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전초
* * *
호령은 신녀의 도발에 보기 좋게 넘어 갈 뻔 했지만 사윤의 제재로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자리에 고정했다. 신녀는 뭔가 아쉽다는 듯 소리 없이 혀를 찼지만 면사로 가려진 얼굴 탓에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여러모로 정무맹에서 보았던 냉막한 그녀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아아~ 괜찮아 먹어봤는데 맛있기만하네 독 없어~”
한참 음식을 흡입하던 민혁이 둘의 대화를 듣고 말했다.
“이잇...!”
사윤은 눈치 없는 남자의 태도에 이를 갈았고
“호호 그거 다행이네요~”
신녀는 비웃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면사 때문에 얼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회장에 있는 전원은 모두 그렇게 느꼈다. 민혁의 개입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약간 풀렸다. 그간 신강에서 먹었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던터라 모란과 사윤 그리고 호령까지 일단 자존심을 접어두고 차려진 음식들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포식이다냐아~”
“그러게 배가 터질 것 같아”
긴 듯, 짧은 듯 한 환영식이 끝나고 일행은 가득찬 배를 쓰다듬으며 나른함을 즐겼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신녀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혁을 보며 한쪽에 준비해 놓았던 다기들을 챙겨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음식들 자체가 느끼했기 때문에 민혁은 그녀가 내주는 차를 기대했다. 주변 여인들도 은근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손은 미려한 선을 만들며 한 잔, 한 잔 차를 내었다. 처음 잔은 민혁의 앞에 두 번째 잔 부터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이 순으로 차를 내어주었다.
잠시 동안 연회장의 모두는 말 없이 차를 즐겼다.
“과분한 환영인사도 받았고 이제 본론을 좀 들어보도록 할까?”
“어머 과분하다니요... 뭐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면 감사합니다만.. 성격이 약간 성급하신 편이신가요?”
신녀가 입을 가리며, 장난스럽게 묻자 민혁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다른 여인들도 따라 나서려 했지만 신녀의 제지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연회장을 나와 길을 안내했다. 흑단목으로 지어진 연회장을 지나 평소 생각했던 천마신교와의 이미지와는 다른 가지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지나 어느 방에 도달한 신녀는 문을 열고 그에게 들어가라 손짓했다.
“여자 방 치고는 좀 횅한데?”
“무례한 사람..실례에요...아니 그보다 어떻게 제 방인걸...”
민혁의 말처럼 그녀의 방에는 흔하디 흔한 거울 하나 없었다. 분첩이라던지 치장을 위한 도구 또한 없었다. 방에는 침대와 옷을 보관하기 위한 가구장 밖에 없었으니 여자의 방이라고 보기에는 99%부족했다. 신녀도 그걸 아는지 민망해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신기한듯 방을 구경하는 그를 내버려두고 침대 해드 뒤쪽을 뒤적거리더니 숨겨진 장치를 작동시켰다.
쿠구궁
“오옷 침대가!”
그러자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침대가 아래로 푹 꺼져 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 지하로 향하는 것 같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만든 장치 같았다. 신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횃불에 초절정 고수의 증표인 삼매진화로 불을 일으키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민혁도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길이가 꽤 되는데...어디까지 내려 가는 거야?”
“역시 성격이 급하시군요..조금만 더 가면 된답니다.”
끝 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민혁이 묻자 신녀는 나무라는 듯한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민혁은 ‘다 그러더라 조금만..조금만..’ 투정을 투리면서도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10여분 정도 암흑이 좀 먹은 듯한 계단을 내려갔을까 드디어 끝이 보였다.
“......검으로 세긴 건가?”
계단의 끝에는 폭 5m 높이 4m는 되어 보이는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철문에는 한 마리 마귀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투박하기 그지 없었다. 민혁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철문이 소음을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어어...왜이래! 난 아무짓도 안했다고! 아니 건드리기는 했지만!”
“괜찮습니다. 별 일 아니거든요 단지 문이 열리는 것 뿐이에요..”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민혁, 그의 뒤에서 신녀는 안심하라는 듯 말해주었다.
“어머.. 그런데 생각보다 겁도 많으시네요?”
“무례한 신녀 실례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민혁, 신녀와 그는 반쯤 열린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 공간도 횃불 없이는 무었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공간 그녀는 익숙하게 들고 왔던 횃불을 벽에 매달았다. 그러자 불은 공간 전체로 퍼져나갔고, 공간의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녀가 안내한 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벽에는 칼로 새긴 이름과 아마도 이름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병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 수가 무려 50여개에 달했는데 민혁은 찬찬히 그것을 둘러보다 공동의 중앙 재단을 발견했다. 그는 재단에서 눈에 익은 물건을 보았다. 두 권의 서적과 한 장의 그림, 그림에는 한 자루의 검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그려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여기로 날 안내한 이유가 뭘까?”
“여긴 역대 교주님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에요.. 천마신교 내에서도 역대신녀들과 교주님들만이 출입을 허락 받을 수 있는 공간이죠”
신녀의 설명에 민혁은 ‘그러니까 왜 여기에 날?’ 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시치미인가요...정말 솔직하지 못한 분이시네요”
민혁은 태연한 태도로 그녀에게 물었다. 신녀는 민혁을 지나쳐 천천히 재단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그림을 들어 그에게 보라는 듯 내밀었다.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검은 민혁도 익히 알고 있는 검이었다. 다름 아닌
“천마신검(????)..”
“이번에는 솔직해 지셨군요?”
민혁이 중얼거리듯 말한 것을 신녀는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 그녀는 천마신검이 그려진 그림을 다시 재단에 올려 놓은 후 그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민혁의 앞에서 무릎 꿇었다. 비단옷이 더럽혀짐에도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천마신검의 외양을 안다고 해서 내 앞에 무릎 꿇을 필요가 있나?”
민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그녀를 착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확인 차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천마신검의 외양을 아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역대 교주들과 신녀들 뿐 그리고 외양만이 아니랍니다. 저는 정무맹에서 느꼈답니다. 천마신공의 기운을 그리고 오늘 연회장에서도 느꼈지요 게다가 천마신검을 소유한 자는 신녀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답니다.”
“그래서...내게 원하는 바는?”
민혁은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신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더니 얼굴을 가리던 면사포를 벗어재꼈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고, 민혁은 정무맹에서 느꼈던 바가 틀린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녀의 정체는 캐릭터생성을 도와주었던 초연이었다. 비록 그녀에게는 당시의 기억은 없겠지만 신녀의 얼굴은 자신이 기억하던 그녀가 확실했다.
“새로운 교주가 되어주세요”
“응 뭐라고?!”
민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교주, 신녀가 천마의 뜻을 받들고 교리를 나누는 자라면 교주는 천마신교의 무를 대변하는 존재, 백만 마교인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다. 교주라 불리는 것으로 마도제일고수라는 타이틀을 얻는 위치, 신녀는 그런 자리를 민혁에게 맡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보통 천마신공을 내놓라던지 근맥을 자른다던지 하지 않아? 게다가 난 외부인이라고 교주가 될 수 없어! 아 ... 또 있네 난 무신이 속한 문파의 문주야!”
당연히 민혁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입 밖으로는 여러 가지 변명 아닌 변명이 쏟아져 나왔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신녀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제가 왜 이런 요청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군요..”
“당연하지 본론부터 말하지 말란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민혁, 그 모습에 초연은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구름 낀 하늘에 해가 뜬 느낌이랄까 캐릭터설정을 도와주었을 때 보여주었던 냉막한 얼굴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 미소에 민혁도 진정이 된 듯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신녀의 이야기는 꽤나 길어졌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현재 마교의 교주가 없다는 말이었다.
“뭐 교주가 없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