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4화 - >
오슬론.
이전에 딱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 중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조를 만난 것.
아직 미숙하던 시절의 내가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기 위해, 기연을 찾기 위해 오슬론으로 왔을 때 마찬가지로 미숙했던, 스승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무작정 나를 찾아 고향을 떠나 오슬론에 도착했던 그와의 만남. 우연이었으되 어찌 보면 필연이었던, 그런 만남.
그 날의 만남으로 맺어진 인연은 지금까지도 굳게 이어져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6서클에 오르는 일도, 드래곤을 잡은 뒤 마력 과포화 현상을 이겨내지도 못했을 것이며 타이탄을 개발하는 일 또한 조금 더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오슬론은 내게 고마운 장소라 할 수 있었다.
끼룩끼룩-
촤악촤악-
나머지 하나는 바다.
조금의 오염도 없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지평선 너머까지 약간의 장애물도 없이 펼쳐져있는 푸른 바다. 그 뿐만 아니라 제국 최대의 항구도시라는 이름답게 많은 숫자의 배들이 항구에 정박해있는 모습까지. 누군가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면 이 곳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다고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껏 바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녀가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되는 장소가 제국 북동부가 아닌 이 곳, 오슬론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
“아름답지?”
“네. 영상으로 봤던 것과는 차원이······.”
그녀는 넋을 잃고 바다를 쳐다봤다.
다르겠지. 다를 것이다. 영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영상이 잘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항구도시만의 분위기, 바다의 짠내음, 광활함과 운치 등등 오직 바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담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카스피 호수에 가 본적 없어?”
“······없어요.”
대륙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제국 남부에 위치한 호수이며 지크 영지와는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 그러나 그녀는 그 곳조차 다녀오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까?”
#
우리는 바닷가를, 모래사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적던, 차분하던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무척이나 신나고 기뻐보였다. 그 외에도 이 곳에는 고향과 달리 둘러볼 곳이 참 많았다.
“저를 부르셨나요?”
“외부인이 많이 찾는 명소들을 소개시켜줄 수 있겠니?”
짤그락-
“그럼요! 이 일대는 제가 꿰뚫고 있으니 맡겨만 주세요!”
약간의 돈을 아이에게 주는 것으로 편안하게, 효율적으로 오슬론 주변의 명소를 둘러본 우리. 나도 오슬론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이렇게 느긋하게, 편안하게,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심정으로 둘러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꽤나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싸돌아다니긴 이 곳 저 곳 싸돌아다녔으면서 정작 관광은 처음이라니.’
바빴으니까. 지금이라도 여유를 가진 게 어디인가. 이 모든 것이 일차적인 목표 - 드래곤을 죽임으로서 선배, 동료들의 원수를 갚는 일 - 를 이루었기에, 더불어 이차적인 목표 - 테라 방벽 북부의 몬스터를 박멸하는 일 - 또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목표라는 판단이 섰기에.
“정말 즐거웠어요.”
“나도.”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그 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일부로 미뤄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당연하지.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자니 상당히 부끄럽다. 부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던 나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세 명이서 오자.”
“!”
“꼬, 꼭 세 명이서 오자는 건 아니고, 그 이상도 상관없고, 그렇다고 두 명이서 오지 말자는 건 더더욱 아니고······.”
“······기뻐요.”
포옥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횡설수설하는 나에게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안겼고 우리 둘은 잠시 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렇게 며칠을 할애해 관광을 마무리한 우리들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가진 채, 오슬론을 떠났다. 아쉽게도 항구도시라는 이름답게 오슬론 주변에는 딱히 광맥이 있을 만한 지형이 안 보였기에, 혹시나 싶었지만 혹시나는 항상 역시나인 법이었다.
그렇게 동남쪽으로 향해 카스피 해를, 동북쪽으로 로체 산맥을 들르며 관광과 함께 초기의 목적이었던 광맥도 한두 개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 대부분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광맥의 크기는 적당하나 현재 수준으로는 적절한 채굴이 어렵거나 매장량이 적어 채굴에 큰 의미가 없거나. 한 손에 꼽을 정도의 광맥들만이 적절한 규모와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절실히 원했던 철광산은 반도 되지 않았다.
‘들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게 너무 적은데.’
만약 이 여행이 아내와의 관광을 겸하지 않았다면 심정이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비효율적인 일이었기에. 물론 현재 내 곁에는 아내가 있었으니 결코 비효율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지크 영지네요.”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지크 영지에 도착했다. 그녀로서도 꽤나 오랜만에 오는 고향이었기에 들떠있는 듯했다. 동시에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것이 아쉬운 듯도 했고.
“하하! 매제! 오랜만이야. 아주 소문이 떠들썩해?”
“그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습니까?”
“그럼. 나도 자네가 언제 찾아올까, 기대하고 있었지.”
소문은 다른 소문이 아니었다. 내가 남부를 순회하며 광맥을 발견하다보니 - 가치는 둘째치고서라도 - 내가 방문하기만 하면 큰 이익이 생기는 광산이 생긴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방문하기를 기대하는 귀족들이 상당히 많다고.
“너무 큰 기대는 안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없는 걸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찾아낸 광맥들도 제대로 된 건 얼마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찾아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매형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자 평범하지 않은,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런데······.”
부쩍 자라 점점 소년의 티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조카, 그리고 아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아주머님의 모습까지는 이상할 것 없었다. 다만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아주머님의 배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하하. 그렇게 됐네. 자네가 황도에 있었다면 더 빨리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여행 중이라 소식을 전하는 게 늦었군. 미안하네.”
“형님께서 미안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경축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생기는 법, 게다가 지크 가문은 대대로 뛰어난 기사들을 배출해온 기사 가문이었다.
그 전통을 따른다면 어지간히 재능이 없지 않은 한 조카도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고 있을 터, 물론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호위가 엄중하겠지만 전투에서 절대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임신은 여러모로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형제자매간에 싸움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나와 형의 경우와 같이 우애를 유지하며 제 갈 길 간 경우도 있지만 작금의 황제만 보더라도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자고.”
#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마친 우리들 중 나와 형님만이 남게 되자 형님은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기사들이 수련하고 있는 연무장, 그러나 그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기사가 아니었다.
훙- 훙-
꽤나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그로 인한 풍압이 살짝이나마 느껴질 정도. 제아무리 기사라고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검을 휘두르는 것이 글로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제가 없어도 생산에 별다른 차질은 없는 모양입니다.”
“차질이 있으면 곤란하지. 평생 저것만 부여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그래도 빨리 돌아가긴 해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제작해두었던 코어가 오래 전 바닥을 드러냈으니까. 아마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타이탄들의 숫자도 상당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연무장에서 여러 대의 글로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았음이 느껴져 역으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성능이야. 네가 가끔 말하던 것처럼 몬스터의 대지를 인간의 땅으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시일은 조금 걸리겠지만.”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게다가 아버지 성격에 어지간하면 테라 방벽을 떠나지 않으시려고 하실 테니, 그래도 테라 방벽의 존재 의의가 사라진다면 영지로 내려오시겠지.”
그런 주제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적인, 동시에 방금 전 테이블에서는 할 수 없었던 대화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희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소식.
참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였다. 그러나 형님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를 만큼 둔하진 않았다.
나라고 왜 내 아이를 보기 싫겠는가. 일부로 미뤄왔던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나는 몬스터의 대지로 향할 것이기에.
조카를 걱정하며 전투에 절대는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도 전투로 점칠 되어 있기에, 언제든지 ‘불의의 사고’가 벌어질 수 있는 길이기에. 그녀에게 더한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함께하며 마음이 살짝 바뀌었다. 현실적인 한계도 있었고,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년, 보통이라면 십 년 이상은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 때가 되면 아내의 나이도 마흔 줄을 넘을 것이며 위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속병을 앓을 그녀도 걱정이 되었고.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드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위해서 더 절실히 살아남자고. 책임져야할 사람이 두 배로 늘어난 만큼 위기 시에 터져 나올 미지의 힘도 두 배가 되지 않겠느냐고.
“그 말, 내 동생에게도 해주라고. 무척 기뻐할 테니까.”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말했습니다.”
“이거 참,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군. 둘이서 잘 해나가고 있는데 말이야.”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