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7화 - >
본토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건 이 곳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해서 방어벽을 두텁게 쌓고 연결하며 다른 부대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그 뿐만 아니라 보급로를 탄탄하게 만들며 겨울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와 눈이 지배하는 이 곳에서 제대로 된 보급 없이 겨울을 나기란 무기도 없이 전쟁터로 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갖은 고생과 무수한 희생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요새를, 이제야 성과를 보이고 있는 광산을 포기하고 허무하게 물러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몸을 회복한 나 또한 자연스레 할 일이 많아졌다. 스승님이 황도에 남아있는 현 상황에서 원정대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과 동시에 조금 규모가 있다시피한 작업에는 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효율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잘 들리나?”
[문제없습니다!]
“좋아. 다른 요새들과의 연결은 어떻지?”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각 요새들 간의 통신망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동원할 수 없는 십만 단위의 병력을 이끌고 천이 넘는 기사들은 물론 새로운 신병기까지 끌고 왔음에도 우리는 이 곳에서 약자의 입장이었으니까.
십만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천 명의 기사들이면 왕국 수준에서는 영토 전역에서 긁어모아야 가능한 숫자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병력들을 배치해야 할 방어선은 넓었고 상대해야 할 적은 많았다.
반강제로 요구되는 전력의 분산, 그에 반해 일점돌파만 하더라도 혹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방어선 전체를 압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형이 우리는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각개격파의 우려를 덜기 위해서라도 각 요새간의 유기적인 소통은 필수불가결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번 원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하듯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덕분에 우리들은 요새의, 방어선의 방어력을 올리는데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그동안 경비를 이유로, 효율을 이유로 이론으로밖에 공부할 수 없었던 각종 마법들을 사용해보는 놈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면 겨울은 버틸 수 있겠군.”
“겨울도 여름 못지않게 바쁠 겁니다. 특히나 기사들은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재빨리 지원을 나가야 할 테니까요.”
성벽을 쌓고 그 위에 제작한 스콜피온을 올리고, 각종 함정과 마법을 설치하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북부답게 이른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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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찾아오고 원정군의 움직임은 극히 둔화되었다. 제각기 요새에 틀어박혀 쓸데없는 체력 소모를 줄였고 순찰 또한 추위에 쉬이 버틸 수 있는 기사들 위주로 돌며 불필요한 손실을 막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방어선을 떠나 황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곳은 아직 가을이 채 지나지 않았구나. 새삼 느끼지만 북부는 사람이 오랫동안 거주할 만한 곳은 아니야.’
벌써부터 눈이 내리고 있을 북부와 다르게 대륙 중부에 속하는 이 곳은 아직 겨울이 채 오지 않았다. 거리가 거리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북부의 척박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별 일 없겠지.’
겨울은 몬스터를 난폭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얌전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 번 말했지만 몬스터도 생명체라 이 겨울에 비교적 따뜻한 여름처럼 날뛰다가는 늘어난 에너지 소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먼저 공격을 가하지 않는 이상 요새에 틀어박힌 원정군이 큰 피해를 입을 일은 없으리라.
“고생 많았네. 북부의 소식은 빠짐없이 듣고 있었지. 자네의 활약이 눈부셨다더군.”
“그것이 어찌 저만의 공이겠습니까. 타이탄이 없었다면, 원정군의 병사 한 명 한 명이 최선을 다해 원정에 임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성과였을 것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그렇다고 하여 자네의 활약이 부족한 건 아니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 타이탄조차 자네가 개발한 것이 아니었던가.”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소강상태가 되었다지만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방어선을 떠나 매번 지친 말을 바꿔가며 전력으로 달리더라도 최소 수 일이 소요되는 황도까지 넘어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타이탄.
이번 원정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으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신병기의 원활한 제작을 위해서였다. 떠나기 전, 시스템을 잘 갖춰두었기에 외골격의 제작은 내가 없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핵심인 코어의 제작은 내가 아니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불에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내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만큼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 곳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자네와 자네의 장인어른을 비롯한 제장들의 활약 덕분에 순조롭다네. 벌써부터 나에게 원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귀족들도 있으니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원정을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
다행이었다. 원정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잡히기 시작하면서 나와 황제가 가장 고민했던 일이 원정을 시작하고서 불가피한 이유로 원정군을 철수 혹은 패퇴하는 일이었으니까. 방어선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며 몬스터의 대지 내부에 잠들어있는 자원을 탐낸 귀족들이 참전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니 적어도 병력이 없어 원정군을 물려야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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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언제 돌아온 거예요?”
“오늘 왔어. 황제 폐하를 알현한 뒤 바로 오는 길이야.”
작업을 위해 연구소로 향하기 전, 우선 집에 들렀다. 떠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걱정이 아니 될 수는 없었다. 전생에 내가 살던 세계의 한 위인은 병사들을 이끌고 집을 지나가다 자신만 집에 들르면 병사들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 우물에서 퍼 올린 물맛이 여전하다는 확인한 뒤 그대로 집을 지나쳤다고 하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가. 아빠가 왔단다. 인사해야지?”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에게 무슨 요구를 하는 건지, 그나저나 정말 귀엽다. 내 딸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미녀인 아내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덕분일까, 동글동글한 눈과 아기임에도 뚜렷한 이목구비 등등 미인이 될 가능성이 벌써부터 보였다.
“아우, 아우우.”
“루이즈가 정말 아빠가 맞냐고 물어보네요.”
쿡-
분명 별 뜻 없이 말한 것일 텐데 내 양심을 찔러왔다. 아내가 출산을 하자마자, 딸이 태어나자마자 일 년 가까이 출장을 나간 아빠라니, 게다가 얼마 있다가 또 다시 일 년 동안 출장을 가야하는 아빠라니, 그것이 일이년이 아닐 터 아내의 말처럼 루이즈가 나를 보고 아빠가 맞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었다.
“아우!”
나를 바라보며 짧은 팔을 휘젓는 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안아달라는 듯 그녀의 품 안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딸이 혹시나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몸을 정화하고는 딸을 안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줬다가 아파하기라도 할까, 섬세한 유리세공품을 다루듯 내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요. 아빠가 맞단다.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기는 낯선 사람을 경계부터하고 본다는데, 갓 태어나 눈도 뜨지 못했을 때밖에는 나를 보지 못했을 텐데도 내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낯선 사람의 품에서도 울지도,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거리지도 않았다.
“알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요.”
“노력해볼게. 그러고 보니 장인어른께서도 원정이 끝나면 돌아오시라는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던데.”
“정말요?”
“원정 이후의 일은 원정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하셨지만 장인어른 성격에 뜻이 없으셨으면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하셨을 테니까. 대답을 미루신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신호 아닐까?”
그 말에 아내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장인어른 또한 나 못지않게, 아니 더 못난 아버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도 노력해야겠지.’
이번 원정만 끝나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루이즈가 조금만 더 자라면 여행을 떠나도 괜찮겠지.
그렇게 가족과의 짧은 해후를 마치고 나는 곧바로 연구소로 향했다. 어둠 속에 잠들어 새 생명을 얻기를, 파트너와 함께 대지를 누비며 적을 베기를 기다리는 타이탄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할 일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네가 고생이 많다.”
“이게 무슨 고생이겠습니까. 지금도 북부에서는 추위와,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시작한 전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저만큼은 원정이 힘들다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최전선에서 살을 에일듯한 추위와 언제 덮쳐올지 모를 몬스터와의 전투를 견뎌내는 것보다 황도에서 코어를 제작하는 일이 몇 배는 편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물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겠지만.
어떻게 보면 이번 원정은 저들에게 큰 의미가 없는 행위일지도 몰랐다. 몬스터의 위협을 이유로 들었지만 타이탄까지 개발된 이상 테라 방벽이 뚫릴 일은 없을 것이며 병사로 끌려가더라도 운만 좋다면 살아 돌아올 수도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아예 연이 없을 수도 있었고.
그러나 내 소망을 위해, 귀족들의 욕심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만큼 나에게는 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의무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었고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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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에 있는 동안 수십 대의 타이탄이 새로이 탄생했고 보급을 실은 지원군과 함께 나 또한 다시 북부를 향해 움직였다. 또 다시 남겨두어야만 하는 아내와 딸이 눈에 밟혔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는 일. 덤덤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방어선에서 들려온 소식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크고 작은 전투가 몇 번 있었으나 무너진 요새도 없으며 내부로 침투한 몬스터 또한 금세 제거되었습니다. 차라리 문제라면 추위와 눈이 더 문제였습니다.”
부관들의 보고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상정한 범위 내의 피해였다. 어느 순간부터 일이 막힘없이 수월하게 풀리는 듯한 느낌에 기분 좋은 예감이 치솟았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먼 길을 오느라 말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많이 지쳤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북쪽에서는 보급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결코 오랜 시간을 쉴 수는 없겠지.”
보급 부대는 테라 방벽에서 하루를 푹 쉰 뒤 재차 발을 옮겼다. 몬스터보다 눈이 문제라던 부관의 말처럼 아득할 정도로 쌓인 눈 덕분에 이동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마법사들이 나서서 눈을 치워버리기 시작하자 이내 그렇게까지 큰 장애는 되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눈밭의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겠으나 이제는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7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