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전초
* * *
파지직
“당신 그만해요”
사윤은 공중에서 아지랑이를 피우는 뇌기를 보며 민혁에게 말했다.
“넵!”
‘흥! 어딜 넘봐!’
그제서야 민혁은 뇌기를 풀었고, 어렴풋이나마 그의 경지를 알게 된 남자들도 일행에게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일행은 곧장 빙궁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객잔을 찾아 여장을 풀겠지만 궁서련의 의견으로 바로 빙궁으로 향했다. 빙궁으로 가는 길, 빙궁이 가까워질수록 그나마 있던 인가는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한기 또한 강해져서 추위가 옷을 뚫고 들어왔다.
“후냐아 춥다아앙~”
따듯한 지역에서만 생활해서 추위에 약한 연화는 민혁에게 달라붙었다. 모란과 사윤 그리고 호령과 궁서련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화경에 경지에 올라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궁서련과 호령도 들러붙는 것을 본 민혁은 피식 웃었다. 결국 그는 빙궁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눈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나쁘지는 않아’
그도 나쁘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온 몸을 자극하는 말랑거림이라니 거부할 수 없었다.
“하아~하아~”
빙궁의 문지기 파나는 오늘도 온 몸을 자극하는 추위를 견디며, 숨을 내뱉었다. 상관인 빙검대의 대주는 화경의 경지에 올라 한기를 느끼지 못해 꽉 짜인 시간대의 순찰을 부하들에게 요구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자신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움추릴 수 밖에 없다.
"히잉~ 너무 춥잖아...시간이 얼마나 남은거야?"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머리위에 해가 떠있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 남은 순찰시간, 솔직하게 말해 외부인들은 위치조차 잘 모르는 빙궁에 누가 쳐들어온다고 순찰을 이렇게 빡빡하게 한다 말인가? 파나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 시간 정도다. 파나 좀만 참아.”
파나가 불만어린 말을 내뱉자 그녀의 뒤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은백색의 장발을 자랑하는 그녀의 외모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히잉! 대주님 그래도 너무 춥잖아요!”
“참거라”
“마귀야!우와아아앙~!”
파나의 투정을 보던 빙검대주, 궁서연은 그녀가 보지 못하게 히죽 웃었다. 평범한 여동생 같은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피로 맺어진 여동생은 귀엽기는 커녕 딱딱하기만 했지만 딱딱한 태도를 유지하는 여동생도 나름대로 놀려주는 맛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그녀는 무림으로 무사수행을 나간 동생을 기다렸다.
“어라?”
“왜 그러느냐?”
한참을 투정어린 말을 궁서연에게 던지던 파나는 눈바람이 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인영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식량조달의 날도 아니었고, 딱히 방문할 손님도 없었다.
“적인가?!”
“후,후아아앙! 어떻게해요 어떻게해! 종을 울려야 하나 아니야 도망을...!”
퍼억
궁서연은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으로 추정되는 자들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고 폭주하는 파나의 머리를 당수로 퍽하고 쳤다.
“후에엥~ 아파요!”
맞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폭주를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는 파나, 그녀의 눈가에는 방울방울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진정해라 가서 빙검대원들을 불러와”
“알겠습니닷!”
후다닥 성문 안으로 뛰어가는 파나의 뒷모습을 보던 궁서연은 착찹한 눈길로 눈바람을 뚫고 다가오는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짜르르한 기운을 품고 다가오는 그들 중 분명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는 것 같았다. 동생이 오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궁서연은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꽈악 잡았다.
“..다왔어..”
“멀리서 볼 때도 커다랬는데 가까이서 봐도 크네.”
“성벽인데도 상당히 크군...”
거친 눈바람을 뚫고 빙궁에 도착한 일행은 저마다 감상평을 말했다. 연화와 사윤 그리고 모란은 추위에 약해서 아예 쥐죽은 듯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사윤은 예외이긴 하지만 초절정의 고수들이 버티기에도 어려운 날씨였다.
“...어라...?”
추위를 떨쳐내기 위해서 발걸음을 빨리하는 일행, 궁서련은 일행에 선두에 서서 걷던 중 시야 내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먼저 가 있을게...”
“어...어어 어딜?!”
그녀는 누구를 발견했는지 미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내버려두고 경공을 펼쳐 앞서나갔다. 당황한 민혁은 궁서련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지만 눈바람에 흩어져 전해지지 않은 듯 했다.
‘갑자기 왜저러지?’
그는 그녀가 달려간 방향을 집중해서 보았다. 눈바람이 시야를 방해 했지만 그에게는 눈바람 따위는 장애물 축에도 끼지 못했다. 민혁이 궁서련이 달려간 쪽을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궁서련과 매우 닮은 장발의 미녀가 서 있었다. 언뜻 보자면 설녀와도 같은 모습
‘자매인가? 아니면 모녀?’
매우 닮은 그녀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민혁은 손쉽게 그 둘이 혈연관계라는 것을 파악했다. 문제라면 둘이 모녀관계인지 자매관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 정도일까? 만약 자매관계라면 민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 할테고, 모녀관계라면 민혁쪽에서 포기할 것이다. 그는 새롭게 나타난 미인의 모습에 빠르게 발을 놀리면서도 백발의 그녀가 궁서련의 자매이기를 빌었다.
“서련아!”
민혁의 까만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서연은 오랜만에 동생과의 해후를 나누었다. 그녀는 격하게 서련의 동체를 껴안았다. 서련도 반항하지 않고, 꼬옥 하고 서연을 껴안았다.
“어떻게 된거야?”
“...돌아왔어..”
궁서련의 짧은 대답에 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빙궁 앞에 나타난 의문의 인영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인영들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속도를 높여서 이쪽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검을 뽑고 궁서련을 맞이했다. 솔직히 말해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적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피붙이, 여동생이었다.
“무사수행은 올해가 끝날 때까지야”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지만 서연은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빙궁의 무인들은 일생에 한 번 외부에 출입기회를 얻는다. 무력대에 들어가게 되면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건 무사수행을 성공리에 마친 상위 10%의 일, 일반무사들은 무사수행을 가고, 간혹 남편감을 골라 빙궁으로 돌아온다. 그 중 강호에서 무력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이 무력대에 소속된다. 기간은 총 1년 이름을 날리지 못한 자는 결국 하급무사가 되어 일하게 된다. 궁서연은 궁서련이 혹시라도 앞으로의 삶을 빙궁에서만 보내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일부러 엄격한 표정을 보인 것이다.
“...알아...이름은 충분히 날렸고...... 남편이랑 돌아 왔어...”
“뭐?!!”
엄격한 궁서연의 표정은 궁서련의 말에 흉신악산의 얼굴처럼 일그러졌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된건데?”
“...미안...”
앞뒤 따지지 않고 갑작스럽지만 민혁은 감옥에 갇혔다. 눈 앞에는 수 많은 게임을 하면서 본 철창이 버젖이 자리 잡고 있었고, 뒤에는 차디찬 돌바닥과 거미줄이 그를 반겼다. 쇠창살 너머에는 궁서련이 보기 드물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궁서련의 정수리를 잠시 바라보다 손을 쇠창살 밖으로 꺼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으니까 가봐 대신 빨리 꺼내줘야해”
“...응!..”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기분 좋았는지 궁서련은 작은 미소를 보여주고는 후다닥 감옥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것은 민혁 혼자 뿐, 이 감옥에는 죄수 또한 아무도 없어 그는 홀로 자신을 압박하는 침묵에 맞서며 감옥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떠올려 보았다.
빙궁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자 일행을 반겼던 건 궁서련의 언니인 궁서연과 빙궁주 그리고 빙궁의 무사들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놀랐지...’
민혁이 놀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빙궁주 때문이었다. 빙궁주는 놀랍게도 여자였다. 그것도 궁서연과 궁서련의 얼굴을 쏙 빼닮은 미부였다. 궁서련과 궁서연이 그녀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머리가 아파서 깨질 것만 같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남자가 없는 빙궁에서 어머니를 아버지라 부르던 어머니라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든 빙궁주는 강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주노야 보다 강한 상대였다. 주노야와 싸우고 나서 많은 성장을 했지만 그녀에게는 부족했다. 주노야와의 싸움에서도 민혁은 특기를 쓰고 겨우겨우 승리했다. 당연히 빙궁주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고, 얌전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특기를 쓰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남은 빙궁의 무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으며 빙궁과도 굳이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빙궁주도 그의 경지와 생각을 언뜻 알아차렸는지 민혁을 그리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여서 감옥에 갇혔지만 다른 여인들은 빙궁에서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후 빙궁의 전통에 대해서 궁서련에게 듣게 되었고, 자신도 딸 가진 부모의 입장이라면 그리 행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쇠창살을 뜯어버리고 나갈 수는 있지만 그는 일단 참았다. 절대 감옥을 빠져나가기 전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던 궁서련의 눈빛이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언니...”
“......”
매몰차게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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