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전초
* * *
빙궁주는 서럽다는 듯 히끅거렸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안 그럴께요 그러니까 이름을 알려줘요”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는 민혁, 그제야 빙궁주는 눈물을 완전히 멈추고 키스에 호응해왔다. 다시 엉키는 둘의 입술, 은색 선이 다시금 줄을 이었고, 그녀 또한 웃음을 되찾았다.
“내 이름은 궁설현이야”
입술이 떨어지자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설현....궁설현... ”
민혁은 잊어먹지 않겠다는 듯 그녀, 빙궁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알았어요..앞으로는 그렇게 부를께요 늦었지만 설현... 사랑해요”
“민혁!”
갑작스러운 사랑고백에 궁설현은 두근 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겼고, 다시금 둘의 밤은 시작되었다.
거대한 대전, 목조로 만들어진 건물은 만들어진 연식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저곳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기둥을 칠하기 위해 발라졌던 붉은 염료들은 부스러져 나무 본래의 색을 띄었고, 천장의 조각물들도 세월에 먹혀 제 모습에서 많이 멀어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의 정중앙 흑목(??)으로 만든 용상과도 같은 옥좌는 특유의 흑색을 발하고 있었다. 흑목으로 만든 옥좌에는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나른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 붉은 무복을 입은 남성이 머리를 숙이고 부복하고 있었다.
“건족의 부족장은 당한 것이냐?”
옥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목을 좌우로 흔들더니 부복해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예 제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붉은 무복을 입은 사내는 옥좌에 앉은 사내가 묻자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붉은 사내의 정체는 놀랍게도 건족의 족장 타랍의 곁을 지켰던 그림자 슈만이었다. 슈만은 사내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보았던 것들을 모두 전했다. 민혁이 상급도사를 쓰러트린 일, 독강시들을 재로 만든 일 그리고 흑관의 조각을 모조리 흡수한 타랍을 천마파천결로 날려버린 일까 말이다.
“하아...빙궁이 나선 것은 상정 안이었다만....빙궁주가 나서지 않을 줄은 몰랐다..솔직히 말해 신강의 지배는 두 번째이고 그녀와 타랍은 양패구상 시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거늘 멋지게 실패했구나”
슈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흥미로운 자군... 흑관을 모두 흡수한 타랍은 나라도 벅찬 상대인데..”
“주군.. 그런 말 마시옵소서...타랍은 힘에 눈이 멀어 그 힘을 모두 컨트롤 하지 못하는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자와 주군을 비교하다니요 언감생심이지요.. 게다가 타랍 그자는 흑관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민혁이란 자와 싸웠습니다. 당시 그가 흡수한 조각은 두 조각 나머지 한 조각은 그자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침을 튀기며 말하는 슈만, 옥좌에 앉아 있던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설령 부하의 아부라고 해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독강시들이 아쉽게 되었구나... 다른 가문들을 상대할 때 써도 됐었거늘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일까?”
“...아닙니다..단지 타랍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은..송구하오나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내의 말을 들은 슈만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듯 하다 말을 꺼냈다. 어떻게 보자면 부하의 충심어린 직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건방져 보이기도 하였다.
“솔직해서 좋구나 알았다 지쳤을터이니 그만 나가보거라”
다행히 슈만의 진정한 주군은 속이 좁지 않은 것 같다. 옥좌에서 슈만을 내려보던 사내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점점 나른해지는 기분을 애써 참으며, 홀로 남은 대전에서 고민 했다.
‘민혁이라...’
바로 민혁이라는 자 때문이었다. 빙궁주와 예상 밖 강자의 등장, 슈만의 보고는 틀린 점이 없었으나 약간의 설명이 빠져있었다. 그가 마공을 쓴다는 점, 그리고 그 무위가 현경으로 보인 다는 점, 그는 슈만을 부하로써 신뢰하고 있었지만 100%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따로 밀정을 보냈고, 위와 같은 내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슈만은 굳이 자신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아 보고하지 않았겠지만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보고하는 것이 마땅했다. 만약 현경에 오른 것이 아니라도 보고대로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회유하는 것이 좋다.
현경의 고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마공을 쓴다고 하는 것을 보아 다른 가문의 무인일 수도 있었다. 비밀병기 정도일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가문들이 빙궁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섞이며, 옥좌에 앉은 사내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민혁이 서련의 처녀와 설현을 취한 다음 날, 빙궁은 발칵 뒤집어 졌다.
“......”
“......”
빙궁의 모든 무인들은 대전에 모였고, 민혁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있다면 빙궁주의 옆에 민혁이 앉아 있다는 점 정도, 서련과 연화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로 옥좌에 앉아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빙궁의 옥좌란 빙궁주와 오직 그의 남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그런데 민혁과 빙궁주가 앉아 있다는 것은 둘의 관계에 진전이 있다는 것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빙궁의 원로들은 자신들이 키우다시피한 빙궁주가 새시집을 간다 하니 마냥 기뻐했다. 게다가 그 상대 전설의 마인을 부순 사내,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반면 민혁과 같이 원정을 갔던 무인들은 서련과 소궁주 서연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녀들도 민혁과 서련 사이를 알고 있었고, 서연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연화와 여인들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있었다.
‘...내려 가면 최소 사망이다.’
옥좌에 앉아 있던 민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서 거대한 가슴으로 자신의 팔을 짓누르는 설현 덕분에 기분은 산뜻했지만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서연 때문이었다. 서련도 무표정이긴 했지만 그녀 주위로 한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일이 어찌 이리 됐냐하면 시간은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은 건족 원정으로 인한 논공행상을 하는 날이었다. 당연히 빙궁주가 보는 곳에서 그것을 처리해야 했다. 설현은 대담하게도 아침부터 그의 물건을 맛보았고, 자신의 위에 퍼져 있는 민혁을 끌다시피 해 대전에 끌고 온 것이다. 그도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것 모두가 모여 있는 곳에서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 궁주님 질문이 있습니다.”
싸늘한 한기가 대전에 감돌 때 한 무인이 용기를 내서 손을 들었다. 그녀는 민혁일행이 처음 빙궁에 왔을 때 빙궁의 입구를 지키던 파나였다. 그녀는 서연의 옆에서 자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한 것과 말을 떠는 것을 보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말해봐~”
그에 반해 궁설현은 민혁의 팔을 꽈악 끌어 안은 상태여서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옆에 계신 민혁님과는 도대체...”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는 빙궁주를 보며, 파나는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더 커져가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뭐야~ 보면 몰라? 어젯밤부터 내 낭군님이 되었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대전에 던졌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빙궁의 무인들은 술렁거렸고, 원로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이 일의 가장 큰 주체자들 중 하나인 궁서연은 조용히 자신의 허리춤에 품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릉
“어머~ 딸 뭐하는 거야?”
궁서연이 검을 뽑자 빙궁주도 덩달아 빙백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싸해진 대전의 분위기 논공행상을 펼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원로들은 빙궁의 무인들을 대전에서 쫒아내고 자신들도 문을 닫고 나갔다.
“아버지 아니 어머니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자가 누구의 연인 자격으로 이 빙궁에 들어왔는지”
빙궁의 무인들이 사라지자 서연은 속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연히 알지 서련이의 연인이라는 자격이었잖아?”
빙궁주는 민혁의 팔을 꾸욱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녀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인륜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였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고, 호감이 가는 사내를 만났다.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걸 알고도!”
콰앙
궁서연은 이를 악물면서 발을 굴려 바닥을 세게 밟았다. 조금이지만 바닥은 움푹 패어버렸다.
“알아 장모가 사위를 탐한다니.. 하지만...하자만...나 민혁을 사랑해 살면서 처음 느껴봐 이런 느낌... 그래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버렸는걸! 사랑하는걸!”
악다구니 하듯 소리치는 빙궁주, 대전이 떠나갈 듯,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을 내뱉 듯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궁서련도 검을 빼들고 있던 궁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20년 가까이 홀로 궁서연과 궁서련을 키웠다. 아버지란 작자는 씨만 뿌리고 바람을 피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고 그녀의 지위에 사랑이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