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전초
* * *
하울은 옆에 있는 민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영주는 그녀의 시선을 읽었다. 하울이 데려온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영주는 ‘우리 천하무적 기사단장님도 결국 여자였군!’이라 외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민혁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고개를 숙인 채로 이마를 찌푸렸다. 하울에게 연기를 부탁받기는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주는 한바탕 크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남자 시종은 큰 주머니와 검을 한 자루 들고 왔다.
“받게나”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와 검을 하울에게 다가와 직접 건내주었다.
“이것은?”
하울은 영주가 준 주머니와 검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그동안 부족한 내 아래서 일해준 것에 대한 선물일세..”
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하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허리를 피려 했지만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영주의 등이 꽂꽂히 펴졌다. 그는 힘든 기색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하울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영주가 가신 앞에서 등을 숙여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영주는 피안대소 하더니 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영주는 둘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 하울이 문 밖으로 나서려 하자 페일의 어미 노릇을 해준 것 정말 고맙네라고 조용히 말했다.
“아까 그 영주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야?”
문을 나선 둘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어색한 분위기, 민혁은 하울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뭔 소리야 그건?”
하울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그게 페일의 엄마 노릇을 했다고 해서...”
한숨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하울의 것이었다.
“..하아....페일은 어렷을 적에 어머니를 잃었어 당시에 영주에게 충성맹세를 한 나는 검술선생 노릇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지 그 뿐인 이야기야.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겠지 ... 아아~ 이곳도 이제 안녕이네 꽤나 마음에 들었는데..”
어느새 지하수련실로 향하는 복도 입구에 도달한 하울은 푸념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이곳에...”
그의 말이 막혔다. 하울이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너 바보구나”
“실례네!”
민혁은 그녀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울은 작게 웃으며 그를 바보라고 부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페일이 자신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 똑부러진 그녀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유희 중 정체가 발각된다면 증거인멸을 위해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조리 참해야한다. 그것이 드래곤의 유희 규칙이다. 하지만 그녀는 페일을 살리려고 한다. 그렇다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다. 그녀의 목숨을 취하지 않으면서 하울의 정체를 모르게끔 하는 방법, 한 가지 뿐이다.
“기억을 지울 거야?”
“아니 거기까지는 하지 않아..어차피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 페일 하나니까 그 아이에게 부탁해야겠지 날 잊어달라고......”
“......”
그녀의 말에 민혁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부터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하울은 피식 웃고,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괜찮다 말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전혀 괜찮은 표정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을 읽은 수는 없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미련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정이 많이 들었었어?”
“그럼 무려8년이나 같이 있었는걸 그 아이에게 검도 가르치고, 예절 교육도 해주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많은 일이 있었네”
“드래곤에게는 8년이면 짧은 거 아닌가?”
“글세 그건 아닌 것 같아 드래곤으로써는 8년이야 동면 한 번이면 먼지와도 같은 시간이지 하지만 인간으로써 8년이면 나한테도 굉장히 긴 시간이야. 같이 먹고,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정말 즐거웠어..”
그녀의 말에 민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리나에게 듣기로 하울은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유희 나가기를 꺼려하는 히키코모리 끼가 있는 드래곤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혁이 보기에 그녀는 유희를 꺼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희를 그 어떤 드래곤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희가 끝난 후 인간관계가 소멸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드래곤인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만년 이라는 장대하고 유구한 시간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그 어떤 생물보다 많은 인연을 만나지만 모순적이게도 가장 외로운 종족,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동족 밖에 없으며, 다른 생물들과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해하기를 이해받기를 싫어한다. 그 수명이 여타 지적생명체들과 다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많은 만큼 잃을 것 또한 많다.
생각에 잠긴 민혁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고, 하울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민혁의 눈빛에서 동정심을 읽은 하울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손을 낚아채 빠르게 걸었다. 민혁도 딱히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민혁과 하울은 손을 잡고 지하수련장에 도착했다. 페일은 아직도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말고 쪼그려 앉아 다리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인기척에도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아 잠에 빠진 것 같다. 하울은 피식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페일”
하울의 그녀의 이름을 상냥한 목소리로 불러주었다.
“.....단장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페일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잠에 덜 깨서 눈이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는 눈가를 비비더니 하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민혁을 발견했다. 볼을 꼬집었다 분명 아픔이 느껴졌다. 페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장님!”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한 그녀는 우다다 달려서 하울의 품에 안겼다. 그녀도 페일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말만한 처녀가 달려드니까 나도 힘에 부친다”
“단장님...단장님..”
평소와 같다면 하울의 놀림에 페일은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울의 품에서 얼굴을 비빌 뿐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여자의 감을 역시나 예리했다. 슬픈 이별을 직감이라도 하듯 그녀는 하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울도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페일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페일 내가 널 만난지 몇 년이나 됐지?”
하울은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고 물었다.
“...8년이요...”
페일은 그녀에게서 떨어지기 싫어 아등바등 몸을 비볐지만 소용없었다. 페일은 추욱 늘어져 하울의 질문에 조용히 답했다.
“그래 꽤나 오래됐네... 처음 봤을 때는 허리까지 밖에 안 오는 꼬맹이였는데 말이야.. 어느새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는지 원..”
“아니에요...훌륭하지 않아요”
페일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야 넌 훌륭해 내가 널 가르칠 때 말로만 떠든 것을 실천했잖아 병사들과 기사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은 니가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이제 너 혼자라도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제 곁에서 절 걱정해주세요! 제발... 제발...혼자라는 말은 하지말아주세요..!”
애원하는 페일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울은 생긋 웃으며,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이윽고 페일의 눈가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 흘렸다. 하지만 절대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게 하울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했다.
“......”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혁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이쯤에서 부외자는 퇴장해주는 것 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하수련장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기를 몇 분 하울이 뭔가 개운한 표정으로 올라왔다. 그녀 혼자였다. 민혁은 페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위로해주는거야?”
그가 내민 손을 하울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받아주었다.
“시끄러워.. 필요 없으면 그냥 간다”
남자 츤데레는 사도라 했다. 민혁도 알고있지만 부끄러움에 한 번 튕겨보았다.
“성급하긴... 필요하니까 손 내놔”
둘은 손을 잡고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페일을 만난 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문을 빠져 나갈 때까지 마주친 기사들과 시녀들 병사들까지도 그녀에게 예를 취하거나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어느 틈에 마법을 사용한건지 모르겠다. 민혁은 하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 매달려있었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유쾌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톨킨으로 돌아왔다. 하울과 민혁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아리나가 폭발 하긴 했지만 덕분에 하울의 얼굴에서 슬픈 기색이 많이 사라졌다.
아이지스 왕국은 예로부터 기사들의 나라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반증으로 건국왕인 레이건도 기사신분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며, 대륙에 5명뿐인 소드 마스터 중 무려 두 사람이 아이지스 왕국에 속해있다. 기사도와 무구 수련에 힘을 쏟는 나라 아이지스 왕국 근방으로는 툰드르 왕국과 코로나 제국이 위치해 있다. 툰드르 왕국과는 예로부터 혈맹을 맺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으나, 최근 국경에서 빚은 마찰로 인해 냉전 상태다. 반면 코로나 제국은 잦은 국경 침입으로 인해 사이가 썩 좋지 않았지만 근래 무역세 인하, 교세감면 등 아이지스 왕국에 대해 친화적인 정책을 사용해 혈맹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아이지스 왕국의 수도 베르할렌은 수 많은 기사들의 성지 중 하나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전사의 신 튀소의 성소가 위치해 있으며, 많은 기사들이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무대가 갖춰져 있다. 그 덕에 기사왕국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특별히 기사들의 성지라고 여겨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베르할렌 중앙에 꽂혀져 있는 한 자루 검 때문이다.
수도의 이름 베르할렌은 이검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아이지스 왕국의 비보 중의 비보다. 성각검은 드래곤 하트와 신의 금속 아다만티움을 섞은 후 세상 그 무었보다 뜨겁다는 래드 드래곤의 브레스로 직접 주조한 아이지스의 건국왕이자 드래곤 슬레이어 레이건의 검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