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6화 - >
“돌격!”
그 어떤 불꽃보다도 화려하게 타올랐던, 같은 불꽃마저도 태울 듯했던 화염이었으나 결국 마력을 기반으로 타오르는 화염이었다. 레닐로부터 공급받던 마력이 끊기자 그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백염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몇 분조차 되지 않는 사이에 수많은 몬스터를 한줌 잿더미로 만든 충격적인 광경이 벌어졌지만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숫자가 많았던 탓에 반절 이상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까지 마주했던 무리들보다도 더 많은 숫자를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겁에 질린 몬스터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저들이 이대로 도망친다면 언제가 또 다시 그들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 것이라는 것.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몬스터 무리가 아직 그 아둔한 머리로 멍을 때리고 있을 때, 보다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도, 돌격!”
“보았느냐? 우리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 몬스터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우와아아아!”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전투가 다시 재개되었을 때,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낸 주범, 레닐은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너무 신을 냈어.’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양의 마력이 외부로 빨려 들어갔다. 제아무리 레닐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레닐이었기에 막대한 마력 소모에 따른 여파가 컸다.
표본이 적어 평균치를 산정하기는 어려우나 동급의 상대에 비해 몇 배가 넘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레닐이었다. 그에 비례해 마력의 근간이 되는 회로와 심장의 강도도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마력량에 비해 회로의 강도는 지금의 여파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나마 오래 전부터 꾸준히 키워온 코어들이 여파를 분산해주었기에 망정이지, 여타 평범한 마법사들이었다면 애초에 제어를 실패하거나 천운이 따라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으리라.
“괜찮으십니까?”
“적어도 정신이 멀쩡한 것을 보면 괜찮은 모양이야.”
어느 순간에도 본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주었던 막대한 양의 마력이 한순간에 빠져나가자 찾아온 탈력감. 지금 이 순간에도 심장과 코어는 끊임없이 마력을 생산하고 흡수하며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비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주변의 마력을 끌어 모은 끝에 발현한 마법이었다.
일대로부터 흡수되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체 생산량만으로는 단시간 내에 텅 비어버린 회로가 내지르는 요구를 충족시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백작님께서는 충분히 할 만큼 하셨습니다.”
부관들의 만류에 레닐은 아프다고, 목마르다고 외치는 회로를 달래며 전투의 현장을 향해 눈을 고정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에 생존을 담고 있었던 병사들이 이제는 승리라는 목표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군. 이젠 쉬어도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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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그렇기에 도망 혹은 눈앞의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몬스터와 몬스터를 섬멸하려는 인간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그러나 전세는 극명하게 기울어 몬스터의 승리라는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제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어버린 타이탄의 활약. 타이탄과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넓어진 공간을 향해 뛰어들었고 병사들은 전열을 이루어 한 발자국씩 전진했다. 병사들의 날카로운 창이 오크의 팔을 관통했고 예리한 검날은 고블린의 목을 갈랐다.
막대한 숫자 덕분에 억지로나마 전열을 이룬 모습이 되어 타이탄의 전진을 막아낼 수 있었던 방금 전까지와 다르게 비교적 공간이 널찍해진, 혼란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지금 상황에서 타이탄을 방해할만한 요소는 없었고 그건 곧 타이탄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좋아. 아주 좋아!”
칠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테라 방벽에서 활약해온 기사, 미겔은 이번 원정에 흔쾌히 참여했다. 물론 그가 거부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는 아니었지만 억지로 끌려가는 것과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만약 이번 원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의 실력이라면 일부러 무리하지 않는 한, 변수가 생겨 테라 방벽이 무너질 정도의 공격을 받지 않는 한 이 년 조금 더 남은 시간을 버티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으니까.
‘누구 맘대로 이대로 끝내?’
테라 방벽에 오기 전, 그는 그렇게 실력 있는 기사는 아니었다. 애초에 테라 방벽에서 복무하게 되었다는 소리는 실력이 없거나, 배경이 없거나, 둘 다 없거나. 셋 중 하나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런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테라 방벽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압도적인 실전경험 덕분이었으나 그 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얻어맞는 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지. 하지만 그렇게 경험을 쌓았으면 적어도 한 대는 때려야지 않겠어?’
실력이 좋건 좋지 않건, 배경이 좋건 좋지 않건 그가 기사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가 선택받은 1%, 아니 0.1%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의 젊음이 한 곳에 갇혀 몬스터에게 얻어맞고만 있다가 끝난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걸 못 타보는 건 아쉽지만······.’
글로리를 흘낏 바라보다가 훌쩍 뛰어 등을 보인 오우거의 등을 갈랐다. 오우거가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나 좀 죽여줍쇼 하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싸울 의지를 상실한 적에겐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공격이 아닌 방어만을 해야 했던 지난 시간들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퍽 마음에 들었다. 저들처럼 글로리에 탑승하여 본인을 죽도록 괴롭혔던 상위종을 평범한 몬스터 베듯 베어보곤 싶었지만 이 대업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늘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가 하나 더 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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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도 평범한 마법사보다는 쓸 만할 겁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군.”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렇습니다.”
몸 상태는 나쁘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내제된 마력이 항상 최선의 몸 상태를 유지시켰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몸 상태는 최악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 다시 지난번과 같은 전투가 벌어진다면 지난번처럼 쉽사리 넘어갈 수는 없겠군.”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진격을 멈추고 이 곳에 전진 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곳에?”
“예.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병사들이 피로가 심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몬스터가 모여든 지점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우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전진기지를 만들어두어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낮에는 잦은 전투를, 밤에는 삼엄한 경계를 유지해야했으니 병사들의 피로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효과적으로 몬스터를 통제하고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라도, 후속 부대를 위해서라도 여러 개의 기지가 필요할 터, 이쯤하면 하나 정도는 설치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애초에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니 마법사들을 동원한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다른 부대는 어떻습니까? 저희 부대에 이 정도 규모가 몰려들었으니······.”
“제 4, 5부대가 우리처럼 대대적인 공세를 받았지.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긴 했지만 괴멸과 다름없는 피해를 입었으니 각각 6, 7부대와 합류하라 전했다.”
“그 정도라면 제아무리 몬스터의 대지라 하더라도 쉽사리 메울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일대가 텅 비어있을 테니, 이쯤해서 전체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옳은 판단이다. 우리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눈앞의 작은 것에 매달릴 필요는 없으니.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회복에 집중하도록 해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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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마법사,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덕분에 전진 기지는 빠른 속도로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원정이 계속되면서 질척이던 땅 또한 점점 메말라 더 이상 땅을 뒤엎을 필요도 없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평지이기에 벽을 쌓을 바위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마법사들이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는 점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이었다.
그러는 동시에 후방에 사람을 보내어 후속 부대의 추가적인 지원과 함께 확보한 지역에 매장되어있는 광물의 채광을 시작하라 일렀다.
그러는 사이 기지의 외벽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고 병사들 또한 매일 밤, 엉성한 나무 울타리에 의지해 불안한 잠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성벽과 함께 숙면을 취하며 그 동안 원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부대들과 연계하여 내부로 몬스터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순찰을 계속했고 경계를 이루는 크고 작은 기지의 숫자들은 점점 늘어나 벽만 이어지지 않았을 뿐, 장성이라고 해도 무방한 방어선이 구축되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몬스터들이 가만 보고 있지만은 않았으나 몇 번의 대전투로 죽은 몬스터의 숫자만 십만을 훌쩍 넘겼으니 제아무리 몬스터의 번식이 빠르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메울 수 있는 피해가 아니었다.
물론 몬스터의 대지에 살아가는 몬스터의 숫자는 아득히 많겠으나 녀석들이 인간들처럼 지휘체계가 있어 후방으로부터 전방으로 이동해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몬스터들에게도 각자의 영역이 있는 만큼 근래는 몬스터를 마주하지 못하거나 마주하더라도 정말 보잘 것 없는 규모를 마주했을 뿐이었다.
“터졌다!”
“으, 은입니다!”
“발견한 것 같습니다!”
황제는 부족한 사정에도 계속해서 군사들을 보냈다. 이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망설인다는 것은 곧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짐을 의미했기에. 그리고 위험성 높은 도박은 성공했을 때, 더 큰 보상을 의미했다.
고대, 인간이라는 종족이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간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았던 곳이 몬스터의 대지였다. 수천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보고. 그 안에 매장되어있던 광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그 일부만을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정에 소모된 군비를 가뿐히 넘기는 수준에 원정을 바라보던 수많은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 황제가 그리 바라고 바라던 탐욕이 깃들기 시작했다. 원정이 시작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이제껏 확보한 지역은 몬스터의 대지 전체에 일 할이나 될까. 지금까지 확보한 광산은 넘겨주더라도, 이제부터 원정에 참여하더라도 그들의 탐욕을 채워줄 재물은 충분하리라는 판단을 내리는 귀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