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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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단둘이 마주 앉은 민혁과 티샤, 하울과 아리나는 티샤를 씻기느라 자신들은 샤워가 늦어져 여태 샤워 하고 있었다. 티샤는 아리나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다. 볼륨감 있는 그녀의 몸매와 잘 어울렸다. 민혁이 그녀를 관찰할 동안 티샤는 얌전히 앉아 있었다. 노예각인의 효과를 본 순간부터 단념한 것 같았다.
“흠흠...우선 자기소개부터 할까 나는 민혁이라고 불러 기왕이면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더 좋겠지만”
“......명령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내 이름...티샤...그란데..”
또 다시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 민혁은 냉랭한 분위기에 외형처럼 쿨한 이 아가씨를 어떻게 요리해야할지 고민했다.
“티샤라 예쁜 이름이네..그럼 우선 간단하게 서로에 대해 알아볼까 그래 시작은...네가 왜 노예가 됐는지 이야기해줄래?”
민혁의 말에 티샤는 울상을지으며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민혁은 천천히 하라며 틈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다크엘프와 수인족사이에서 태어난 하프다. 다크엘프들에게서도 천대 받고, 수인족 사이에서도 천대받아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해 산속에 틀어박혀 살며, 자신을 단련했다. 다행히도 그의 아버지인 수인은 암살 실력이 뛰어난 자여서 그에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미 무력자체만으로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바깥세상에 나가자마자 보부상으로 위장한 노예상인들에게 속아 잡혀버렸다.
“하하하 겨우 술 한 병에 기절해 버린거야?!”
“..으으으...어쩔 수 없었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티샤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민혁은 귀를 추욱 늘어트리고 어버버 거리는 그녀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다. 자리와 자리 사이 거리가 꽤 있기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의 손이 티샤의 은빛 머리카락 위로 올라가려 하자 순간 그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민혁은 그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 잠시 그대로 멈췄다. 이내 티샤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쓰다듬에 어쩔 수 없이 응하는 것만 같은 형태였다.
“머릿결이 좋네”
“......”
그녀는 머리가 쓰다듬어지는 동안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붉히며 적안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자 그럼 다음 문제 널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마음껏 머리를 쓰다듬은 민혁은 제 자리에 앉아 말을 꺼냈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수동적인 그녀의 태도에 민혁은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에 티샤는 귀를 파닥거리며 움직였다.
“좋아..티샤 앞으로 넌 아리나의 호위를 맡아”
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엘프임에도 인간 남자에게 호감을 품은 그녀에게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지만 아리나는 난생처음 자신에게 조건 없는 호의를 배풀어준 엘프였다. 게다가 눈앞의 인간 남자가 자신을 산 이유도 그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이 남자에게 사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바닥에 기어 다니며, 배불뚝이 귀족의 정액을 받아먹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리나는 사실상 그녀의 은인인 셈이다. 그녀가 아리나를 지킬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그 말 정말인가?”
“무슨 말?”
하울과 아리나가 샤워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던 민혁은 아리나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둥했다.
“...그....”
“뭔데 말해봐 답답하게 우물거리지 말고”
“..그...성적인 부분을 강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이냔 말이다!”
티샤는 구릿빛 얼굴이 붉게 변할 만큼 부끄러웠는지 큰소리를 내고 테이블에 고개를 쳐박았다. 민혁은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서 키득거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그녀는 발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민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뭐라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제 자리에 앉아 시선이 겹치지 않게 고개를 모로 돌렸다. 민혁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남아일언중천금(男?一???)”
민혁의 말에 티샤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쳐 금세 다시 시선을 돌렸지만 찰나 보였던 그녀의 눈에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무대륙의 말인데.. 남자는 약속한 한 마디의 말을 중히 여겨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이야.”
“.....그럼...”
“그래 속고만 살았냐 안 건드려”
물론 그녀가 애원한다면 땡큐하고 받아들이겠지만 하울보다 먼저 그녀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민혁은 도시락이 있다고 하면 맛있는 반찬부터 먼저 챙겨먹는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눈앞의 티샤보다 샤워실 안에서 룰루랄라 몸을 닦고 있는 하울이 더 먹고 싶었다. 힘든 공략이 되겠지만 그만큼 그녀를 자신만의 포로로 만들었을 때 성취감도 높을 것이다. 그의 말에 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단 같이 지낸 동안 그는 다른 인간들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지배자였고, 그녀는 피지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티샤 그란데는 그를 믿을 만 하다 여겼다.
하얀 벽과 금색의 수실로 점칠이 되어진 방, 보기만 해도 신성하다고 느낄만한 조각상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아이지스 왕국의 국교인 전쟁의 신 튀랑의 신전이었다. 조각상 앞에서 하얀색 베일을 뒤집어 쓴 남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광기에 휩싸인 남자 애드민이었다. 그의 뒤로 사제 복장을 한 남자가 자리했다. 그는 성수를 손에 묻혀 애드민의 머리에 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신도님의 말에 한 치의 미혹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십니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제였다. 그는 낮지만 침착하고, 따스한 목소리를 냈다.
“물론입니다. 저 애드민 살면서 신의 이름 앞에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드민은 자신의 신념을 묵묵히 관찰하는 선지자처럼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성스러운 일련의 그것과 같아 애드민은 흠칫 놀랐지만 기도를 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제는 다시 한 번 애드민의 머리 위로 성수를 떨어트렸다.
“좋습니다..이단(??)에게는 징벌만이 있을 뿐......”
사제는 반개하였던 눈을 뜨고, 성수가 묻었던 손으로 이마에 그려진 문양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성흔(??)이었다.
약속했던 3일의 시간이 지나고, 민혁 일행은 고블린 샤일록을 만나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 아리나의 호위를 맡은 티샤도 일행의 뒤에서 조용히 따랐다. 그녀는 이미 민혁에게 대성전에 침입하기 위한 계획을 들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미친짓이라며 반대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것이다. 아무리 다른 노예처럼 심한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어찌됐건 지금 그녀의 본질은 노예인 것이다. 주인이 가자고 하면 가고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의 옆에 눌러 앉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녀는 2일간 아리나와는 제법 친해져 단답이지만 대화도 나누었다. 하지만 하울과는 첫 만남 때문인지 상성이 맞지 것인지 시종일관 툭툭거리며 싸우기 바빴다. 일행은 여관촌을 지나 번화가에 접어들었다. 민혁은 샤일록의 가게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샤일록이 문 밖에서부터 버선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혁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 했다. 기겁한 그가 잡아채지 않았다면 번화가 한가운데서 고블린의 절을 받았을 것이다. 엉거주춤 땅바닥에서 일어난 샤일록은 민혁들을 자신의 가게로 이끌었다.
“케륵케륵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아니..민혁님!”
자리에 앉자마자 입 밖까지 튀어나온 마라는 글자, 샤일록은 민혁의 매서운 눈빛에 마왕님이라고 그를 호칭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그리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찾기 쉬웠어”
“그거 다행입니다”
“이 고블린 정말 인간 말을 잘하잖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샤일록을 바라보던 하울은 그가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하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관찰했다. 티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샤일록은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그녀들이 마왕님의 첩정도로 보였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나가 실례라며 하울을 제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나만 가지고 그런다며 투덜거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미안해 좀 정신이 없는 애라서”
민혁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정신 있거든! 애 아니거든!”
발끈한 하울은 이마에 사거리 마크를 매달고 소리쳤다.
“......”
중간에 낀 샤일록은 식은땀을 흘리며 민혁이 생각보다 유쾌한 마왕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샤일록은 일행에게 차를 내주었다. 홍차 향이 방 안을 가득채웠다. 아리나와 티샤는 홍차 향을 맡으며 굉장히 즐거워했다. 아리나야 얼굴에 기뻐하는 것이 나타났지만 티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귀를 파닥거리며 자신의 기분을 나타냈다.
“우선 모든 준비는 마쳐놓았습니다.”
샤일록은 마시던 찻잔을 우아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하울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빛냈지만 대인배 고블린씨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고마워 너한테도 부담이 많이 됐을텐데..”
“아닙니다! 전 마...아니 민혁님을 도울 수 있다면 불에라도 뛰어들 수 있습니다!”
샤일록은 민혁의 말에 당치 않다며 소리쳤다. 광신도다. 민혁과 여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울은 더 나아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친절한 고블린씨는 일행들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대성전 잠입 계획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간단한 작전이었다. 샤일록이 왕성에 식재료를 납품할 동안 민혁들은 일꾼으로 변장해 식재료를 옮기는 척 하다 대성전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샤일록은 계획을 위해 귀족에게 돈을 찔러주면서까지 일부로 식재료 납품 시간을 저녁 시간대로 바꿨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우리가 만약 베르할렌을 드는 것에 성공하면 네 입장이 난처해질지도 몰라 정말 괜찮겠어?”
“케륵케륵 괜찮습니다. 애초에 곧 의뢰 때문에라도 아이지스 왕국을 뜨려고 했습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샤일록, 민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해줄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그는 인벤토리에서 금덩이 몇 개와 보석들을 꺼내 샤일록에게 주었다. 그는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하지만 민혁이 인상을 쓰자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넙죽 받아들였다. 하울도 장난스레 영주에게 받았던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주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티샤는 일행의 일과 상관없이 홍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홀로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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