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전초
* * *
“(나야 제임스)”
“(오 마이 프렌드! 오랜만이야 왠일로 네쪽에서 전화를 다했어?)”
“(누가 들으면 내 쪽에서는 전화도 안하는 줄 알겠네.. 늦게 전화한건 미안해 옆에 여자 소리 들리는 거 보니까 재미 보던 중인가 본데 다시 전화할까?)”
“(오우 노우~ 괜찮아 널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줄 수 있지 너란 남자는 내 시간을 쪼개 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니까!)”
“(부담스럽긴 한데 칭찬 고마워 다름이 아니라 트러블이 일어 나서 말이야 한국에 일성이라고 알아?)”
“(이..일..일쉉? 미안 뭐하는 기업이야 발음이 너무 어려워)”
민혁의 전화를 받은 제임스는 한국에서는 나름 입지적인 그룹인 일성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일성이라는 발음이 어려워 혀를 꼬아가며 발음하려 했지만 이내 가벼운 사과의 말을 민혁에게 건냈다. 무역기업인 만큼 외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임스는 무역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왠만한 세계의 대기업은 외워두고 있지만 중소기업도 아닌 한국의 대기업을 몰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임스 몰래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괜찮아 발음하지 않아도 돼 한국에서 나름 유명한 무역기업인데 말이야 일성이랑 좀 부딪칠 일이 생겨서 내부는 내가 충분히 흔들 수 있는데 외적으로는 내가 흔들기가 어려워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
“(물론이지! 오히려 말 안해줬으면 섭섭할 뻔 했어 내가 외적인 문제는 처리하도록 할게 합중국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세관에서 막으면 되겠지?)”
“(그러면 나야 고맙지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오호우! 너무 괘념치 마 프렌드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라구 귀염둥이가 보채니까 오늘은 그만 끊을게 다음에 미국에 올 때는 같이 즐기자구 프렌드 바이~)”
민혁은 휴대폰을 닫으며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 치자면 늦은 시간에 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쾌한 말투로 자신과 상대해준 그의 모습에 실풋 웃었다. 그와 민혁이 만난 것은 해킹으로 인해 전산이 마비된 외국계 기업에 의뢰를 맡으러 갔을 때이다. 마침 실수를 해 기업의 감사 자리에 좌천 되어 있던 제임스는 시찰차 한국에 와 있던 차였고 그의 기술을 보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현실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인 친구는 원래 그런 관계이다. 기브 앤드 테이크
민혁은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캡슐에 틀어 박혔다. 소윤에게는 미안했지만 하루에서 이틀 정도 전화가 안될 수도 있다고 미리 메시지를 전해두었다.
“괴롭히는데 몇 일 밤을 세야 하겠지만 복수만큼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통쾌한 것도 없지!”
뚜둑뚜둑
캡슐 안, 평소와는 다르게 홀로그램 모니터가 6개나 띄워져 있었다. 민혁은 손을 뼈소리가 나게 풀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니터에는 금새 기하학적인 숫자들과 컴퓨터 언어들이 가득찼고 그것은 먹물처럼 번져나가 나머지 모니터들을 전부 채웠다.
그 시각 일성의 보안부서에서는 난리가 났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경로에서 바이러스가 전산 프로그램들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안팀장들이 손을 써보려 했지만 바이러스는 보안방어벽을 뚫고 전산 프로그램들을 잠식해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보안부서의 인원들은 얼굴빛이 모두 흙빛이 되었다.
일성 그룹이 한 달에 수출하는 금액은 8조원 가량 발주와 수입물품을 관리하는 것은 대부분 전산 프로그램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마비가 되다니 그룹의 임원과 고위 관리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당장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언론에 떠들려지고 당장 주가가 내려가는 것은 임직원들 모두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안팀들은 중국의 해커들을 섭외 하기에 바쁘게 움직였고, 평소 미국 의원들과 친분이 있던 부사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안기술을 빌리고자 노력했다.
“천하의 일성이 고작 해커 때문에 마비됐다는 게 말이 되는 게야!!”
1960년대 길거리의 조그마한 보투상에서 일성이라는 한국 굴지의 기업을 만들어낸 일성의 회장, 하일준은 길길이 날뛰었다. 아무리 정보화 시대라고 해도 그렇지 전산 프로그램이 마비 됐다고 해서 기업의 업무 자체가 마비되다니 그는 분에 못이겨 다시 한 번 회장실의 물품들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노인네 성질하고는...’
그런 그를 바라보는 기업의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하일준 회장의 큰아들 하진섭은 혀를 찼다. 겨우 업무가 하루 마비 됐는데 저런 태도라니 요즘 대기업들은 해커들의 표적이었고 보통의 해커들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해킹을 그만둔다.
데이터 자체가 암호화 되어있다 보니 그것을 풀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가면 국제경찰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도 보안팀에게 들어서 이번 해킹이 보통 실력 있는 놈의 소행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해결 할 것이다. 직원들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하진섭은 무책임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위인들 중 하나였다.
다음 날
“당장 중국쪽 섭외 상황 보고해! 부사장은 어떻게 됐어?!!”
이번에는 하진섭이 길길이 날뛰었다. 해커는 공격을 멈추기는 커녕 오히려 총공세를 펼쳐왔다. 전날에는 프로그램만을 공격했다면 이번에는 전자기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회사 내부의 메일 회선에 바이러스를 깔아 퍼지게 만든 것이다. 그로써 일성의 무역로 자체는 폐쇄 되다 시피 되었고, 다른 대기업들에게 받던 물량도 떨어져 갔다.
당연히 하일준은 불길을 토해냈고, 하진섭도 부하직원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20년동안 일성에 다니며 업무 능력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부사장에게도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책상을 빼라는 말까지 던저둔 상태였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사흘 째 이번에는 외부에서 일이 터졌다. 일성의 가장 큰 무역상대인 미합중국이 관세 문제를 들먹이며 세관절차를 진행중이던 상품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곧 주가에 폭락으로 이어졌다. 미합중국의 폭탄발언에 기자들은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일성의 전산이 마비된 것을 알아냈다. 주가는 거의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주가의 폭락이 계속되자 개미투자자들과 중소 투자자들은 주식들을 빠르게 처분하기 시작했다.
열흘 째 주가는 더 이상 하락 하지 않았다. 더 내려갈 곳도 없었다.
“대기업 털기 한 번 손 쉽네~”
홀로그램 모니터에 표시된 일성의 주가를 보며 민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복수는 통쾌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현재 일성의 주식 중 외국 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12%를 제외한 88%의 국내 주식중 48%는 회장일가가 소유했고 19%는 개미투자자들이 나머지는 민혁의 손 안에 들어왔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지.. 이사대리는...그래 장인어른에게 부탁해야지!”
그는 10일 가까이 지속되던 전산프로그램의 해킹을 이제야 해제했다. 업무 마비는 풀리겠지만 한 동안 전자기기에 대한 사용은 어려울 것이다. 그 동안 그는 마지막 갑질을 할 준비를 세웠다.
하일준 회장의 방
“죄송합니다...회장님”
“아니네...부사장 자네가 잘못한 것이 무었이 있나..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사장, 하일준 회장은 20년 동안 자신의 아래서 최선을 다한 그를 차마 탓하지 못하고 창문 밖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돈 욕심에 보투상을 시작해 외국인과 처음 거래를 텄을 때 그리고 처음 100명의 직원들이 자신의 아래 고용되었을 때, 그리고 대기업이라는 칭호를 달았을 때까지 하일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모두 무상함이라
(하일준 회장님)
“불렀나 부사장?”
“...아닙니다...아무래도 컴퓨터 스피커에서..들리는 것 같습니다.”
부사장의 말에 회장은 흠칫놀라며 뒤를 돌아 책상 위에 놓여진 컴퓨터를 보았다. 그는 평소에 컴퓨터를 잘 켜놓지 않는다. 오늘도 분명 전원을 켜놓지 않았다. 그런데 컴퓨터는 켜져 있었다. 모니터에는 메모장이 켜져 있었고, 메모장에는 ‘신고할 생각말고 조용히 들으세요’ 라고 써져 있었다. 회장은 지금 이 짓이 해커의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부사장도 굳어진 회장의 얼굴을 보고, 그의 옆으로 와 모니터를 보고 흠칫 놀랐다.
(지금까지 번거롭게 해킹으로 불편 드린점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사장과 회장이 모니터를 보자 스피커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해커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길래!!”
노기가 가득찬 목소리로 외치는 하일준
(손자이신 하지훈군이 이쪽에 시답지 않은 짓을 벌였습니다. 그것만 알아두세요 한 가지 충고 하자면 자신만 컨트롤 하지 말고 앞으로는 핏줄 관리도 똑바로 해야할겁니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해커로 파악되는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겨진 하일준과 부사장은 침묵에 빠졌다. 재계서열 10위에 빛나고 한국무역의 축을 책임진다고 자부 했던 자신들의 기업이 겨우 해커 따위에게 흔들렸다.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분노의 시작이었다. 조용한 분노는 오히려 멈추기 어려운 법
“김비서 당장 지훈이 불러들여 사장도 마찬가지야 올 때 사장 명패도 같이 가져오라고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부사장의 서글픈 중얼거림에 내선으로 전화를 끝낸 회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했다. 소식을 통해서 다른 대기업들의 회장일가가 경영을 농단한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일성이 이렇게 될 줄이야 고작 손자놈의 잘못 때문에 수백, 수천 명의 삶은 터전이 마비 됐던 것이다.
‘더 이상 바지 사장을 둘 수는 없지 내 착오야..’
그는 큰 결심을 했다. 회장 자리는 남겨두더라도 사장 직위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아들을 쳐내고 그 자리에 부사장을 앉게 할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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