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5화 - >
다행히 그 날 저녁은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갔다. 몬스터가 습격해오지도 않았고 어둠을 틈타 탈영하는 병사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전 전투에서 타이탄이 보여준 신위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했기에, 게다가 테라 방벽에 도착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도망쳐봤자 테라 방벽을 넘는 것이 아니고서야 탈영했을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추격 중지! 전열을 갖춰라!”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작은 전투와 수십, 수백 번의 전투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운 일방적인 학살을 거듭하며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나 순조롭게.
“이상한 일입니다.”
“이상하군.”
“예.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 전투가 벌어질 듯합니다.”
내가, 장인어른이,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 알고 있는, 경험한 몬스터의 대지는 고작해야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일주일에도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침공해오고 죽는 곳이, 다음 주가 되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또 다시 쳐들어오는 놈들이 몬스터의 대지의 몬스터들이었다.
물론 계속된 전진을 통해 다섯 자리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냈지만 우리가 이 곳에 머문 시간을 생각한다면, 몬스터의 대지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테라 방벽이 아닌 몬스터들의 입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이상했다.
“정찰병을 조금 더 멀리까지 보내도록 하고, 밤의 경계도 보다 철저히 하는 것이 좋겠어. 자네가 마법사들을 다독여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체 병력의 1%도 되지 않는 숫자의 마법사들. 그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하는 일은 무척이나 많았다. 전투에도 참여해야 했으며 전투 후 뒤처리와 밤의 경계를 위한 마법 설치에 이르기까지. 원정대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마법사들의 힘이 없었다면 몇 배의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놀고먹는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기사들과 비교해도 적은 숫자 덕분에 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날 밤, 잠을 자다 악몽 끝에 잠에서 일어난 나는 불길한 느낌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 되겠다.”
이제는 꽤나 오래 전 일이 된 드래곤 사냥을 끝마치고 녀석의 피를 뒤집어 쓴 이후로 내가 가지게 된 감각은 범인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하게 되었다.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덕분에 생긴 감각인지 경지가 올라가게 되며 자연스레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 감각이 나를 배신한 경우는 지금껏 없었다는 것.
촤륵-
“으음.”
이번에도 내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지도(地圖)의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을 때, 북쪽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으로 표시되고 있었으니까. 거리를 꽤나 멀었으나 마력 반응의 이동속도를 감안했을 때, 이 곳까지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감각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며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장인어른!”
“······이 밤중에 무슨 일······.”
“이걸 보십시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부대는 순식간에 비상 체제로 돌입했다. 그러나 잘 훈련받은, 제국에서도 최정예라 자부할 수 있는 부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밤중에 느닷없이 걸린 비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혼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긴급히 소집된 지휘관들. 그에 뒤이어 밤중에도 정찰을 나갔던 병사가 복귀하여 상황을 알렸다. 일찌감치 준비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정찰병이 온 뒤에 준비를 시작했다면 제 시간에 맞추기가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온다!”
“우리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
꼴깍-
몬스터의 파도가 밀려온다. 포위만 당하지 않았다 뿐이지, 인간의 몸으로 몬스터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본인을 믿고 본인의 옆에 있는 동료를 믿고 들고 있는 창을 있는 힘껏 찔러 넣는 수밖에 없었다.
펑- 펑-
마법사들이 쏘아올린 등불이 하늘 높이 치솟아 땅을 비췄다. 밤중에 멀리까지 훤히 비치는 빛은 몬스터를 끌어 모을 수도 있었지만 얼핏 봐도 일대의 모든 몬스터가 몰려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숫자였다. 지금까지의 전투답지 않은 전투들로 하늘 높이 치솟았던 병사들의 자신감을 가차 없이 깎아내릴 정도로.
‘제, 젠장. 위험해. 위험하다고!’
‘우리보다 몇 배는 많잖아. 죽었다······.’
‘아아, 아버지 어머니. 못난 아들, 먼저 갑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항상 최선두에서 몬스터를 학살하던 타이탄도 섣불리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했다. 제아무리 타이탄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무적의 존재는 아니었고 숫자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그들을 피해가는 말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존재만을 제외하고선.
지크 후작과 그의 전용기 가더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물량의 몬스터 무리를 앞에 마주하고도 망설임이 없었다. 누구보다 앞서 달려 나갔고 검을 휘둘렀다. 그 앞에선 상위종이 되었건 대다수를 차지하는 흔한 몬스터가 되었건 똑같았다. 단지 칼에 베여 죽느냐, 다리에 치여 죽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거, 나도 가만히 놀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까지의 전투와 달리 레닐은 이빨과 발톱, 두 자루의 총을 꺼내지 않았다. 그 동안의 전투 아닌 전투들에서 레닐은 타이탄과 발맞춰 상위종을 빠르게 제거하는 데 힘을 썼다. 상위종이 입힐 수 있는 피해가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병사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이만이 약간 안 되는 가운데 몬스터의 숫자는 수만을 훨씬 넘어섰다.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물량에 그대로 밀릴 수가 있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은 소중했다. 백병전의 꽃이라는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소수, 끝도 없이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체력적으로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일반 몬스터에게 발목을 붙잡히지 않고 상위종을 상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영역의 라인을 긋는 것이니만큼 이런 곳에서 쉽게 잃을 수는 없었다.
“이런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기사가 백병전의 꽃이라면 마법사는 전쟁의 꽃이었다. 강한 항마력을 보유한 타이탄이 그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를 전쟁의 꽃이라 불리게 만들었던 화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불 속의 불, 화염을 불태우는 화염이여······.”
레닐의 몸속으로부터,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마나가 레닐의 가슴팍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창이 이어질수록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한 마력은 점점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고 끝을 모르고 모여드는 마나에 전투에 참여중인 기사들조차도 집중하지 못하고 한 번씩 힐끔거리며 실수로라도 저 마력이 본인들을 향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내재된 마력 덕분에 기본적인 항마력이 있는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저 마력에 휘말렸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스스로를 제물삼아 적을 불태워라.”
그러니 일반 병사들은 무엇 하겠는가.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덕에 공포에 떨 일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 그렇기에 레닐이 노리는 곳 또한 몬스터와 병사들이 얽혀있는 정면이 아닌 점점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는 후방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았기에, 지크 후작이 앞으로 들어가며 자연스레 초승달 모양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여전히 대다수가 뭉쳐있었으니 화력을 투사하기에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법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마력을 모았지만 드래곤의 피 덕분에 남들의 몇 배가 넘는 마력을 보유한 나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으며 이 정도로는 한숨 돌릴 수 있을 뿐, 결정적인 일격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전이(轉移)
내 마력이 허락하는 한, 불꽃이 불꽃을 타고 주변을 휩쓸 터였다.
‘역시 쉽지 않군.’
마법과 각인의 결합. 연구를 시작한 지는 꽤나 오래 되었고 실제로 사용해 본 적도 있었다. 다만 이 정도 마력량을 동원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 어떤 광경을 보여줄지, 만약 실패한다면 레닐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화르륵-
마력이 불꽃으로 화한다. 아직까지 레닐의 제어 속에 머물고 있는 마력 덩어리. 스스로가 실전에 더욱 강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레닐은 마치 제 몸의 일부처럼 마력을 다뤘다. 그리고 몬스터 무리를 향해 한줄기 불꽃이 떨어졌다.
화아아악-
끄에에엑-
끼에엑-
그러나 한줄기 불꽃이 만들어낸 광경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떨어지자마자 화염폭풍을 만들어내며 일대를 휩쓴 마법은 이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내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불사르고 있는 몬스터를 제물삼아서.
“모두 물러나라!”
“죽기 싫으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아직까지 화염은 레닐의 제어 하에 놓여 있었고 레닐은 최선을 다해 화염을 제어했다. 덕분에 화염은 사람을 향해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않고 몬스터의 후방을 향해, 양 날개를 향해서만 번져가고 있었지만 범위가 넓어질수록 레닐 또한 점점 힘에 부치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가공할 위력이었다. 몬스터를 상대로 했기에 다행이었지, 대상이 인간이었다면 눈으로 보기 힘든 참극이 벌어졌을 정도로.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가더는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정말 괴물을 만들었군.’
가더에 탑승한 지크 후작의 상태가 어떤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버티기 버겁다면 무리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을 터, 검을 휘두름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가더의 대(對) 마법진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물리력이 아닌 마법으로 타이탄을 격추하는 광경은 보기 힘들겠군.’
물론 모든 타이탄이 가더 혹은 루인 같지는 않아서 일부는 지크 후작의 모습을 보고는 화염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황급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타이탄에 달라붙어 쉽사리 꺼지지 않는 불길, 그러나 기사들이 항마에 집중하자 이내 사그라졌다. 멀리서 짐작컨대 저 정도라면 마법진만 다시 새겨주면 큰 무리 없이 전장에 복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더 이상은 무리다.’
화염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강해질수록 그와 반비례해 레닐의 힘을 떨어져가고 있었다. 결국 레닐의 손을 떠난 마법은 더 이상 내킬 것이 없다는 듯 잔존 마력이 떨어질 때까지 위세를 부렸고 언제까지고 빛을 발할 것만 같았던 화염이 사그러든 이후, 미리 한 발자국 물러나 화염을 피할 수 있었던 병사들이 마주한 것은 불타 한 줌의 재로 화한 몬스터들과 살아남았으되 살아남은 것이 아닌 상위종들, 범위를 가까스로 벗어나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 몬스터들뿐이었다.
마법 한 번으로 몇 배가 넘는 숫자차이가 반절, 그 이상으로 줄어들었으니 고기 타는 냄새가 일대에 자욱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