울의 가벼운 대답에 티샤는 총 맞은 병사처럼 그 자리에서 모든 동작을 멈췄다. 구릿빛의 피부는 거짓말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민혁은 죽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되서 티샤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시체인 것 같았다. 하울이 드래곤이라는 것이 그렇게 충격인걸까 티샤는 한 동안 넋을 놓고,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하울이 머리를 톡하고 건드리고 나서야 그녀의 시간이 제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
땡하며 굳어 있던 티샤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하울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넙죽 엎드렸다. 완벽한 오체투지의 자세, 아리나와 민혁은 혼란에 빠졌다. 반면 하울은 득의양양 미소를 지었다.
“미천한 다크엘프 티샤 그란데가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하울이 사일런스 마법을 순간 걸지 않았다면 대성전 문앞의 기사들에게 모두 들켰을 것이다. 그러던 말던 티샤는 하울에게 충성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출신성분, 부모가 누군지 그 동안 무례하게 대해서 정말 죄송하다며 싹싹 빌었다. 쿨한 모습의 미녀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았다.
“흠...페투사 일족의 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티샤, 하울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혁은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왜그러냐고 물었다. 하울은 얼음덩어리 즉 티샤가 살갑게 붙어오니 기분이 더럽다며 투덜거렸다. 결국 하울은 티샤에게 자신을 평소처럼 대하라고 명을 내렸다. 티샤는 하울의 말에 절대 그렇게는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명령이라고 말하자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심 살갑게 말을 하는 것이 거북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방금 전 무릎을 꿇었던 다크엘프는 어디 갔는지 티샤는 다시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하울도 그녀의 태도 변화에 기가 찼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기사들은 내가 제압할게 신호하면 바로와”
관계정리가 끝나고, 민혁은 기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천마잠행술을 사용했다.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고, 이내 감쪽 같이 모습을 감췄다. 그 하울 마저도 놀란 눈치였다. 무표정했던 티샤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으나 이미 암흑 속에 몸을 숨긴 민혁은 빠르게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지척에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민혁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푸욱 촤아악
청색 문양을 플레이트 메일에 세긴 기사의 목에서 피보라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주인을 잃은 몸뚱아리는 휘청거리다 철퍼덕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함께 번을 서던 동료 기사들은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당황해 우왕자왕했다. 민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일격을 가했다.
푸욱최아악
철퍼덕
이변은 없었다. 또 한 명의 기사가 쓰러졌다. 남은 두 명의 기사는 공포에 굴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누구냐 당장 모습을 들어내라!!”
검을 허공에 겨누며 소리치는 기사, 누가 보아도 강단 있는 기사의 모습이었다. 민혁도 인정 했다. 그들은 강직하고 훌륭한 기사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약했다. 민혁은 검을 휘둘렀고, 허공에 검을 들이댄 기사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이쯤 되자 마지막 남은 기사는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와 압박 속에 손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민혁은 마지막 예의로 편히 그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소리 없는 살수, 기사는 자신의 죽음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어서와 정리 끝났어”
기사들을 모두 처리한 민혁은 기둥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여인들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그녀들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울과 티샤는 기사들의 시체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고, 아리나는 민혁의 뒤로 숨었다. 손속이 지나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기사들을 상처 없이 제압할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고, 그도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것뿐인 이야기다. 민혁은 미련 없이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시체에서 눈을 뗐다.
“이거 그냥 들어가면 되나?”
민혁이 대성전으로 향하는 족히 4m는 되어 보이는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혹시라도 열쇠가 필요하다면 죽은 기사들의 품을 다시 뒤져봐야 했다. 트랩마법이 있다면 하울이 해결해 줄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봐”
하울은 그리 말하더니 문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냥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민혁은 하울의 말을 듣고, 힘을 줘서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문이 얼마나 두껍던지 쿠그그그긍하며 바닥 긁는 소리를 냈다. 하울은 재빨리 사일런스(si·lence) 마법을 펼쳐 대성전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손을 썼다. 예상치 못했던 소음에 등판 가득 식은땀이 흘러나왔던 민혁은 그녀의 마법에 안심하고 문을 마저 열었다.
문이 서서히 열리고,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성전은 동그란 돔 형태였다. 벽과 천장은 모두 흰색 일색의 대리석들로 지어졌고, 500살 먹은 금강소나무보다 큰 기둥 여러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그 기둥의 벽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레이건 왕의 건국 신화였다. 그리고 대성전의 정 가운데 드래곤 슬레이어 레이건의 검이자 천칭검이라 불리는 이 꽂혀져 있었다. 민혁은 성각검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리나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SSS급
마룡 고르비뉴의 드래곤 하트와 래드 드래곤 레기셀의 어금니를 갈아 만든 검, 레기셀은 자신의 파트너 레이건이 고르비뉴를 잡고 팔을 잃자 그를 위해 자신의 어금니를 뽑아 검을 만들었다. 거기에 고르비뉴의 드래곤 하트와 신의 금속 아다만티움을 섞은 후 천하의 명장이라고 하는 드워프 왕 퍼시발이 직접망치질을 했고, 세상 그 어느 불꽃보다 뜨겁다는 래드 드래곤의 브레스로 주조했다.
제한: 용족, 드래곤 나이트
무력+300
드래곤 나이트에 대한 단서 습득 가능
스킬 ‘로젠 아이어’ 사용가능
‘무력 증가수치가 300..?!!’
천마신검과 천라수라도에 비해 밀리지 않는 능력치였다. 아니 오히려 무력수치를 늘려 준다는 부분에서는 앞의 두 무기보다 더 쓸만했다. 민혁은 욕심이 생겼다. 아름다운 곡선의 자태를 뽐내는 저 검을 손에 넣고 싶어졌다. 그는 몽롱한 눈빛으로 베르할렌을 응시했다.
고르비뉴의 매혹이 발동됩니다. 육도안 천상도(?上?) 발동 상태이상에서 벗어납니다.
“매혹?!”
시스템음에 놀란 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아리나와 티샤도 민혁과 비슷하게 베르할렌을 몽롱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울만이 정상이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민혁이 매혹에서 벗어나자 눈을 빛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민혁은 자신의 주변을 빙그르 돌며 살피고 있는 하울에게 물었다.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위에 올리고 입을 열었다.
“베르할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룡 고르비뉴의 짓이야 가끔 마음에 드는 영혼이 있으면 매혹을 펼쳐서 베르할렌을 만지게 하더라고 물론 만지더라도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말이야.... 근데 너 되게 일찍 깨어났다.. 소드마스터들도 매혹에 걸리면 1시간은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하던데”
하울의 설명에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상도(?上?)를 사용해 아직도 멍하니 정신을 놓고 베르할렌을 응시하고 있는 둘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리나는 자신이 매혹에 걸렸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티샤는 자신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에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그녀들은 하울에게 왜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따졌는데 대답이 가관이었다. 하울은 구경거리가 생겨 구경한거지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티샤는 하울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하울은 편히 하라고 했더니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그녀가 아예 잊은 것은 아닌지 햇갈렸다.
“둘 다 눈싸움은 그만해.. 그리고 하울 너는 드래곤이라는 계집이...어휴...빨리 베르할렌이나 뽑아봐”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는 그만해~”
하울은 민혁의 말에 투덜거리며 베르할렌을 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민혁은 살기를 느꼈다. 과연 누구의 것일까 고민할 시간도 없이 대처할 틈도 없이 괴한의 공격이 민혁을 덮쳤다.
콰앙
“민혁!”
하울은 깜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군가의 공격에 의해 직격당한 상태였다.
“민혁님!”
폭발음과 함께 비산하는 분진, 갑작스런 습격에 놀란 아리나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뛰어가려 하자 티샤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아리나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단순 육체 능력만으로는 티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리나는 자신을 잡고 놓지 않는 티샤에게 놓아달라 간청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제발요!”
아리나의 외침에도 티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을 폭발음으로 인해 분진이 날리는 곳을 향해있었다. 티샤의 단호한 태도에 아리나도 가만히 먼지 속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다행히도 민혁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반응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던 공격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민혁을 감싸고 있는 암운강신공 덕분이었다. 천마신공이 주인의 위험을 먼저 인지하고 힘을 발휘한 것이다. 아리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런 그녀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오 나의 천사님 이제 곧 제가 저 악마에게 현혹된 당신을 구해 보이겠습니다.’
그는 바로 애드민이었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걸까 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방금 전 공격을 날린 사제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이 스무명 가까이 서 있었다. 민혁은 이렇게 많은 인원이 들어왔음에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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