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전초
* * *
아리나는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며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어제 먹었던 음식을 비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걷고 있는 동굴의 벽면이 모두 분뇨로 뒤덮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닥조차 리자드맨들의 소변으로 뒤덮인 상황이었다. 천장에서도 오물이 떨어졌다. 민혁은 무려 호신강기를 통해 이를 막았다. 하지만 냄새는 어쩔 수 없이 맡아야만 했다. 후각이 민감한 아리나로써는 참기 힘든 상황이 틀림이 없었다.
[냐아아아앙~~]
물론 파이도 마찬가지였다. 파이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자신의 얼굴을 민혁의 가슴팍에 묻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파이를 끌어안은 민혁은 한숨을 쉬며, 발길을 재촉했다. 아리나도 코를 부여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오른쪽과 왼쪽 민혁과 아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냐앙!]
선택은 파이의 몫이었다. 선택장애인 둘의 고민이 길어지자 파이는 짜증이난 듯 사납게 울며, 민혁의 품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민혁과 아리나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재빨리 파이의 뒤를 쫒았다.
우갸아아
파이의 선택은 정답이었다. 리자드맨들의 부화장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민혁은 등에 매달려 자신이 리자드맨들을 해치우는 것을 구경하는 녀석을 혼내주겠다 다짐했다. 그는 물량공세를 펼치는 리자드맨들의 머리를 하나씩 부숴주었다. 하지만 끝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전사처럼 달려들었다.
케륵케르륵!
핸드 엑스를 들고 달려오는 리자드맨, 민혁은 그의 머리를 허공으로 솟구치게 만들어주었다. 강렬한 죽음에 그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욱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리자드맨들의 손에 들린 것은 가지각색이었다. 농가에서 쓰는 낫으로 보이는 것부터 삼지창에서 검까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멀미가 날 정도였다. 아리나도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자신에게 덤벼드는 리자드맨들을 상대했다.
“끝이 없어요!”
아리나는 볼에 묻은 리자드맨의 초록색 피를 닦으며 말했다. 민혁은 슬슬 짜증이 났다. 큰 기술을 날리면 분명 던전이 무너질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있었지만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냄새와 리자드맨들이 내뱉은 소음에 지친 것이다. 그는 인벤토리에 모셔두었던 단검 무더기를 꺼내 공중에 흩뿌렸다.
“만예어검술(?????)!”
공중에 날아올랐던 단검들은 민혁의 말에 따라 치어들처럼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나운 살쾡이처럼 목표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리자드맨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들의 목에 박혔다. 하나 둘씩 풀썩풀썩 쓰러지는 리자드맨들,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흰색기운에 휩싸인 날붙이가 번쩍할 때마다 동족들이 하나씩 죽어나갔다. 리자드맨들은 공포에 빠졌다.
[냐앙~!]
심지어 파이의 울음소리 한 번에 주저 앉은 리자드맨들도 있었다. 민혁은 한심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후를 선사해주었다. 순백의 강기 싸인 단검들은 폭격하듯 리자드맨들을 향해 날아갔고, 그들은 피할 새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우욱...”
시체조각들이 널부러져 있고, 핏자국들이 낭자된 던전 아리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민혁도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진정되자 민혁은 아리나를 파이와 함께 안전한 장소에 두고 리자드맨들이 지키던 둥지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투명한 색의 알들이 잔뜩 있었고, 점액질들 사이로 꼬물꼬물 알을 깨고 나오는 리자드맨의 새끼도 보였다.
그리고
“......!”
그 리자드맨 새끼들이 태어난 알을 낳고 있는 이종족 여자들을 발견했다. 그녀들은 알몸이었으며, 만삭의 임산부처럼 부른 배를 초록색 점액질로 포박당한 채 리자드맨의 것으로 보이는 정액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엘프에서부터 오크, 고블린까지 번식이 가능한 종족들은 모두 모아놓은 것 같았다. 민혁은 분노에 차 그녀들을 포박하고 있는 점액질을 걷어냈다.
털썩
힘없이 바닥에 몸을 떨어뜨리는 여자들, 민혁은 서둘러 그녀들의 상태를 살폈다.
“제기랄!”
그녀들은 모두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그녀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해가며, 알을 낳은 것이다.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콰앙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참격을 날려 벽에 붙어있는 리자드맨들의 알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뒷목이 뻐근해졌다. 게임인 것을 알고 있지만 원초적인 분노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민혁님 무슨 일이에요?!”
“......”
민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나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참격이 낸 파공성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그는 말 없이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아리나는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고 이해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파이도 그의 머리 위에 올라와 앞발로 머리를 토닥였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냐냥!]
아리나는 민혁의 손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민혁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이제 괜찮아...파이도 고맙... 아, 아니다.. 안 괜찮아.. 그런 이유로 아리나의 가슴을 만지게 해주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은데”
“정말 민혁님도 참 변태라니까요~”
퍽
오른팔에 돌로 맞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민혁은 아리나의 앙탈에 식은땀을 흘리며, 이제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종족 여자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참한 몰골,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을까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미워져 왔다. 그는 그녀들을 화장시켜주기로 했다. 유족이라도 찾아주고 싶었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좋은 곳으로 가길”
작은 삼매진화는 민혁의 손 안에서 커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여자들의 시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시체들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던 민혁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시체들 중 인간의 시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퀘스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분명 퀘스트에선 팅거의 딸이 개미굴에 잡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흥분 때문에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못한 것을 아닐까 생각되어 다시 한 번 부화장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
부화장 구석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소녀를, 브론즈 컬러의 그녀는 다행히도 아직 리자드맨들의 능욕을 당하기 전으로 보였다. 민혁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히익!”
그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는 몸을 더 심하게 떨기 시작했고, 괴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민혁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눈으로 보고 겪을 뻔 했으니 수컷이라는 개체 자체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아리나에게 그녀의 상태를 살펴 봐달라 부탁했다.
“알겠어요..”
아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팅거의 딸은 아리나가 다가가자 몸을 떨기만 할 뿐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리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로브를 벗어 덮어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달래주었다. 민혁은 던전을 클리어 했음에도 입 안이 매우 썼다
“소니아!”
팅거는 죽은 줄 알고, 포기했던 딸의 얼굴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눈을 비볐다.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닐까 악몽은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몇 번이고 바래왔던 것이었다. 가게 앞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딸의 모습, 팅거는 양 팔을 벌렸다.
“아.....아,아버지!”
소니아가 팅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는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아리나와 민혁은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부녀간의 해후를 끝내고, 팅거는 딸을 찾아준 은인을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찾아와 희망을 심어준 이들이었다. 그 때의 무례를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팅거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어어!”
아리나는 그가 무릎을 꿇자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반면 민혁은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팅거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 최고의 장신구를 만들겠습니다.”
장신구 장인 팅거의 우울
아이지스 왕국에서도 소문이 난 장신구 장인 팅거의 딸이 얼마 전부터 행방불명이 되었다. 던전 개미굴에 납치된 팅거의 딸을 찾아 그를 달래주도록 하자
퀘스트 성공: 팅거의 딸 구출
퀘스트 보상: 팅거의 혼이 담긴 장신구
한편 민혁이 떠나간 후 개미굴
검정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개미굴에 나타났다. 그는 민혁에게 파괴당한 부화장을 훑어 보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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