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전초
* * *
몸단장을 끝낸 그는 쇼파에 철퍼덕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부재중 통화 2통
한 통은 소윤이었고, 다른 한 통은 장인어른이었다.
“무슨 일이래 먼저 전화도 안하는 양반이?”
소윤에게는 1시간 정도 뒤에 그녀의 오피스텔로 찾아간다는 문자를 남겼다. 민혁은 일단 이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익숙한 트로트 곡이 흘러나왔다. 겉모습은 한창 잘 나가는 40대 미남 미남 배우 같은데 곡 선곡은 60대 취향이었다.
“장인어른~”
[누가 니 장인어른이야!]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나..’
전화 너머까지 그가 성을 내는 것이 느껴질 만큼 이범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혹시 핸드폰 스피커가 찢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민혁은 일단 통화를 종료했다.
뚜르르르르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민혁은 이걸 받아 말아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눌렀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그러자 이범의 거친 호흡이 들렸다. 많이 화나셨나.. 민혁이 사과를 하려고 하자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큰 목소리로 ‘끊지마!’ 라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후우..후우...]
“진정하시구요.. 한 번만 더 소리치면 전화 또 끊습니다?”
[이이...빌어먹을 놈이...]
“좀 진정이 될 때까지...우리 서로 전화는 하지 않는 걸로...”
[지금 전화 끊으면 정말 쫒아가서 죽여 버릴꺼다!]
“에휴... 빨리 용건이나 말해보세요 평소에는 전화도 안하다가 왜 갑자기 전화 했어요?”
[혹시 지금 아름답고 귀여운 우리 딸이랑 같이 있냐?]
“아뇨 저 집에 혼자 있어요”
[또 게임이나 하고 있었겠지!]
“전화 끊습니다?”
[끊지마!]
민혁은 이범이 소윤의 거취를 묻자 오피스텔에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오피스텔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없었다고 한다. 전화도 받지 않은 상태이고, 민혁도 이범의 말에 내심 불안해졌다. 혹시나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핸드폰에 표시되었던 부재중 통화도 마음에 걸렸다.
“그럼 저도 찾아볼게요”
[음...알았다..그리고 찾게 되면 내가 미안하다고 꼭 전해줘라]
“그럼 그렇지 소윤이가 괜히 전화를 안 받는게 아니지 아저씨가 뭔 짓을 했으니까 안 받는 거겠죠..혹시 설마...?”
[닥치고 찾아보기나 해 그리고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민혁은 탁자에 앉아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소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대기화면이 보이고, 벨소리가 울린다. 사귄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바뀌지 않는 벨소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중 인생의 회전목마라는 곡이다. 걱정되서 그런지 오늘 따라 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응? 들리는 것 같은 게 아니라....설마...”
민혁은 자신의 전화기 음량을 완전히 줄이고, 벨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향했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손님방 가끔씩 봉국이 자고 가서 꾸며 놓기는 했지만 침대 밖에 없는 방이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는 소윤이 이불을 돌돌 말고 잠에 취해 있었다. 침대 아래 여행용 가방까지 있는 걸 보니 이범과 단단히 싸운 모양새였다. 무슨 일 때문에 이 착한 아이가 집까지 나온 걸까 나중에 이범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줘야 겠다 다짐한 민혁은 그녀가 깰 새라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자는 모습도 예쁘네...매일 아침 보고 싶을 정도야.”
침대 모퉁이에 앉아 자고 있는 소윤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움찔
‘응? 요거 봐라?’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몸이 움찔거린다. 깨지 않게 조심한다 했지만 아마도 깨어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그는 볼을 쓰다듬다 점점 아래로 손을 내렸다. 목선에서 쇄골로 그리고 잠옷 속으로
“....그만해..”
탁하고 소윤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동굴 탐사에는 실패했지만 민혁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겨주었다.
“일어났어?”
끄덕
얼굴을 새빨갛게 붉이며,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폭력과도 같은 귀여움에 민혁은 이걸 덮쳐 말아 고민하다 오늘은 본능보다 이성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불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싱글용 침대라서 둘이 눕기에는 비좁았다.
“집에는 언제 들어왔어?”
“...어제...저녁..”
“깨우지 그랬어?”
“...일...하고 있는 거니까..심심해도..참았어”
“아이고~ 귀여운 녀석!”
“...달라..붙지마...좁아..”
아니나 다를까 소윤은 자신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포기할 민혁이 아니었다. 그녀가 밀어내던 말든 그녀를 배개처럼 껴안았다.
“소윤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불렀다. 소윤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 귀여웠다. 민혁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범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급격히 굳어지는 소윤의 표정, 평소 딸 바보끼가 있어 극성인 이범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소윤이기에 그걸 고치기 위해 일부러 냉정하게 그를 대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표정을 굳힐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싸웠길래 이렇게 반응이 싸한걸까
“왜 오피스텔에서 나온거야.. 전화도 받지 않고.. 나도 걱정 했잖아”
애정어린 손길과 말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이대로는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민혁은 가볍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제서야 소윤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맞선을..”
그녀답지 않게 민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소윤의 말에 그는 당장 일어나 이범에게 전화를 해 육두문자를 날려주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소윤은 꿈틀거리며, 그에게 포옥 안겼다. 잠시 서로의 온기를 느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관계 전 전희를 위한 키스가 아닌 애정 확인을 위한 키스였다.
“어쩔 수 없는 맞선이라면 봐도 괜찮아.. 어차피 넌 내꺼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 결혼하자고”
서로간의 애정을 확인한 후 껴안은 상태에서 민혁의 말을 듣게 된 소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흘리려고 하자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왜, 왜 그래 결혼은...싫어?”
“...아냐..훌쩍..그게..기뻐서..너무 기뻐서 으아아아앙~”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난처해진 민혁은 그저 그녀를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품에 안겨 30분을 울고서야 겨우 진정이 됐다. 소윤을 진정시키고 민혁은 이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맞선 이야기를 꺼내자 이범도 찔리는 게 있는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미안하다 전해달라고만 말했다. 그 후가 전화를 건 본론 이었는데 ‘소윤이를 주십시오 장인어른!’ 이라고 말하자 고막이 터질 뻔한 건 여담이다. 그렇지만 이범도 부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수락이라 여겨도 좋으리라 민혁은 한 가지 소득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민혁도 이범이 재계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인 소윤이 처한 상황도 이해 하고 있다. 그리고 친분을 위한 자녀의 교류라는 어른의 사정들도 알고 있다. 그는 울다 잠든 소윤을 일으켜 빠르긴 하지만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해도 되는데..”
“괜찮아 앉아 있어 요즘은 요리 하는 남자가 대세라며?”
저녁은 간단하게 북엇국에 두부조림으로 떄우기로 했다. 민혁은 주로 소윤이 음식을 하면 얻어먹는 포지션이었지만 이번에는 솜씨 발휘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저녁밥은 금방 완성됐다. 멸치 육수팩도 있었고, 두부조림이야 워낙에 금방 하는 요리니까 냉동고에 있던 고등어 자반을 굽고 냉장고에서 평소 먹던 반찬을 꺼내니 식탁이 풍성해졌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밥 많이했어.”
끄덕
식탁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민혁은 싱글벙글 시종일관 미소 띈 얼굴이었고 소윤은 밥은 먹지 않고 계속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얼굴이 상기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배가 고팠는지 양 볼이 빵빵하게 밥과 반찬을 밀어 넣는 모습이 민혁은 너무 예뻣다. 간혹 소개팅을 나가보면 음식을 깨작깨작 먹는 여자들이 있는데 민혁은 그런 모습은 영 보기 싫었다. 한 끼를 먹더라도 만든 사람 정성을 생각해 먹어준다면 밥풀이 볼에 묻어도 여자가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는 이런 사소한 점에서도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을 정확히 160km 직구로 꽂아 넣는 소윤이 좋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