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3화 - >
“적응은 좀 하셨습니까?”
“한 평생 해온 일에 무슨 적응이 필요하다는 게냐?”
내 질문에 뻔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 타박이 따라왔다. 나로서는 걱정 섞인 질문을 했을 뿐인데 타박이 따라오니 당황스러울 뿐, 그도 그럴 것이 당연한 질문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세 자리 수가 넘어가는 타이탄이 되었고 그 말은 즉 똑같은 숫자의 기사들이 타이탄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동기율을 확인하기 위해 테스트를 거쳤던 이들까지 합하면 몇 배의 기사들이 타이탄을 조종해봤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이들 중 천재라고 불리는 극히 일부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동기율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타이탄이 인간의 몸과 제아무리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몸이 아니었으니까. 수십 년간 움직여온 몸을 떠나 새로운 몸을 움직이는데 위화감이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이들이 그 소리를 듣는다면 꽤나 황당해할 겁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것을, 부족함을 안다면 스스로 더 노력해야 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는 녀석이 있다면 말해라. 기사로서 검을 들 가치조차 없는 녀석이니.”
본전조차 찾지 못하는 거래를 계속 이어갈 어리석은 상인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이어가봤자 타박밖에 듣지 못할 주제를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없었고, 타이탄이라는 주제를 곱게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나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꺼내들었다.
“받으십시오. 매형과 아내가 꼭 좀 전달해달라고 하더군요. 추가로 설득도 해달라고 했고요.”
“설득?”
“몬스터의 대지 정벌이 끝나면 고향에서 손주 녀석들의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내시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아마 편지에도 똑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을 것이다. 천천히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려간 장인어른의 얼굴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어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사리 읽을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나를 늙은이 취급하는 게냐?”
“그 누가 장인어른을 늙은이 취급하겠습니까. 단지 의사를 여쭤봤을 뿐입니다. 평생을 제국을 위해 싸워오지 않으셨습니까. 남은 인생, 가족들을 위해 쏟아달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번 정벌이 끝나면 테라 방벽은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다.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하겠지만 소수의 병력으로도 그 정도 역할을 충분. 장인어른씩이나 되는 인물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정벌에 필요한 시간과 정벌이 끝난 뒤 뒷정리에 필요한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이번 대 황제의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할 터, 더 이상 장인어른을 비롯한 노년들의 마지막 불꽃은 지금 이 곳, 이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른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이 장인어른께서 일선에 서는 마지막 전쟁일 거라는 것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신경이 팔려 당장 해야 할 일을 망쳐버린다면 그것보다 멍청한 일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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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은퇴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나도, 장인어른도 없었다. 그러나 조급해하진 않았다. 시간은 많았으며 장인어른께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애초에 장인어른의 성격상 그 자리에서 경을 치는 것이 아닌 생각해본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그럴 마음이 있다는 증거와 다름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 뒤에서 재촉해봤자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었다.
“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 최소 다섯 방향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이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테라 방벽의 상층부는 각종 회의로 분주했다. 멀지 않은 협곡을 지나서면 장애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기에 어떤 방법으로 정벌을 시작할지 서로 간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평화가 지속되면서 지휘관들이라고 하더라도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인간과 인간의 전쟁과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몬스터와의 전투라고 해봤자 사냥 혹은 일반적인 토벌 경험밖에 없는 중앙군과 가을 원정이 있었다지만 이런 대규모 공세는 처음인 북부군의 회의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움에 있어 난항이 있을 수밖에.
“그만! 목소리를 높이는 건 그쯤이면 되었네. 지금부터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휴즈 백작.”
“예. 각하.”
“설명하게.”
부족한 경험, 과한 자신감, 북부군과 중앙군의 미묘한 알력다툼에 각자 맡은 군세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병력과 타이탄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에 이르기까지, 회의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산적해있었으나 회의 자체는 어느 순간부터 약간의 막힘을 제외하면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로야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첫 번째 이유로는 제각각 소속이 다른 만큼 공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 황제가 정벌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제외하고 황제의 결정에 수긍한 귀족들의 병력만을 동원했기에 공이 아닌 목표를 위해 하나로 뭉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최고지휘관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지크 후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전전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일평생을 제국을 위해 검을 휘둘러온 살아있는 전설. 특히나 그가 오랫동안 몸을 담아온 제국 북부에서만큼은 그 누구를 데려와도 장인어른의 아성을 뛰어넘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그가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하자 그 누구도 섣불리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지휘관은 지휘관대로, 기사들는 기사들대로,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제각각 봄에 시작될 정벌의 시작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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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언제까지고 내릴 것만 같았던 눈은 자취를 감췄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쌓여있던 눈은 흔적만을 남긴 채, 녹아 사라졌다. 그 영향으로 대지 또한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질척거리기 시작했지만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겨울보다는 나았다.
“준비는 모두 끝났나?”
“예!”
“문제없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회의 끝에 원정군은 일곱 부대로 나뉘어 몬스터의 대지를 향해 뻗어나가기로 결정했다. 각 부대는 진격 방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일만 이상의 병력으로 구성되었고 글로리 또한 열 대 이상씩 배치되어 선봉을 맡았다.
자연스레 테라 방벽의 방어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일곱 방향으로 나아가는 만큼 큰 문제가 발생하리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몬스터의 대지에서 발생하는 몬스터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맞았으나 몬스터 또한 생명체였으니까.
몬스터라고 하여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는 않을 테니. 테라 방벽이 위치한 협곡을 시작점으로 청소하듯 밀고 나가면 제아무리 평소에 비해 방어력이 약해진 테라 방벽이라지만 유의미한 위협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나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판단이었다. 물론 언제나 만약의 경우가 있으니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두었지만.
“다 모인 것 같군.”
테라 방벽의 중앙에 위치한 성문, 그 바깥으로 이렇게 많은 숫자의 인간이 자리한 적이 있었을까. 단언컨대 내 경험으로는, 아니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원정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생각해봤을지언정 그 누구도 실행으로 옮긴 적은 없었기에.
몬스터의 대지는 인류에게 있어 미지의 땅이자 적들의 본거지였으며 감히 공세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실존하는 위협이었다. 그렇기에 성문 밖에서 지크 후작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빛에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지크 후작은 모르지 않았다.
“긴 말 하지 않겠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병사들, 그 중 일부의 눈에 자신감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테라 방벽에서 살아남은 병사들. 지크 후작이 보여준 신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그들에게 있어 지크 후작은 신에 가까웠다. 전투의 신. 그런 만큼 지크 후작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물론 북부의 실상을 소문으로만 듣다가 짧은 시간동안 수박 겉핥기로 몬스터의 대지의 공포를 체험한 중앙군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번 전쟁은 지금껏 너희들이 알고 있는 전쟁과는 다르다. 윗대가리들의 욕심과 욕망으로 점철된, 너희에게는 희생만을 요구했던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 너희들의 적은 지금껏 너희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부모님과 자식을 모시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아닌 너희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너희들이 죽고 난 이후까지 너희들을, 너희의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한낱 먹잇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연설에 훌륭한 말솜씨는 필수적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원한다면 지금 이 연설을 보기를 추천하고 싶었다.
지크 후작에게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뛰어난 말솜씨는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달변만이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두렵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지금 이 순간 두려워한다면 너희의 가족들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할 테니까. 도망치고 싶나? 도망치지 마라. 너희가 지금 이 순간 등을 보인다면 너희의 가족들이 등을 돌려 도망쳐야 할 것이다. 그런 광경을 원하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아가라. 내가 너희들의 앞에 있을 테니,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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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출구를 기준으로 9시부터 3시까지, 각각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곱 부대. 그 중 가장 위험한 부대를 꼽자면 단연 12시, 정면을 맡은 1군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대라고 위협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빠르게 몬스터의 대지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부대였으니. 그렇기에 나와 장인어른이 동시에 1군에 속해 있었다.
또 하나의 비대칭전력인 퐁크 후작의 경우에는 소수정예, 에이스들만 모아 별동대로 일찌감치 출발했다. 누군가를 지휘하기보다는 본인의 무력을 뽐내는 것이 장기이다 보니 특정 부대를 맡기보다는 내부를 휘저으며 위험에 빠진 부대를 구원하는 쪽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에 내린 결정이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무슨 기분 말이냐.”
“장인어른께 이 곳은 증오의 장소이지 않습니까. 쏟아지는 공세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지금은 역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는 너는 어떠냐.”
“예?”
“십년도 전에, 내게 말하지 않았나. 증오의 연쇄를 끊어 보이겠다고. 그 결실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갔는데 기분이 어떠냐는 말이냐.”
우르르-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정면에서 기다리던 ‘적’들이 나타났다.
“일단 저 녀석들을 상대한 뒤에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되었다. 네 기분이나 내 기분이나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 같으니. 모두 전투 준비를 하라 일러라.”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