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1화 - >
“네 목표가 북쪽의 몬스터를 일소하는 거라지? 내 요구만 들어줘. 그럼 내 검에 맹세하건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몬스터를 죽여줄 테니까.”
거부하기 어려운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타이탄을 통해 기사들이 기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벽은 높고 두터웠다. 애초에 신외지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닌 만큼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퐁크 후작의 제안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한 명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일기당천의 존재감이, 만약 전용기가 성공적으로 개발된다면 그 때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에.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시작했어야할 연구였으며 개발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잃을 것은 없었다. 당장 글로리의 생산은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큰 차질이 없었으며 실패하더라도 자료는 그대로 남아 후일, 적잖은 도움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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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깡-
오랜만에 연구소가 아닌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뢰를 받았으니 일을 해야지. 물어물어 목표를 찾아가니 몇 명의 마법사들과 장인들이 한 대의 글로리를 보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누구, 백작님!”
“퐁크 후작 각하께서 탑승하셨던 글로리가 이 글로리가 맞습니까?”
외견상으로는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다. 뭐, 망가진 부분은 겉이 아닌 속이었으니 당연한 일. 까보지 않았음에도 느껴졌다. 정교하게 쌓아올렸던 집이 주춧돌부터 대들보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을. 그 사람 성격상 기존의 탑승자에게 방법을 물어보기보단 무작정 마력을 밀어 넣고 보았을 테니 흔적이나마 남아있는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수리하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아예 새로 만드는 편이 훨씬 낫겠어.”
“역시 그렇습니까?”
내 말을 기점으로 쏟아진 마법사들의 속마음. 글로리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어떻게든 수리해볼려고 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고, 내가 나서서 차라리 새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하자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뭔가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집이 왜 무너졌는지 알면 더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약점을 보완했는데 똑같은 곳에서 무너질 이유가 없었으니. 그렇기에 약점을 찾고자 공방을 찾았는데 영 건질 것이 없어보였다. 일부가 무너졌어야 그 부분을 보완하지, 전체가 무너졌다면 처음부터 새로 쌓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일단 연구소로 보내주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 있어 이게 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문제점은 없습니까?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생산에 차질을 빚는 문제라면 어떤 문제건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실은······.”
1차적으로 양산한 서른 대의 글로리의 생산 속도에 비하면 현재, 2차 양산분의 경우 생산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장인의 입에서 조금 더 명확한 이유가 튀어나왔다.
“물자가 부족합니다.”
“예?”
아니, 물자가 부족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곳은 제국의 황도,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곳이자 제국의 모든 것이 모여드는 중심이었다. 광산 도시가 아니고서야 황도보다 물자가 풍족한 곳이 있을 리가 없건만, 그러나 곧 이어진 장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로리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자가 필요한 지, 알고 계실 겁니다.”
누가 만든 건데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글로리의 재료 중 가장 많은 양이 필요한 강철만 하더라도 단순 계산으로 따진다면 수천 자루의 검을 만들 수 있는 양은 될 터,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서른 대를 만들기 위해 그 동안 비축되어있던, 주변으로부터 황급히 공수한 광물을 전부 사용했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재료가 없는데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제국의 모든 광물이 이 곳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부족한 겁니까?”
“부족합니다. 차라리 평범한 무기를 수십만 자루 만들라고 하였다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잡철이라고 하더라도 병사들이 쓸 만한 검 정도는 문제없이 만들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글로리는 다릅니다. 이런 잡철로는 어림도 없고 상품 중의 상품만을 고집해야하는데 아시다시피 그런 품질의 철광석은······.”
항상 부족하지. 게다가 그런 품질의 철광석은 원하는 곳이 많았다. 제아무리 황제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인 곳까지 빼낼 수는 없는 노릇.
“그래도 생산에는 차질이 없을 겁니다. 어쨌든 물자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으니, 그러나 1차 양산 때처럼 빠른 속도로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째서 장인이 이런 말을 꺼내는 지 이해가 갔다. 지금의 속도가 정상적인 것이었지만 1차 양산 분의 속도를 기억하고 있는 위에서는 왜 이렇게 늦어지느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 오해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말은 곧 재료만 충분하다면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백작님의 말처럼 제국의 모든 광물이 이 곳에 모여들고 있는 수준이니,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한계치까지 쥐어짜고 있다면 그 한계를 늘리면 될 일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나에게는 가능한 이야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구, 굳이 그러실 건 없습니다. 백작님께서도 바쁘실 터, 지금도 이전에 비해 느리다 뿐이지, 정해진 기한은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내 미소에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꺼냈던 장인이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실력 있는 이들이 일이 부족해 놀고 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당연히 해결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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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제는 글로리가 몬스터의 대지에서 보인 성과를 결코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선전했다. 단독으로 상위종 몬스터를 꺾어내는 모습을 영상화하여 귀족들에게 뿌리며 현재로서 유일하게 타이탄을 보유한 이로서 가진 힘을 뽐냈다.
그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제국의 귀족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황제의 힘이 늘어날 것을 걱정할 정도의 귀족들은 타이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상황이었고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도 타이탄을 보유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 외에 귀족들은 개새끼도 우리 개새끼라는 논리 아래, 시간이 흐르면 낙수효과로 그들도 이득을 보리라는 계산이 있었으니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왕국들이었다.
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최소 오 년은 걸릴 거라 하지 않았는가!”
“······.”
아우베스 왕국, 쥬렌 왕국, 브라하임 왕국.
세 왕국 모두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하나 전전대만 하더라도 왕국의 운명을 건 전쟁이 있었으며 소규모 무력시위 - 산적 혹은 몬스터를 토벌한답시고 국경선 근처의 병사를 움직이는 등 - 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가공할 위력의 신병기를 제국이 내세우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차후 행보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보부의 수장도 그의 주군에게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한 건 그였으니까. 정확히는 부서의 마법사들의 결론이었으나 책임자는 그였으니까.
“후우. 후우.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이 곧바로 내려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도 없지 않나!”
“전쟁이 곧바로 시작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이탄이 제아무리 뛰어난 병기라고 하더라도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고, 병사들과 물자의 움직임 또한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게 다인가? 제국으로서는 남부의 병력만 움직이더라도 그 신병기가 합쳐지면 충분히 진격을 감행할 수 있을 텐데? 그저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기도하는 것이 대책의 전부란 말이네!”
오랜 시간 왕을 섬겨온 그는 왕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왕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빨리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병기를 개발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에도 없는, 실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오셨습니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많은 이들이 침묵을 유지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약 반절 정도의 사람들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그에게 타이탄이라는 병기를 실전에서 보려면 아무리 빨라도 최소 수 년은 걸릴 것이라 말했던 이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소리라도 높이고 싶었지만 그리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 영상을 봤을 것이네.”
왜 안 봤겠는가. 그들도 눈을 비비며 영상을 시청했는데, 제국에 나가있는 세작이 어렵게 구한 영상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 제국이 그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로 조작한 정보를 유출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조작된 영상일 가능성은······.”
“제국이 뭐 하러 이런 조작을 하겠나. 이런 병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제국의 군사력이 약한 것도 아닌데, 괜히 우리의 경계심만 늘릴 이유가 없잖은가.”
그랬다. 제국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왕국 두셋쯤은 감당가능한 나라가 제국이었으니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병기를 빠른 시일 내로 개발하라는 전하의 명령이야. 가능하겠나?”
“······단기간 내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애초에 최소 몇 년을 가정했을 만큼 가능성이 적은 연구였습니다. 그걸 적들이 해내었다고 똑같이 해내라고 하는 것은······.”
그랬다. 천재에게는 쉬운 일이었다고 범인들에게까지 쉬운 일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그의 부관에게 맡겨놓았던 임무의 진척상황을 물었지만 현실은 암담할 뿐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보안, 경호가 삼엄한 터라······. 게다가 가까스로 빼내더라도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알고 있어 전체적인 자료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조조라는 자는 어떻게 되었나?”
“······죄송합니다. 접촉은 하였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보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암담해졌다. 결국 최선을 다한다는 뻔한 결론만을 내린 채, 회의가 파하고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갈 때, 부관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와 부관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었고 그 내용을 확인한 부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1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