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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108화 (108/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8화 - >

이번 일에 대해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잘했다는 형식적인 치하의 말을 전했을 뿐,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덕분에 연구소는 금세 제 자리를 찾았다.

조조가 맡고 있는 임무는 막중했으나 어디 한 과정을 전담하는 것이 아닌 총괄을 맡고 있었기에, 그 동안 수많은 제작 과정이 있었던 만큼 다른 마법사들도 충분히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나 또한 새롭게 시작한 연구의 끝을 보고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겠네.”

일반적인 마법으로 초인 전용의 타이탄을 제작하는 것은 포기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글로리와 같이 순수한 마법만으로 외골격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양산할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세 대, 아니 최근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신예까지 포함한다면 네 대 뿐이다. 그 정도야 손수 만들 수 있었다. 정 귀찮다 싶으면 더 적게 만들어도 누구도 내게 불만을 표하지 못하겠지.

일단 방향성이 정해지자 남은 일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우선 기본적인 골격의 구조는 똑같았으니까. 다만 내용물이 달라질 뿐, 차후 발전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글로리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골격 구조는 없었다.

남은 것은 어디에 어떤 효과를 보여주는 각인을 새겨 넣을 것인가에 대한 것 뿐. 반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죽어라고 해온 일이었으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 년 중 가장 낮이 긴 어느 날, 걸작이 세상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만족하고말고. 거 봐. 게으름 안 피우고 열심히 하니까 금방 만들잖아.”

“······어휴. 아무튼 약속은 지키시는 겁니다.”

“아, 그거? 걱정 말라고. 손맛도 좀 볼 겸 제대로 해줄 테니까.”

크기는 글로리보다 조금 더 큰 5.5m. 구조는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사실상 전용기나 다름없는 만큼 외형은 퐁크 후작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

미스릴 코팅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청록빛을 띄고 있는 글로리와 달리 코팅이 아닌 합금으로 만들어진 몸체는 빛 한 점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매고 있는 망토에는 퐁크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무기 또한 평범한 글로리와는 달리 퐁크 후작과 타이탄의 비율대로 맞췄을 뿐만 아니라 글로리의 주 장비인 미스릴이 코팅된 검에 반해 아예 미스릴과 철의 합금으로 만들었으니 - 애초에 그 정도 검이 아니면 마스터의 마력을 완벽하게 받아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 한 대를 제작하기 위해 글로리 수십 대를 코팅할 수 있는 미스릴이 사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년 중순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졌던 여행 도중 발견했던 광산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마스터의 전용기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투자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골격만 다르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법과 각인 - 용언 - 의 차이는 입이 아프니 둘째치더라도 코어의 성능 또한 격이 달랐다.

기존의 마정석과 루비를 조합하여 적절한 성능을 이끌어낸, 현 글로리의 동력원인 코어의 출력을 100으로 상정한다면 새롭게 제작된, 마스터와의 조합을 통해 한층 출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된 새로운 코어의 출력은 150이상.

마스터 급의 마력 컨트롤이 아니라면 코어 내에 존재하는 마력을 끌어낼 수조차 없을 정도.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규격 외, 괴물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유일한 문제를 꼽자면 이 미친 괴물의 힘을 보여줄 기회가 없다는 것. 글로리조차 마스터가 봐주지 않으면 대련이 성립하지 않는 판국에 마스터가 이 괴물 같은 기체에 탑승한 상황에서 적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허공에 칼질하는 모습을 보고, 전투라는 말이 성립조차 되지 않는 광경을 보고 이 기체의 힘을 체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음?”

“전용기지 않습니까. 세상에 단 한 대뿐인 기체인데 이름 정도는 손수 지어주셔야지 않겠습니까.”

“뭐, 길게 고민할 거 있나? 이 녀석의 앞을 막은 놈들의 미래는 파멸밖에는 없으니 루인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1세대 타이탄 최초의 전용기인 루인(Ruin)의 탄생이었다. 동시에 최초의 전용기 탑승자로 퐁크 후작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순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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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의 제작이 완료됨과 동시에 정벌 준비는 드디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계기는 간단했다. 루인의 위력을 본 황제가 본인의 계획에 확신을 가졌으니까. 그리하여 제국의 관심이 북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먼 길 가야하는 물건들이다! 조심히 실어!”

“조금의 오차도 없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 북부 정벌의 기점이 될 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물자의 양이 늘어났다. 동시에 황실기사단의 일부가 먼저 테라 방벽을 향해 출발했다. 황실기사단이 황제를, 황족을, 황궁을 담당하며 어지간한 사태가 아니고서야 황도를 떠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황제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결정이었다.

“드디어 제국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건가!”

“하지만 굳이? 지금도 테라 방벽에서 잘 막고 있잖은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 테라 방벽을 지키기 위해 해마다 얼마나 많은 물자가 동원되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건 자네겠지. 단순히 지키는 것만 해도 그러한데 정벌이라니,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지······.”

황제가 보인 결연한 의지. 그에 대한 반응은 세 개로 갈렸다.

첫 째, 격한 공감과 함께 정벌에 찬성하는 이들. 주로 북부의 귀족들이었으며 몬스터의 대지와 가까웠기에 그만큼 더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물자를 테라 방벽에 보내고 있었으니 그 고리를 끊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혹은 황제와 깊은 관련이 있거나.

둘째로 북부 정벌에 반대하는 이들. 주로 부유하고 테라 방벽과 거리가 먼 남부의 귀족들이었으며 그들은 황제의 염려대로 의도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벌에 들어가는 예산을 쓸데없는 낭비로 생각했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얻기 위해 그들의 돈이 소모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찬성이 2, 반대가 7이라면 나머지 1은 방관하는 이들이었다. 어찌 되건 상황을 보고 결정을 내리겠다는 이들. 황제가 괜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중간 결과를 보고 움직이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의 여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이 순간에도 황제는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닐 또한 황제의 요청대로 지크 후작이 탑승할 두 번째 전용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 때, 레닐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당신에게도 전용기를 만들어 달라. 이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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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제국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을 꼽으면 누가 있을까.

나? 나야 항상 화제가 되는 사람이긴 했다. 우선 대외적으로 서른 초반에 7서클에 도달한 최초의 마법사였으며 그 전으로도 후로도 굵직굵직한 일들에 이름을 올렸었으니까. 그러나 정답은 아니었다. 화제가 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최근의 임팩트가 부족한 면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후보로 누가 있을까, 황제? 역대 황제들 중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몬스터의 대지를 정벌하겠다고 당당히 선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황제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관심이었으니 논외.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다름 아닌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다.

에프람 린체스터.

퐁크 후작 이후로 십 년 넘도록 등장하지 않았던 마스터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인물. 이제 노년을 향해 달려가는 세 자루 검을 대신해 제국의 새로운 검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 적어도 한 순간의 임팩트만큼은 갓 마스터에 도달한 만큼만큼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 쪽으로는 관심도, 시간도 없었으며 그와 나를 연결해줄 중매자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와 나의 첫 만남은 썩 좋지 못했다.

‘뭐 하는 새끼야?’

많은 마스터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그 간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이, 자신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결코 그 자신감이 자만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경지에 오름으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길다는 것을 깨닫고 한층 더 정진한다는 공통점이.

그러나 이 자는 달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눈에서, 표정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자신감이 아닌 오만함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 오만함이 자신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글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최강의 타이탄이라면 최강의 기사에게 주어져야 하는 일. 내가 아니면 그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최강의 기사라는 겁니까?”

“물론이지! 그러니 허튼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나를 위한 타이탄을 만들게.”

아, 짜증난다.

과거라면 모를까, 내가 이십 대에 6서클에 도달한 뒤에는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오만하지 못했다. 7서클이 된 지금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러던 찰나 오랜만에 나타난 천둥벌거숭이와의 대화는 낯설음을 떠나서 짜증이 날 뿐이었다.

‘딱 봐도 견적 나오네.’

이 느낌, 아주 오래 전에 윌랜드에게서 느껴본 적이 있다. 자기가 이룬 것이 정말 대단한 업적인 줄 착각하는, 다른 이들은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믿는 이들. 한 마디로 깨달음이 부족한 거다. 도대체 누가 이런 놈을 두고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거라고 나불거리는 거야.

‘장인어른께서 보셨다면 몇 달은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드셨겠지.’

물론 사십 대에 마스터가 된 것은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 맞다만,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어야지. 누구 앞에서 지금 뻗대는 건지.

“이봐. 당신 같은 애송이를 상대해 줄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으며 돌아가서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 당신 따위에게 줄 타이탄 같은 건 없으니까.”

“······뭐라고?”

“뭐, 최강의 기사?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옛말에 틀린 말이 없어.”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그가 내뱉은 말.

“겨, 결투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모욕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얼씨구. 자기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으면서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건가. 그나저나 결투라니, 차라리 바라던 바다. 저런 반푼이에게 질 바에야 혀 깨물고 뒤지고 말지.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8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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