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2화 - >
황도 북쪽의 황야. 평소라면 소수의 여행자들과 황도로 향하는 상인들 외에는 인적이 드문 지역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 세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이 곳보다 인구 밀집도가 높다고 할 수 없으리라.
여섯 자리를 넘어서는 숫자의 병사들과 네 자리 수의 기사들, 세 자리 수의 타이탄까지. 제국 군사력의 반절,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숫자는 부족할지언정 그 동안 제작된 타이탄이 한 대도 빠짐없이 이 곳에 모여 있었으니까.
휘이잉-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과 별개로 평야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그들이 숨을 쉬는 소리가, 갑옷의 절걱거림이, 타이탄의 기동음이 생생히 들릴 정도로.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정면에서 한 사람이 준비된 단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고작해야 한 사람일 뿐이다. 단상 앞을 가득 메운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 혹은 천이 넘는 기사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다를 것 없는 한 명의 인간. 그러나 그 한 명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그를 바라보는 좌중을 휘어잡을 정도로 거대했다.
“걸작이군.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법으로 증폭된 덕분에 무리의 끝에 위치한 이마저도 무리 없이 들을 만큼 널리 퍼졌으며 중간 단계를 거쳤음에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그대들은 알고 있나? 무엇을 위해 그대들이 이 곳에 모였는지, 그대들이 향할 곳은 어디인지, 그대들이 상대해야할 적은 무엇인지?”
“예!”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흔들렸다. 짧지만 굵은 함성은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웠으며 높게 치솟은 파도처럼 거침없었으니 황제는 그 기세가 만족스러웠던 듯 연설을 이어갔다.
“그대들이 향할 곳은 그대들도 알고 있다시피 머나먼 북쪽, 테라 방벽 너머의 몬스터의 대지다.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춥고 척박하며 잔혹한 적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지.”
담담한 황제의 말 이외에 어떤 소음도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들 모두가 이어질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내 결정을 두고 이리 말하더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테라 방벽만 지키고 있으면 몬스터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엇을 위해 그런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냐고. 그런 쓸데없는 땅덩어리를 얻어 무엇을 하겠냐고.”
쾅-
“그 따위 말을 하는 놈들에게 묻고 싶다. 백성을 지키는 일이 왜 쓸데없는 일이냐고. 제국의 자식들을 지키는 일에 피해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일에 감수해야 하느냐고. 그들의 끝없는 탐욕?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비극? 반짝이기만 할 뿐인 금은보화?”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좌중을 휘어잡는 마력이라도 섞인 것처럼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 누구도 시선을 떼지 않았고 집중을 잃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에 선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고작해야 허울뿐인 욕망을 위해 자식을 사지로 모는 부모는 없는 법! 나 또한 그렇다. 제국의 어른으로서 어찌 아들들을 사지로 몰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이 이 곳에 모여 있는 이유는 이번 전쟁은 그 동안 벌어졌던 전쟁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에 닿는 모든 곳이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으나 마치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성전! 우리가 지금부터 겪어야하는 전쟁은 성전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인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한 성전! 그렇기에 나는 그대들에게 피를 흘리라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번 전쟁은 나의, 위에 선 자들의 허망한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그대들의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지키기 위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연설이 계속 될수록 병사들의 눈에는 다짐이, 결의가 솟구쳤다.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해 벌어지는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황제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으니까. 무릇 지킬 것이 있는 자는 강해지는 법이었다.
“나아가라! 신께서 그대들을 인도할 것이다! 흘려라! 그대들이 흘린 피는 가족들의 눈물을 대신할 터이니, 죽여라! 그대들의 손에 피를 묻힌 만큼 그대들의 가족들은 평화를 누릴 지니!”
“우와아아아아아아!”
쿵쿵쿵-
십만이 넘는 사람이 외치는 함성은 주변 일대를 벌벌 떨리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병사들은 마치 집단으로 광기에라도 휩싸인 듯 발을 구르고 각자의 손에 쥔 무기를 흔들었으며 목이 쉬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함으로서 그들이 정말로 신에게 선택받은 전사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싸워라! 설령 그대들이 죽더라도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며 그대들의 이름은 모든 인류를 지켜낸 전사로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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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연설, 괜찮았나?”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범인이었다면 저 또한 저들과 다를 바 없이 흥분에 빠져있었을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괜찮은 연설이었나 보군.”
모두를 열광 속에 빠트린 연설을 마무리하고 단상 밑으로 내려온 황제의 뒤에 붙었다. 십만이 넘는 병력의 출정식치고는 그리 긴 연설이 아니었기에 황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으나 약간의 자조감 또한 느껴졌다.
‘성전이라, 말은 좋지.’
표면적으로 보면 황제의 연설에 틀린 말은 없었다.
성전.
몬스터는 인류에게 같은 인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런 몬스터들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의 대지를 정벌하는 전쟁은 성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성전은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이번 전쟁은 개인적인 복수였으며 황제에게는 귀족들에게 쏠려있는 권력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 연설에서 줄기차게 말했던 것처럼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구한다는 드높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네 역할이 막중해. 조만간 나에게 좋은 소식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황제는 내 어깨를 한두 차례 두들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와 돌아섰다.
황도와 테라 방벽.
서로 향하는 곳도 달랐고 해야 할 일도 달랐다. 그러나 서로의 역할에 충실할 때, 둘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라. 예전처럼 앞뒤 분간 못하다 다치지 말고. 이제 네 몸은 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몸조심하세요.”
“물론이지. 돌아올 때까지 루이즈를 지켜줘.”
“기다리고 있을게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아부부부!”
“공주님. 엄마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어야 해요? 아빠가 금방 다녀올게요.”
“아버님을 잘 부탁한다.”
“솔직히 장인어른이 다칠 정도면 그 누가 나서도 똑같을 겁니다.”
“그래도. 북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말년은 손자, 손녀들 재롱도 보면서 편히 지내셔야지.”
“걱정 마십시오. 꼭 그리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북쪽으로 향하는 기나긴 행렬에 나도 몸을 맡겼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오래전 과거가 생각났다. 내가 채 스물이 되지 않았던 그 때, 테라 방벽으로 향하며 떠올렸던 생각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똑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내가 받아들여야만 했었던 테라 방벽에서의 십 년이라는 세월은 그야말로 기약 없는 약속과도 같았다. 전생에 군대에서 보낸 이 년만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 그보다 더 가혹한 환경인 테라 방벽에서, 다섯 배나 더 긴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모님께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두려웠었다.
여러 행운과 불운, 선택과 우연이 겹치며 몇 년 만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 한 선택은 채우지 못했던 시간을 다시 한 번 돌리는 것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낼 지도 모르고.
‘떳떳한 아버지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좋은 아빠, 친한 아빠는 못 되겠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십 년을 넘을지도 몰랐다. 그 시간 동안 루이즈에게 아빠란 아내와 주변인들에게 말로밖에 들을 수 없는, 그림으로밖에 볼 수 없는 존재일 터였다.
만약 내가 이번 전쟁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귀환하더라도 정상적인 관계의 부녀관계는 기대하기 어려울 터였다. 재회했을 때, 누구냐고 묻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내가 선택한 결과이니 어디에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빨리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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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도 오는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인어른.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다행입니다.”
“반가운 얼굴도 있는 반면 보기 싫은 얼굴도 하나 딸려왔군.”
“으하하하. 너도 전용기를 받았다고 하던데, 어디 한 번 한 판 붙어보자고!”
테라 방벽까지 오늘 길은 평화로웠다. 제국이라는 인류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탓에 대도시 주변이 아닌 이상에야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십만이 넘는 군세의 앞길을 막기에는 테라 방벽 내의 몬스터들은 힘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도착한 테라 방벽과 정말 오랜만에 뵙는 장인어른의 모습은 내 기억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높고 단단했으며 장인어른도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으나 나이를 생각한다면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셨다.
물론 그 얼굴이 찌푸려지는 데는 약간의 시선 이동과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한 판 붙기는 무슨. 그럴 힘이 남아있으면 밖에 나가서 몬스터나 한 마리 더 죽여!”
“크하하하!”
사실 궁금하긴 하다. 마스터들끼리의 대결조차 본 적이 없는데 현존하는 가장 위력적인 타이탄에 탑승한 마스터들끼리의 결투는 어떤 결과를 나을 것인가.
물론 장인어른과의 대련도, 반쪽짜리 마스터와의 결투 경험도 있었으나 전력을 발휘했다고 하기에는, 진정한 마스터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타이탄은 잘 받으셨습니까?”
“그래. 옆에 있는 녀석이 잘 가져왔더구나.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녀석이었다.”
“다행이네요. 이번에는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니.”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네.”
몇 개월 만에 보는 녀석의 얼굴은 나에게 일탈을 들켰을 때보다, 나의 부름에 황도로 올라왔을 때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이 척박하고 잔혹한 곳에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잡생각이 날 시간이 없다는 것일 테니까. 조조에게는 차라리 이 곳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고생 좀 많이 해야 할 거야.”
“내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2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