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119화 (119/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9화 - >

원정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황제는 이번 원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무방했고 덕분에 중앙으로부터의 지원은 역대 그 어떤 군대보다 월등했다.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춥고 척박한, 머나먼 타지에 묻힌 영혼이 몇 만 명임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출발할 때보다 배에 가까운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 숫자만으로는 부족했다. 테라 방벽이라는 원점에서부터 출발한 각 부대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간격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작년처럼 나아간다면 각 부대가 맞닥뜨리는 몬스터의 숫자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들은 선택을 했다. 모든 방면에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일부는 현상유지를 하며 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제국 전체가 이번 원정에 사활을 걸었다면 백만 단위의 병력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모든 방향에서 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원정을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이 정도 숫자의 병력이 동원된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외각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한 이후, 방어선을 유지하며 내부를 청소하는 식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테라 산맥을 따라 나아가며 방어선을 이어가는 것이 병력을 움직이는데 있어 편할 겁니다. 보급도 생각해야하지 않습니까.”

방법은 두 가지로 갈리었다. 원하는 영토만큼 외각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한 뒤, 몬스터가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타이탄을 주축으로 내부를 청소하는 방법.

각 부대의 역할이 철저히 나뉜다는 점, 몬스터에게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섬멸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으나 진격 방향의 방어선의 병력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점과 본대라면 모를까, 보급 부대의 움직임이 불편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머지 한 방법은 작년에 했던 방법처럼 밀고 나아가자는 것. 해당 영역의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으며 방어선 구축도 비교적 느리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방어선 구축이 느리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원하는 만큼만, 원정대의 사정에 맞춰서 방어선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며 전자의 경우, 예상을 잘못했다가는 한겨울에 병력을 움직여야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두 가지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으나 결과적으로 채택된 방법은 후자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변수를 주지 말자는 의도였다.

“그럼 이렇게 결정된 것으로 알고 남은 기간 동안 모두 준비를 철저히 해주었으면 좋겠군.”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날이 개고 눈이 녹자 방어선에 틀어박혀있던 병사들은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몬스터와 목숨을 건 사투를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영역은 점점 넓어져갔다. 그리고 날이 점점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 전진을 멈추고 몬스터로부터 얻어낸 땅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원정 기간 동안 원정군은 그 사이클을 반복했다. 날이 더워지면 진격을, 날이 추워지면 방어선에서 방어를. 그럴수록 인간의 영역을 늘어났으며 몬스터의 대지에서 본토로 향하는 재물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생명의 무게를 제외한다면 본토에서 원정대를 향해 보내는 물자보다 본토로 향하는 몬스터의 대지에 물건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까.

동시에 더 이상 몬스터의 대지는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정확히 인류가 확보한 영역에 대해서만큼은 더 이상 몬스터의 대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세이프티 존.

방어선 내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인류의 땅이었다.

계절이 반복될수록 몬스터의 대지에서 세이프티 존이 차지하는 영역은 점점 늘어났으며 방어선의 길이도 길어졌고, 그를 책임지는 병력도 늘어났다. 더 이상 황제와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일부 귀족들만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규모였지만 원정대가 가져온 성과물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졌으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방관하던, 반대하던 귀족들이 하나둘 백기를 들고 투항해오니 원정대는 계속된 피해에도 불구하고 세를 불려갔다.

“각하!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몸은 이 곳을 떠나지만 마음만큼은 항상 원정대와 함께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성전을 승전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오는 자가 있으면 가는 자도 있는 법. 대부분이 이름밖에 돌아가지 못하는 병사들과 달리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기사, 마법사, 귀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도 생겼다.

테라 방벽의 경우와 다른 것이 기본적으로 원정대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배경과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기에, 더불어 원정군에 지원하는 이들의 숫자가 상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지금 이 순간, 원정군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이들은 레닐과 지크 후작. 둘을 포함해 두 손으로 셀 수가 있었다.

“내 딸을 졸지에 과부 신세로 만들다니, 아주 못난 사위로군.”

“장인어른께서도 장인어른께는 못난 사위셨지 않습니까. 그 계보를 잇는 거라 생각해주십시오.”

“못난 녀석.”

“그래도 전 이번 건만 끝나면 좋은 아버지로 돌아갈 겁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위도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장인어른께서는 한참 늦으셨지 않습니까.”

“······.”

“그러니 이제라도 좋은 할아버지라도 되어주십쇼. 더 늦으면 그럴 기회조차 없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원정이 끝나고 하기로 했을 텐데?”

“이야기는 장인어른께서 먼저 꺼내신 거 아닙니까?”

둘에게도 돌아갈 기회는 있었다. 지크 후작은 권터 후작과 교대를 하면 되었으며 레닐 또한 다른 마법사들이 부족하나마 그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둘이 최전선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책임감이었다.

지크 후작에게 테라 방벽은 고향인 지크 영지만큼이나 오랜 세월 그가 몸을 담은 곳이었다. 이제는 영면에 잠든 그의 친우이자 주군이었던 전대 황제가 그에게 내린 명령 한 가지.

테라 방벽을 지켜내라.

황제의 육체는 땅에 묻혀 사라지고 백골만이 남았지만 그 명령만큼은 지크 후작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똑똑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명령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회. 평소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천상 군인인 지크 후작이 이런 기회를 소홀히 할 리가 없었다.

레닐 또한 마찬가지. 누군가가 내린 명령은 아니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지크 후작보다 더한 책임감을 갖고 이번 원정에 임하고 있었다. 그의 욕심으로 시작한 원정이었으니까. 적어도 다른 이들은 쉬엄쉬엄 임할 수 있어도 본인만큼은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레닐의 의지였으니까.

“손주들 검술도 좀 봐주시고 손녀의 재롱도 좀 보시면서 사십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헛된 소리할 시간 있으면 나가서 순찰이라도 돌고 오도록.”

“예예. 못난 사위는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그렇게 전쟁 속의 평화라는, 양립할 수 없는 것만 같은 모순적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원정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줄 알았다. 원정이 시작된 이후로 비보는 들려오지 않았고 낭보만이 들려왔으니. 그러나 몬스터의 대지는 그 동안 인류가 이 곳에 발을 들이지 못한 것은 가혹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외치기라도 하듯 가만히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

“각하! 급보입니다!”

그 날도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세이프티 존을 넓히고 지키는 것이 원정군의 임무였으니 수뇌부라 할 수 있는 내가 할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급보라니?”

그런 상황에서 날라 온 한 급보. 워낙 다채로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 통신마법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뛰어올 때부터 회의실에는 이유모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헉, 헉. 그, 그것이······.”

“진정하고 내용을 말하도록. 급보라니, 어디서 온 것인가?”

“제 7구역에서 날아온 급보입니다. 현재 대규모 공세를 받아 방어선을 뒤로 물리며 후퇴 중이라고 합니다!”

“후퇴라니! 그 땅이 어떻게 얻은 땅인데 감히 후퇴를 해!”

“대규모 공세라고 해봤자 그 대부분은 성벽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쓰레기들 아닌가! 그런데 방어선을 버려? 제정신들이 아니군!”

급보의 내용에 일부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 7구역은 가장 최근에 확보한 세이프티 존.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하더라도 그 뒤에 이중삼중으로 예비 방어선이 있는 다른 구역들과 달리 아직 방어선이 완벽하게 자리 잡지 않은 구역이었다.

즉, 급보의 내용대로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했다는 뜻은 제 7구역 전체를 포기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흘린 피와 땀, 돈을 그대로 허공에 날렸다는 말과도 같았고.

“제 목숨이 아까워 방어선을 지킬 생각도 하지 않고 후퇴를 결정하다니,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지금 당장 군사를 보내어 방어선을 다시 확보해야 합니다! 이대로 7구역을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7구역의 방어선을 담당하던 이들을 향해 성토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확실히 첫 번째 급보임에도 불구하고 후퇴를 하고 있다는 뜻은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지금까지 제법 수월하게 몬스터들을 밀어왔던 이들이 겁쟁이라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대규모 공세라니, 도대체 어느 정도 숫자이기에 성에 의지해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후퇴를 결정했단 말인가? 십만? 이십만?”

그러나 누군가의 물음 뒤에 이어진 통신 마법사의 말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것이······.”

“그것이?”

“보고에 따르면 물경 백만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백만이라니, 과장도 정도껏 해야지!”

“필시 그것들이 자신들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거짓보고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조차도 놀랐다. 잠시나마 저들의 의견에 동조를 할 정도로. 지금까지 마주했던 가장 큰 규모가 삼십 만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단번에 그 네 배에 가깝다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한, 한 곳에서만 올라온 보고가 아닙니다. 7구역 전 방어선에서 똑같은 내용의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단체로 단합을 하지 않는 한 거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올라온 정황상 그렇습니다. 게다가······.”

“게다가라니? 백만이라는 숫자에 더하여 뭔가가 또 있다는 말인가?!”

충격이 가기도 전에 이어진 마법사의 말에 모두가 정신을 쉬이 차리지 못했다. 백만이라는 숫자도 지금 당장 대책이 안 서는데 게다가라니?

“공세의 선두에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몬스터무리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미확인 몬스터?”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9화 -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