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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118화 (118/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8화 - >

휘이이이잉-

한기를 가득 품고 있는 강풍이 피부를 베어버릴 듯한 기세로 세차게 몰아쳤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마음만 먹으면 물을 뿌리는 즉시 얼어버릴 듯한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내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최고 수준의 방한 대책을 갖추고도 강풍과 폭설, 강추위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몬스터의 대지를 하루에도 몇 시간씩 행군하다보면 조금만 방심해도 동상으로 감각이 없는 손과 발의 처참한 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역대 황제들 중 단 한 명도 원정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물론 그들과 현 황제가 처한 상황은 달랐다. 타이탄의 존재 유무가 달랐으며 몬스터의 대지에 묻혀있는 지하자원의 파악 유무가 달랐다. 현 황제에게도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결코 이번 원정을 계획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 무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 땅이 사람이 살기 적합한, 따뜻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간에 상관없이 한 번쯤 시도는 해볼 수도 있었을 테니까. 피땀 흘려 땅을 얻더라도 그 당시에는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번 원정이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지.’

많이 이른 판단일지도 모르나 이대로 큰 변수 -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몬스터의 등장 혹은 왕국들과의 전쟁 등등 - 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물론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기에 변수인 것이지만.

‘어쩌면 역대 가장 강력한 황권을 가진 황제를 내 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 지도.’

대대로 황제의 권력은 강할 때도, 약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건 황제가 독단으로 제국 전체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황제라는 이름값과 달리 그 실상은 제국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영주들 중 가장 강력한 영주라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황제들은 유력 귀족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며 자리를 공공이 했으나 역으로 황제의 권력을 악화시키는 결과 또한 동시에 가져왔다. 자신의 힘이 아닌 주변의 힘을 빌린 결과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그러나 지금의 황제는 경우가 달랐다.

역대 황제들과 현 황제의 가장 큰 차이.

힘이었다.

반대하는 귀족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

타이탄으로 대표되는 물리력과 몬스터의 대지 원정 성공이라는 업적까지. 속된 말로 귀족들이 함부로 나댈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힘이 황제에게 있거나,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나에게도 나쁠 건 없지.’

제국을 가르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 황제파와 귀족파. 난 굳이 따지자면 황제파에 가까웠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인들까지도. 내가 원하는 것은 가족들과의 안정적인 미래였지, 권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힘이 강력해지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황제가 귀족들을 전부 없애려고 하지 않는 한. 그리고 황제가 돌아버린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멍청한 혹은 위험한 선택을 할 리 없을 테고.

‘딱 이대로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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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 년 간의 원정. 별다른 손해 없이 원정을 성공리에 이끌어가고 있으며 막대한 성과까지 얻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면 상위종을 허수아비처럼 썰어버린 타이탄의 성능에 대한 칭송을, 서로 얼마나 활약했는지 자랑하는 기사들의 자랑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화려한, 그렇기에 돋보이는 타이탄과 기사들의 활약. 그 뒤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그들의 활약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이 있었다. 실제로 중앙에서 꾸준히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면 방어선이 확립되었을 때, 병사들의 숫자는 처음 출발 할 때의 절반 그 이하였을 테니까.

그러나 책임을 질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정말로 피해가 컸냐고 물었을 때, 정말 큰 피해였다고 대답할 사람은 열 명 중 두세 명쯤 될까. 제아무리 병사들이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지만 병사들은 결국 평민, 지휘부라 할 수 있는 귀족들에게, 영주들에게 평민이란 결국 또 다른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악독한 이들은 평민을 본인들과 같은 생명체가 아닌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재산으로 생각할 테니 몇 명이 죽건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더 큰 이득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레닐이 원정에 임하여 느끼는 압박감도 상당했다. 반드시 이번 원정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끝을 봐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늘어났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포장했으나 포장을 뜯어보면 그 출발점은 레닐의 개인적인 복수였기에. 물론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자가 늘어날 일이었지만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피해보다 현재의 입은 피해가 더 뼈저리 다가오는 법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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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 자네 왔나.”

마침내 돌아온 최전선. 몇 달 동안 자리를 비웠으나 지금 이 순간, 원정군이 보유한 타이탄 전력이 1.5배 이상 상승했다. 150여대 이상의 1세대 타이탄, 글로리와 글로리를 초월한 강력함을 가진 전용기, 루인과 가더.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해 전력투사를 했다면 아직 타이탄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왕국 하나쯤은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다. 타이탄을 평범한 기사들이 상대하기 위해선 기사들이 상위종을 상대하는 것처럼 타이탄을 상대해야 했으니.

제아무리 기사들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상위종들에 비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상위종에 대적할 수 있는 이유는 오러의 존재 덕분이었으나 타이탄을 상대로는 그것조차 빛이 바랄 뿐이었다.

“잘 되었군. 원정군에 큰 힘이 되겠어.”

“방어선의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네. 이 곳이 몬스터들의 입아귀 한복판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좋은 편이라고 봐야겠지.”

그 막강한 전력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어선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 몬스터는 한 번 쓸어버린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제대로 된 1인분을 하기 위해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한 것과 달리 몬스터의 번식력과 성장력은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니까.

몬스터를 제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최대한 북쪽으로 밀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지금 이 상황에서 전력을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아내가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나에게 건강을 묻는 건가? 길 가던 어린 아이도 웃고 갈 일이군.”

보급 부대를 이끌고 온 만큼 간단한 보고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난 뒤, 휴식을 위해 자리를 떠났고 그 뒤로 날이 개면 이어질 원정 준비에 매진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역으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작년의 기분 좋은 출발을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방심이 아닌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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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월이 다 지나서야 영상의 기온을 회복한 북부 일대. 덕분에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원정군의 지휘부는 여러 안건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주된 의제는 역시 언제 군사를 움직이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굳이 병력을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봄의 몬스터는 겨울만큼이나 흉포합니다. 겨울에 굶주린 만큼 봄에 채워 넣으려고 하니 말입니다. 조금만 놔둬도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며 숫자를 줄여줄 텐데 굳이 병사들을 굶주림으로 독이 오른 몬스터와 맞서게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게다가 작년, 저희가 얻은 영토 중에서도 아직 개발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땅도 많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간다면 필연적으로 방어선이 넓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번 년은 힘을 조금 더 비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엇보다 저희들에게는 글로리가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것은 저희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번 년도는 쉬어가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원정동안 입었던 피해가 극심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테라 방벽을 틀어막고 있었던 예전에도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피해는 조금 더 입었을지언정 비교도 되지 않는 이득을 얻고 있으니 감수할만하다는 입장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출정식 당시 황제 폐하께서 직접 외치신 연설을, 문구를 잊었단 말입니까! 지금의 원정은 성전입니다! 성전! 그깟 제물 때문에 성전을 미루자는 것입니까?!”

“게다가 봄이라서 출정을 늦추자니, 작년 우리가 언제 이 곳으로 넘어왔는지 잊었소? 게다가 이 이상 출정을 늦춘다면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겨울이 찾아올 텐데, 말은 병사들을 위하는 척하지만 두려운 것 아니오?”

“지, 지금 말 다했소?!”

제각각 판단의 근거는 있었지만 그 끝은 싸움이었다. 애초에 다른 것은 몰라도 자존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귀족들답게 누군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것을 쉽사리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결국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다행인 일이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내린 명령은 하나뿐이었다. 몬스터의 대지를 제국의 땅으로 만들라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부가적인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각하!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입니다! 조금만 기다린다면 한층 더 안정적인 공략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안전 또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운 말이지만 앞으로 타이탄의 숫자는 단기간 내에 크게 늘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 또한 최대한 원정을 빠르게 끝내자 주장하는 쪽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모두가 듣고서 깜짝 놀란 지금의 이유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휴즈 백작.”

“이 중에 타이탄 한 대를 제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의 자원이 소모되는지 알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타이탄의 제조법은 연구소의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제국에서도 특급으로 취급하는 기밀 중의 기밀이었으니까. 황제의 명령으로 그 누구에게도 발설이 금지된 내용이니만큼 귀족들이라고 하더라도 대략적이라면 모를까,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자세한 건 기밀이기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확실한 건 여러분들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비축된 자원을 바탕으로 물량을 찍어냈지만 앞으로는 지금처럼 파격적인 숫자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원정이 중요했다. 땅 크기는 제국 본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이 곳에 묻혀있는 지하자원의 양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양이었으니까.

“지금이 원정대가 가장 강한 시점입니다. 굳이 시간을 주어 적이 강해지는 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각하.”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병력을 움직인다. 반대하는 이가 있나?”

있을 리가 없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8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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