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전초
* * *
식사가 나오고 스프를 입안에 떠넣었지만 시선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 깊숙히 타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 이었다. 적의 목을 베었을 때도 반란분자들의 수장을 고문 했을 때도 지금의 아내와 만났을 때도 느낄 수 없었던 감정 이었다. 그녀가 과일을 한 번 베어물 때 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빛나는 별빛보다 아름다운 눈이 그에게로 향했고, 세이렌보다 매혹적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애드민은 눈을 감았다. 빛나는 그녀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더러운 눈이 새까맣게 타버릴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기?”
그녀는 애드민이 다가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고 서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드민은 가까이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자 전쟁의 광기에도 붉히지 않던 얼굴을 난생 처음으로 붉게 물들였다.
“함,함께 식사를......!!”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용기를 냈다. 적의 대군 앞에서도 떨리지 않던 목소리가 절로 떨려왔다.
“식사요?”
“네! 꼭 부디......!”
그녀 아니 아리나는 돌연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밥을 먹자고 하자 살짝 당황했지만 그의 눈빛이 악한의 그것은 아니었기에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우선 자신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방에서 식사를 하고 배가 차지 않아 시켰던 과일들이 뼈만 남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세 끼를 연달아 먹어 배가 꽉 찬 상태였다.
“아.. 미안해요”
아리나는 괜스레 미안한 표정으로 거절의 표시했다.
“.....실례했습니다”
애드민은 아리나의 말을 듣고, 울것 같은 표정으로 2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리나는 왠지 모를 미안함에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 했지만 하울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맞이해주었다.
“아까 걔는 누구야”
하울이 아리나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흥 몰라도 돼요~”
아리나는 삐진 척하며, 콧바람소리를 냈다. 하울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빵빵하게 부풀은 볼을 콕하고 찔렀다. 아리나는 뭐하는 거냐며 성을 냈다. 하울은 히죽 웃더니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람 핀 거 민혁한테 이른다?”
“힝 이르지 마요....모르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결국 아리나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하울은 키득거리며 울상을 짓는 그녀의 볼을 쭈욱쭈욱 좌우로 늘리며 아직 앙금이 남은 아리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종업원에게 케이크를 하나 시키려했지만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과일들을 시체를 보고 그만두었다. 한편 아리나에게 거절당하고 자리를 피해 2층 자신의 숙소로 올라온 애드민은 열이 나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찬 물을 가득 퍼서 세수를 했다.
“하아..하아..”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애드민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떠올리기만 하여도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고, 얼굴에는 피가 몰렸다. 이 감정이 무엇일까 애드민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해냈다. 아직 어렷을 적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애드민은 이 감정을 느껴보았다. 어머님의 손길 한 번 한 번에 마음이 풍요로워졌고,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아버지에게 혼나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날 고드름처럼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 때 그는 어린아이의 치기로 어여쁘기 그지 없던 어머님에게 반드시 당신과 결혼하리라 그렇게 말했다.
‘사랑....’
그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부정했다. 기사이자 영주인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그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5만명에 달하는 영주민들의 어버이였다.
부정
부정
부정
부정...하려 했으나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졌고,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는 방을 나와 2층 난간에 서서 1층을 내려다보았다. 이름도 묻지 못한 그녀는 일행으로 보이는 여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혹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을 때면 심장이 욱씬거릴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름답구나... 더러운 이민족의 피가 묻은 더러운 내 손과 눈동자로는 닿을 수 없을치 만큼...’
조금만 더 손을 뻗는다면 닿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고개를 흔든다. 찬란하게 빛나는 저 여신님과 난 어울릴 수 없다. 애드민 백작은 그렇게 단정했다. 그 때 여신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키가 크고 반반하게 생긴 기생오라비가 다가왔다. 애드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얼굴만 반반하다고 여신님을 꼬실 수 있을 리가 없다. 나 또한 그럴 수 없었으니 너 또한 불가능하다. 애드민은 그리 생각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어째서!’
그녀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향해 해맑게 웃어주었다. 게다가 팔을 벌려 그에게 다가가 먼저 안기기까지 했다. 애드민은 절망에 빠졌다. 이름 모를 여신님이 저런 바람둥이 같은 놈의 손에 빠지다니 이가 갈렸고 치가 떨렸다. 그의 눈에 광기가 들어찼다. 허리에 찬 명검을 꺼내 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놈의 목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저 얼굴을 좀 더 지켜주고 싶었다. 미혹에 빠진 그녀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뭉치고 뭉쳐 애드민 백작의 광기와 살기가 민혁에게 폭사되었다.
샤일록과 3일후 만나자고 대화를 나눈 민혁은 하울과 아리나의 기감을 느끼며 둘을 찾았다. 그는 한참을 해매 자신을 반기는 아리나의 품에 안겼다. 풍만한 젖가슴이 그의 가슴 가득 느껴졌다. 민혁은 헤벌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리나도 그에게 팔짱을 끼고 싱글벙글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닭살 못 봐주겠네”
하울은 자신의 두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히히.. 부러우시면 하울님도 애인을 만드세요!”
아리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이익.. 너..에휴 그만두자 그만둬”
하울은 그녀의 반격에 이를 갈았지만 아리나가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더 공격하는것을 멈추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리나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체로 물었다.
“아.. 먼저 먹었어 아리나는?”
“전 하울님하고 같이 먹었어요”
둘의 대화를 듣던 하울은 나는 보이지도 않냐며 성을 냈다. 민혁은 매몰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리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하울은 부르르 떨더니 종업원에게 술을 주문했다. 민혁도 메뉴판에서 적당한 도수의 과일주를 하나 주문하고 안주를 부탁했다.
“방은 잡아놨어?”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종업원을 보며 아리나에게 물었다.
“네 3인실로....”
아리나는 하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뭐 왜 3인실로 했어?”
민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하울은 히죽 웃으며 여행을 다닐 때는 원래 일행이 모두 같은 방에서 자야한다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민혁은 아리나와의 즐거운 밤을 위해 종업원을 다시 불러 3인실 방을 2인실 하나와 1인실 하나로 바꿔달라고 말했다. 2인실은 303호였고 1인실은 302호였다.
“자 받아”
민혁은 하울에게 302호실 키를 건내주었다.
“아니 왜 나한테 이걸 줘?!”
민혁은 결혼도 안한 남녀가 단둘이 자는 것은 안된다며 화를 내는 하울의 입에 테이블에 남아 있던 빵 한 조각을 쑤셔넣었다. 하울은 억울한 마음에 빵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민혁은 좀 더 큰 빵조각을 채워 넣어주었다. 결국 하울은 방에 대한 불만을 다 말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빵에게 졌다고 한탄하는 하울을 내버려두고 말캉말캉한 아리나의 감촉을 느끼던 그를 찌릿하게 옥죄는 살기, 하울도 느꼈는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둘은 살기가 폭사되는 2층 난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말끔하게 생긴 기사복장의 남자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민혁은 그에게 원한을 산 적이 있나 생각해 보았지만 그같은 얼굴은 본 기억이 없었다.
‘뭐하는 놈이지?’
이유 모를 시비에 미간에 찌푸려졌다. 민혁은 그를 지켜보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극한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야릇한 눈빛으로 민혁의 팔짱을 끼고 있는 아리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읽은 민혁은 화를 참지 않고 음양오행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기운을 흩뿌렸다. 오행의 힘이 그의 주변에서 일렁였고, 음양은 그를 압박했다. 버티고 있던 그는 끝내 머리에 달라붙은 화(火)의 기운에 기겁하고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하울은 민혁에게 엄지 손가락을 쫙 펴주었다.
“어휴”
민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한숨을 내뱉자 아리나가 왜 그러냐며 그의 품에 더욱 깊숙히 달라붙어 왔다. 민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녀를 달랬다. 분명 천사님의 마음과 상관 없이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한 망종일 것이다. 민혁은 아리나의 말랑말랑한 볼을 쓰다듬으며 이것도 다 이쁜 여자친구를 둔 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기사복장을 하고 있던 자인 만큼 후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니 일단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때 마침 종업원이 주문했던 술들과 안주들을 내왔다. 민혁은 아리나에게 먼저 한 잔 따라주고 하울에게도 따라주었다. 민혁이 혼자 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자 하울이 술병을 잡아채 민혁의 잔에 따라주었다.
“어때 미녀가 따라주는 술 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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