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4화 - >
거리가 좁혀지자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 무리의 구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 섭섭한 오크나 오우거는 당연하고 드레이크나 사이클롭스 등 평소 무리를 짓지 않는 몬스터들도 간간히 보였다.
‘신기한 일이야.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저 녀석들을 통틀어 몬스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작해야 ‘몬스터’라는 한 분류로 퉁 칠 정도로 녀석들은 단순하지 않았다. 같은 산짐승이라고 하더라도 곰과 호랑이가 같은 종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만 보더라도 그렇다. 외형부터 습성까지 온 몸으로 자신들이 다른 종임을 알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 손만 뻗으면 닿는 먹잇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끼리 같은 무리를 이루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저 녀석들이 태어날 때부터, 아니 각각의 종이 탄생할 때부터 인간이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설정되어있지 않고서야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나저나······. 나까진 나설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장인어른의 전용기인 ‘가더’를 중심으로 몬스터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듯 나열한 글로리의 위세는 얼핏 보기에도 수천이 넘어가는 몬스터 무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타이탄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은 얼마 전의 연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몬스터들이 들이닥치자 연설을 통해 눌러놓았던 두려움이 샘솟는 듯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옆의 동료를 믿고, 앞의 기사들을 믿고 창을 곧추세워라!”
그러나 잠시 후면 그들의 눈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신감이 대신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십 년이 넘게 내가 필사적으로 준비한 안배는 고작해야 첫 걸음부터 막힐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으니까.
“돌격!”
“으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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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아니 이걸 전투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병사들과 평범한 몬스터 간에는, 기사들과 상위종 간에는 전투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았다. 교환비가 어떻게 나옴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가더를 비롯한 타이탄에게 있어 이번 전투는 전투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지.
뚝뚝-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동원하면 넉넉히 셀 수 있는 숫자의 타이탄들은 베테랑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적을 마치 양 떼 속의 늑대들처럼 일방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손실 0, 기능 이상 0.
본격적인 전투는 처음이었기에 소수의 흥분한 탑승자들이 과도하게 마력을 운용하다가 탈진하기는 했어도 그거야 조금 쉬면 낫는 일이고 그들이 제거한 상위종의 숫자가 세 자리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승도 이런 대승이 없었다.
특히나 잔챙이들은 손 한 번,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밀고나가며 무차별적으로 찢어버리거나 짓밟아버리는 모습은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소름이 돋는, 식은땀을 흘리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고작 이 정도 규모를 상대하면서 지쳤단 말이냐?”
“가, 각하. 그것이······.”
“어쭙잖게 자만에 빠져 수련을 게을리 했으니 그런 꼴이 나는 게지. 한 번만 더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반지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 것이다.”
전투 이후 뒤처리에 부대가 분주할 때, 과도한 마력 운용으로 인해 강제로 휴식에 들어선 기사들을 지크 후작은 거세게 몰아쳤다.
그 중에는 중앙에서 갓 올라와 혈기로 뭉쳐 처음으로 접하는 대규모 전투가 뿜어내는 피와 분위기에 취한 이들 뿐만 아니라 테라 방벽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서 장인어른의 질타가 끝나자마자 가서 물었다.
“왜 그런 실수를 했습니까?”
왜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냐고. 전자의 인물들은 이해를 한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 맨 몸으로는 불가능한 강력한 힘을 가진 채, 원래대로라면 파티를 만들어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 상위종을 상대로 혈혈단신으로 볏짚을 베듯 베어버렸는데. 스스로도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테라 방벽에서 살아남아 꾸준히 활약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실력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글로리를 배정받았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최정예, 최상위권의 경험과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린 뒤에 변명을 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만, 솔직히 신났습니다.”
“신나요?”
“예. 백작님께서도 경험하셨기에 알고 계시겠지만 그 동안 저희의 입장은 항상 얻어맞는 입장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공과 수가 역전된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신났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약간은 재밌는, 동시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대답이었다. 테라 방벽이 완공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테라 방벽은 관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철저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용도로서.
몬스터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쳤고 우리들은 항상 긴장 속에서 반격다운 반격은 꿈꾸지도 못한 채, 공격을 받아내어야만 했다. 유일한 원정인 가을 원정 또한 겨울에 조금이라도 약하게 맞으려는 것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을까.
그런데 몇 백 년의 울분을 지금 이 순간 풀어내고 있었으니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쉬이 평정을 지켜낼 수 없었으리라.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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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정리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몬스터의 시체는 구덩이를 만들어 모두 태웠다. 그렇지 않으면 질퍽질퍽한 대지 상황을 봤을 때, 몬스터가 아닌 역병 때문에 부대를 물려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차라리 겨울이었다면 이런 면에서는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대신 전투 소모가 급격히 치솟았겠지.’
쉬지 않고 내리는 눈과 걸핏하면 휘몰아치는 눈보라 등은 전투의 난이도를 지금의 몇 배로 치솟게 할 것이며 후속 부대의 지원 또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곳은 제대로 된 거점을 건설하지 않는 이상 인간이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최우선 목표도 겨울이 오기 전, 제대로 된 거점을 마련, 수많은 거점이 울타리 역할을 하며 안전 구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에 실패한다면 그 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겠지. 우리가 웅크려있는 동안 몬스터들은 우리가 간신히 확보해놓은 구역으로 꾸역꾸역 들어올 테고 올해 한 행동을 내년에도 똑같이 해야겠지.
‘그럴 수는 없지.’
몬스터의 대지를 향한 원정은 결코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꾸준한 지원이 계속 이어져야만 가까스로 달성 가능할 대업. 그렇기에 안전 구역을 만드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해야만 했다.
황제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귀족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서,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하던 귀족들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몬스터의 대지 안에 묻혀있는 지하자원을 제국 내부로 끌어와야 한다고.
“오늘은 이 곳에서 머문다. 모두 준비할 수 있도록.”
“예!”
다행히 생각을 하는 동안 더 이상 몬스터가 습격해오지는 않았다. 마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전과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했기에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치거나 타이탄을 비롯한 기사들만으로도 녀석들을 치워버리기엔 충분했다.
들썩들썩-
마법사들이 땅을 질퍽거리는 땅을 뒤집어 마른 땅을 바깥으로 꺼냈다. 그제야 병사들이 준비된 천막을 꺼내며 진영을 만들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매의 눈으로 주변을 감시했다.
“이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은 거수.”
나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손을 들었지만 그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나 때는 매년 있었던 가을 원정이 스콜피온의 배치와 함께 규모가 줄어들거나 아예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잤었나?”
“땅굴을 파고 지하로 숨어들어 잠을 청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밤은 몬스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말하지. 고작 전투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하는 녀석이 있다면 당장 튀어나와라. 똑똑한 적보다 두려운 것이 멍청한 아군. 나는 내 부대에 그런 멍청이를 놔둘 생각이 없다.”
밤의 몬스터는 무섭다. 애초에 밤이라는 환경 자체가 인간에게 이로운 환경이 아닐 진데 밤의 몬스터는 한층 더 흉포해진다. 달의 마력이 몬스터를 흉포하게 만든다는 설도 있고 인간 못지않은 시력을 보유한 몬스터들이 시야가 어두워지자 작은 자극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는 설도 있었다.
두 가설을 제외하고도 몇 가지 가설들이 더 있었고 제각각 나름대로의 근거 자료도 있는 가설들이었지만 어떤 가설이 정답이건 간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몬스터가 한층 흉포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방심하지 마라. 너희들이 방심해도 되는 때는 모든 것을 끝마치고 테라 방벽 안으로 들어왔을 때뿐이다. 알겠나?”
“예!”
후우-
짧은 회의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한기가 나를 덮쳐왔다. 봄이 왔다고 하지만 아직도 입김이 서리는 것을 보면 진정한 의미의 봄이 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장인어른이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모아 방심하지 말라 재차 확인한 것은 정말로 방심하면 안 되기 때문에, 방심하기 쉬운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 몬스터를 상대로 너무나 쉽게 승리를 거뒀다. 사상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한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특히나 타이탄의 활약은 과도한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 기존 북부의 병력들은 걱정이 없겠으나 비교적 경험이 없는 중앙군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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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군,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제 3군도 이하동문입니다.]
[나머지도 별 문제 없나?]
[그렇습니다!]
그 시각, 지크 후작은 레닐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미리 준비해둔 통신구를 통해 각 부대의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첫 날이니만큼 각 부대에 큰 문제는 없었고 밤 동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통신구의 역할을 끝냈다.
“정말로 여기까지 올 줄이야.”
토해내듯 혼잣말을 한 그는 그제야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봐야 세상물정 모르는, 재능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의 패기 넘치는 목표 정도로 생각했던 일이 벌써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그로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그의 사위가 가지고 온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은퇴하고 고향에서 손주를 보며 남은 가족들과 함께하자는 내용의 편지가.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에 즉답을 피했지만.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