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5화 - >
나와 아내는 영지를 거닐었다. 그 동안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명소를 구경했던 것과 다르게 안내자는 그녀였으며 관광객은 나였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영지답게 볼 것이 없었던 드라그닐 영지와는 다르게 발을 옮길만한 가치가 있는 명소들이 꽤나 있었다. 특히나 대대로 검의 명가라는 것을 증명하듯 검을 배우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오고 싶어 할 요소들이 많았다.
‘즐거워 보이네.’
그녀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상당히 기뻐보였다.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접했을 때도, 지금처럼 앞장서서 나를 이끌고 다닐 때도. 그녀의 신분이라면 누군가에게 안내를 받았으면 안내를 받았지, 안내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덕분에 나는 영지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추억을 만드는 동시에 본래의 목적이었던 탐색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번화가 위주로 돌아다녔기에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둘 수 없었지만.
그러나 지크 영지는 넓었다. 게다가 제국 동남쪽의 국경에 걸쳐 솟아나있는 로체 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었기에 광맥이 존재할만한 장소도 많았다. 몇 번 허탕을 치기는 했지만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뭐 했다고?”
“광맥을 찾았습니다.”
“······정말로?”
“제가 형님께 거짓말을 해 뭐하겠습니까.”
재회했을 때, 나에게 소문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정작 광맥을 찾아냈다는 말을 전하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딘데. 아니 그 전에 뭐가 묻혀있는데?”
“철입니다. 동북쪽으로 나아가다보면 로체 산맥과 이어져있는 작은 산맥을 따라 쭉 들어가면 됩니다. 깊이가 있기에 조금 파고 내려가야 하긴 하겠지만, 매장량을 생각하면 초기 투자비용 정도는 개미 눈곱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우리 영지에 그렇게 대단한 게 묻혀있었다고?”
“정말로란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이제 두 번 했다. 두 번.”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마 동안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구두로 확인할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당장 채굴을 시작하여 철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도 위치 정도는 확인해두는 것이 영주로서 할 일이었다.
땅에 묻혀있는 광물이 철이라면 더더욱. 최중요 전략물자로서 없어서 못 쓸 정도로, 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광물이 아니던가. 대단한 매장량을 가진 광맥이 있다는데 그보다 우선시되는 일은 없었다.
“이 곳입니다.”
“여기에?”
“예. 정확히는 이 곳에서 수직으로 2km 정도는 파고 내려가면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시그루드는 내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단순히 일개 마법사의 말이라면 모를까, 내가 허언을 할 만한 위치도, 할 이유도 없었기에. 더욱이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던 광맥에서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져온 만큼 작업을 시작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물론 내가 황도로 떠나기 전까지 결과를 낼 수는 없겠지만 별다른 사고 없이 작업이 진행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 가보겠습니다.”
“벌써?”
“황도에서 저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아서요. 할 일들을 다 끝내놓으면 다시 한 번 들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말릴 수도 없겠군. 다음에 올 때는 두 명 말고 세 명이서 오기를 바라지.”
“그 전에 최소한 한 번은 마주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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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끝내고 황도로 돌아오자 내 앞으로 수많은 서류들이 마치 산처럼 쌓여있었다. 단순히 서류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해야 할 일들도 마찬가지. 그 동안의 편안한 여행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일의 강도는 속된 말로 빡셌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 일이 쏟아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준비가 차근차근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신경 쓰이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 시작할 생각이지?’
예로부터 몬스터는 인간의 적이었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적. 그런 만큼 몬스터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의 대지를 정복하는 일은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글로리의 도입으로 제국의 전력이 급상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전력을 다해야만 가능성이 있는 대업이었다.
그런 만큼 본격적인 시작을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복잡하고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과 휘하 귀족들을 글로리로 무장시키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황제는 나와 약속을 했다. 나는 그에게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보여주기로 했고 그는 그 성과를 가장 먼저 선보이는 곳이 몬스터의 대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그렇기에 나는 타이탄을 완성시켰고 황제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대륙이 놀랄만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나는 약속을 지켰고 이제는 황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런데 약속이 지켜질 기미가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긴 과정의 사전 준비가 필요한 만큼 대규모 전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만약 실패한다면 제국 전체가 휘청거리는 수준으로 끝나면 다행일 정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성공한다고 하여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춥고 척박하여 사람이 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땅과 몬스터의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 정도.
황제가 모든 권한을 휘두르는 전제군주라면 모를까, 귀족들의 힘이 강했으니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는데 리턴이 있어야 리스크를 감내하라 할 것이 아닌가.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을 감내하라 한다면 선뜻 그리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그건 그 쪽 사정이고.’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다. 하이 리스크는 여전하지만 로우 리턴을 미들 리턴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황제가 먼저 노력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나와의 약속을 이행할 의지가 없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애매했다. 내가 혼자였다면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나는 무슨 수로 황제를 응징 혹은 약속을 지키게 만들 것인가.
‘모든 코어를 작동 정지 시키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동시에 위험한 일이었고. 글로리는 더 이상 나와 황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최후의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귀화는 더더욱 위험한 일.
‘조금 더 두고 볼 필요는 있겠지만······.’
유비무환이라, 만약의 사태라고 하더라도 일찌감치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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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닐이 이렇게 가능성 있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쯤, 황제라고 하여 그 때의 약속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약속을 우야무야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가 제국의 황제로서 어지간한 일들은 우야무야 넘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인 레닐의 위치도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제국의 마법계를 이끌어갈 현 마탑주 가델 프리드의 후계자이자 제국에서도 단 두 명밖에 없는 7서클 마법사. 구두 약속이라고는 하나 그걸 깨트린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이어질 황제의 행보에 마탑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골치 아프군.’
물론 황제도 그냥 말을 내뱉고 본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배워온 그가 말 한 마디의 중요성에 대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몬스터의 대지를 정벌하는 일은 제국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약 십 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조금 낫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이 있다면 백이면 백, 테라 방벽을 꼽을 정도로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테라 방벽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국 북부를 통째로 몬스터에게 내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었기에. 그렇다고 나아가자니 그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버리자니 더 큰 손해가 뒤따르니 유지할지언정 버릴 순 없었다.
유지하자니 익숙해져서 체감하지 못할 뿐, 매 년 수많은 물자와 인명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나아가자니 단기적으로 유지에 몇 배, 몇 십 배의 물자가 필요했다.
물론 지금만큼 적기가 없었다. 글로리의 도입으로 안 그래도 타 국가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국력이 온 힘을 북쪽에 쏟아 붓더라도 남쪽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벌어졌다. 그러나 그 차이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터, 북쪽에 신경을 쓰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시선이었고 귀족들의 시선은 달랐다. 익숙해졌다는 황제의 평가처럼 그들은 테라 방벽에 들어가는 물자와 인력의 소모에 익숙해졌다.
한낱 몬스터의 먹이가 되어 죽어가는 병사들의 고통어린 신음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고 매 년 사라지는 물자들 또한 아쉽긴 하나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벌에 한 손 보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협조를 위해서 무언가를 물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그게 마땅치 않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몬스터의 대지를 정벌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니까. 제국 전체를 보고 있는 황제로서는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지만 영지만을 살피면 되는 귀족 개개인으로서는 글쎄, 현상유지 쪽이 훨씬 괜찮은 선택지로 보이겠지.
‘마음 같아서는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의 아버지였던 선대 황제의 평생 꿈이었던 절대권력. 그라고 왜 욕심이 없겠는가. 황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귀족들의 눈치를 볼 때면 다 뒤엎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그렇기에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었다.
황실기사단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글로리를 최우선으로 배치함으로서 중앙은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몇 가지 조건만 맞아떨어진다면, 운이 좋다면 대대로 역대 황제들의 염원이었던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실패한다면 제국은 다시는 전제군주의 꿈을 이룰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아직은 일렀다. 보다 황제파의 힘이 강해지고, 보다 귀족들의 힘이 악화되어야만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도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레닐과 대면했을 때, 그가 건네준 한 장의 지도를 본 뒤 미소를 지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간다면 생각이상으로 수월하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