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0화 - >
본래 바실리스크와 인간의 싸움은 거대 괴수를 상대하는 것과도 같았다. 사족보행임에도 불구하고 두 발로 서있는 인간보다 더 큰 키를 자랑했기에. 그러나 현재,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은 그 동안의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촤악-
강철과도 같이 단단했던 가죽을 베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은 이제 없다. 설령 베었다고 하더라도 생채기 수준에 불과했던 시절도 이제 없다. 인간의 몸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힘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글로리의 존재는 바실리스크를 거대 괴수가 아닌 평범한 악어로 만들었고 고작해야 악어를 상대로 잘 훈련된, 잘 무장된 기사가 고전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상대한 게 바실리스크 맞습니까? 이렇게 쉬운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바실리스크를 상대로 가볍게 승리를 거둔 기사가 당황스럽다는 듯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황실 기사들이 제국의 기사들 중 평균적인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바실리스크는 위협적인 몬스터였으니. 몇 명이서 달라붙어도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몬스터를 고작 둘이서, 충분히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바실리스크 수십 마리를 팔아야 글로리 한 대의 제작비를 충당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당연한 결과지.”
“그, 그렇군요.”
“이동하도록 하지. 이번 원정은 자네들의 경험과 글로리의 실전 테스트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테라 방벽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상대할 필요가 있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휴식은 거의 없었다. 상위종이라고 하더라도 나서는 기사는 한 명에서 많아야 두 명, 많아야 세 명이었으니. 더불어 마주한 몬스터가 상위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글로리에만 탑승하여 검을 휘두르다보면 본연의 실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몬스터의 대지를 말 그대로 휩쓸고 다녔다. 몬스터들의 왕국에 인간이 선전포고를 한,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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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굳은 몸을 풀며 압도적인 무력에 즐거워하던 기사들이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강행군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타이탄에 적응해야 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어디까지나 타이탄의 제작자일 뿐, 탑승자가 아니었다. 타이탄을 다루는 방법은 기사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뜻. 이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탄생하게 될 탑승자들의 스승이자 선배로서 먼저 깨우친 노하우를 위에서 밑으로 퍼트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이들도 아닌 황실기사단의 기사를 뽑은 것이었다. 제국을 위한 일이니만큼 어쭙잖게 비전이랍시고 숨기려 하지 않고 같이 성장을 하려 할 테니까.
휘이잉-
“어떤가! 움직이는데 별 문제는 없나?”
[괜찮은 것 같습니다!]
“좋아. 조금만 더 있어보자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서도 우리는 몬스터의 대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몬스터의 대지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만큼 왔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봐야지 않겠는가.
이 세계에서 몬스터의 대지보다 추운 곳은 없었다. 추운 쪽으로 더 가혹한 곳도 없었고. 이 곳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만큼 고작 이런 곳에서, 아직 겨울의 초입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위 때문에 타이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겨서는 곤란했다.
방한대책도, 사전에 마법을 이용한 테스트도 거쳤지만 이렇게 넓은 지역에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눈보라와 압도적인 추위는 어떤 변수를 일으킬지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움직임에 무리는 없나?”
[문제없습니다!]
다행히 외부에 오랜 시간 방치되어있었음에도 타이탄에도, 그 안에 탑승해있는 기사에게도 별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물론 추위에 버티기 위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코어의 마력이 소비되고 있었으나 그 정도야 인간인 상태로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누가 생각하고 누가 만든 건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여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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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깊어질 때까지 몬스터의 대지에서 몬스터를 학살하던 일행들은 해가 지나서야 테라 방벽을 떠나 황도로 복귀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데이터를 쌓고 돌아온 일행들은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부족한 대우를 받았다.
동시에 레닐은 7서클이라는 경지와 그 간의 공적을 바탕삼아 백작의 작위와 함께 휴즈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어차피 차후 마탑주의 지위를 이어받으면 후작 그 이상의 대우를 받게 되며 지금도 작위만 없을 뿐, 대우는 그에 준하게 받고 있었으니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테라 방벽에서 있었던 공적들을 바탕으로 글로리의 성능에 충분히 만족한 황제는 글로리의 2차 생산을 명했고 가장 먼저 타이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몇몇 귀족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각자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단 한 사람만이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쟁······인가.’
조조, 글로리 개발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으니 기뻐하면 기뻐했지 수심에 빠져있을 이유는 없었다. 설령 고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중충한 분위기가 아닌 열정적인 분위기의 고민이어야 했고. 그러나 그는 수심에 빠져있었고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그가 제작에 일조한 글로리 때문이었다.
‘충분히······가능한 이야기야.’
맨 처음 타이탄에 대한 정보를 빼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일고의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를 이용하기 위한 간사한 혀놀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러나 레닐과 함께 테라 방벽에 다녀온 뒤, 고민은 깊어졌다.
몬스터의 대지에서 확인한 글로리의 성능은 제작에 일조한 그로서도 깜짝 놀랄 만큼 위협적인 것이었으니까. 그의 친구, 레닐은 말했다. 타이탄은 몬스터를 향한 인류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자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될 것이라고.
그 의견에는 그도 동감했다. 타이탄은 그런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검이, 단단한 방패가 몬스터에게만 향한다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친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 - 힘을 손에 넣은 권력자들 - 까지도 그럴까.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그들에게 전쟁이란 일확천금의 기회일 뿐이며 지금처럼 적들에 비해 월등한 힘을 손에 넣었을 때, 그걸 휘두르지 않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글로리는 완성 단계이며 양산 체계를 갖췄지만 그 힘이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향해 휘둘러지기까지는 거처야 할 난관이 있었다.
몬스터의 대지.
글로리 개발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레닐의 인생 목표가 몬스터의 대지를 인류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목표가 이루어지기 전에 글로리라는 검의 방향이 달라진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그렇기에 아직 시간이 있었다. 타이탄이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병기라는 건 이번 원정을 통해 잘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몬스터의 대지도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타이탄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다면 타이탄이라는 칼이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하더라도 그 때쯤에는 그들도 충분한 힘을 갖춘 뒤,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불확실함을 앉고 전쟁을 벌이는 건 천지차이니까.
멈칫-
그럼에도 고민을 거듭하는 것은 이 행동이 그를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조의 고민이 끝없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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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가로웠던 공방과 연구소는 우리가 귀환을 함과 동시에 글로리의 양산을 위해 다시금 바빠졌다. 공방은 외골격을 제작하기 위해서, 연구소는 제작된 외골격에 마법을 새겨 넣음과 동시에 더 뛰어난 마법진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러나 연구소장이라는 직위에 올라가있는 나는 지금까지와 달리 바빠지기는커녕 조금 더 한가해졌다. 코어 제작이 아닌 이상 외골격의 제작에는 내가 손을 댈 이유가 없었으며 글로리라는 결과물이 만들어진 이상 벌써부터 개량에 열을 올릴 이유가 없었으므로.
덕분에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내 개인적인 수련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제일 좋아라한 것은 세레나, 그녀였다.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고작해야 그런 장난감에 매달리는 건 어린 시절이면 족하지. 네가 용언만 제대로 배워봐라, 그깟 장난감. 수십 대가 달려들든, 수백 대가 달려들든 가소로울 뿐이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곳까지 다다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해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뿐,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 충실히 수련에 임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뭐,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든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보낸 사람을 따라 황궁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의, 그러나 반갑지는 않은 그런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다른 마스터들에 비해 젊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경박해 보이는 말과 얼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럭비공과도 같은 존재, 퐁크 후작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작게 목례한 뒤, 우선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당도했나이다.”
“바쁜 사람을 불렀군. 다름이 아니라 퐁크 후작이 자네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볼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면 되지, 황제에게는 왜 들렸단 말인가. 시연회에서 그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받았지만 테라 방벽에서 워낙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똑같은 행동에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뒤이은 그의 말은 꽤나 재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후작 각하의 전용기를 만들어달라······이 말씀이십니까?”
“맞아.”
글로리의 성능은 증명되었다. 그런 상황을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인생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쏟은 퐁크 후작이 그냥 두고 볼 만은 없었고 황실 기사의 타이탄을 빼앗아 탑승했다가 처음부터 힘 조절을 하지 않은 결과, 공방에 입고되어 수리 중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황제의 앞임에도 이마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어진 그의 대답은 내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처음 만들 때 좀 더 튼튼하게 만들었어야지. 그런 연약한 물건이 험난한 전쟁터에서 버텨낼 수 있겠어?”
“······폐하. 아시다시피 타이탄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로리의 제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긴 시간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글로리의 제작과 병행하며 마스터급 기사가 탑승할 수 있는 타이탄을 연구하라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듣자하니 대부분 네가 혼자 한 일이라며, 연구는 너 혼자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후우.”
참자. 참아. 다른 누구도 아닌 퐁크 후작이고 황제의 앞이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얼굴이라도 한 대 치고 싶지만 극한의 인내심을 끌어올려 꽉 쥐어진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퐁크 후작이 내놓은 제안이 있었다.
“네 목표가 북쪽의 몬스터를 일소하는 거라지? 내 요구만 들어줘. 그럼 내 검에 맹세하건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몬스터를 죽여줄 테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