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98화 - >
“너, 여기서 뭐하냐?”
낯익은 얼굴. 길을 걷다 백이면 백, 뒤를 돌아봐 얼굴을 확인할 정도의 미모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찾아온 그녀의 얼굴은 나에게 있어 흉신악귀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뭐 언제는 그녀가 사전에 말하고 찾아왔던가. 지금까지의 만남 모두 사전 예고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 않았던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모습을 비추기는커녕 연락조차 없었기에 방심했던 내 탓이지.
“뭔가 했더니 심장이잖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냉정을 되찾았다. 솔직히 말해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 않은가.
내가 드래곤하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녀 또한 물어보지 않았고 나는 분명 녀석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말했다. 승부의 승패가 갈린 이상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얻을 권리를 얻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그렇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예. 이전에 말씀드렸던 그 때 얻은 겁니다.”
“어쩐지 2% 부족하더라.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괜히 두 번 움직여야 했잖아.”
그러나 그런 내가 당황할 정도로 그녀는 시원하게 이 문제를 넘겼다.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기에 불발탄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재차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아무렇지 않으신 겁니까? 아무리 녀석이 모자랐다고는 해도 동족이 아닙니까?”
“너는 인간치고는 똑똑한데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가 있어.”
그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너희 둘이 싸웠다며? 네가 이겼고.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얻을 권리가 있지. 너도 인간이니 들어봤겠지. 우리들이 왕국이나 영지를 협박해 금은보화를 얻어낸다는 진부한 이야기 말이야.”
확실히 드래곤이 등장하는 동화 속에서 매번, 질리도록 나오는 패턴이기도 하다. 사악한 드래곤이 공주를 납치하거나 착한 인간들을 괴롭혀 용감하고 정의로운 용사가 사악한 드래곤을 처단한 뒤,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그녀의 말처럼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통해 드래곤의 힘을 편린이나마 엿본 나로서는 이상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동화는 동화일 뿐이라는 것, 두 번째는 만약 그 동화가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면 그 용사는 사실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라는 점.
“그럴 수 있었던 건 우리들이 힘을 가진 승자였기 때문이지. 그런데 멍청한 녀석이 인간에게 패배했다고,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내가 뭐라고 할 줄 알았어? 그런 말은 드래곤 주제에 인간에게 패배한 멍청한 녀석에게 해야지!”
그녀는 정말로 한심하다는 듯, 이제는 심장밖에 남지 그 녀석의 흔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곧 뒤이은 그녀의 말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데 조금 욕심이 나긴 하네. 동족의 심장은 우리에게도 보물 중의 보물이라서 말이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너무나 뻔했다. 그녀는 그녀의 말처럼 힘을 가진 승자였으니까.
“이건 내가 가져갈게. 괜찮지?”
#
“드리겠습니다.”
“어, 정말? 그래도 돼? 가져가려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웃기긴 한데 이거 정말 귀한 거라고?”
그렇게 말할 거라면 애초에 가져간다고 말을 꺼내지나 말 것이지. 어차피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말로 한다고 해서 이 독불장군이 설득될 것 같지도 않고.
“대신에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귀중한 보물을 바치는 만큼 그 공에 대한 치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말해 봐. 뭔데?”
지킬 수 없다면 다른 것을 얻을 수밖에. 어차피 지금 당장으로서는 제대로 사용도 못하는 물건이지 않은가. 금은보화와 물 한 병. 누가 보더라도 금은보화의 가치가 높겠지만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기 일보직전인 이에게는 물 한 병의 가치가 더 높은 것처럼.
“제가 연구 중이던 타이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 그 돌덩어리?”
도, 돌덩어리.
물론 그녀가 보기에는 정말로 돌덩어리와 다를 바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떠나기 전, 타이탄의 개발 진척은 그 만큼 더뎠으니까. 물론 지금 상황도 그녀에게 그리 위협조차 되지 못하겠지만. 완성된 타이탄에 마스터급 기사가 탑승한다면 모를까.
그녀의 처참한 평가는 뒤로하고 나는 그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타이탄의 개발을 마무리하기 위해 동력원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드래곤하트를 연구 중이었다고. 그러니 동력원의 개발에 도움을 준다면 기꺼이 드래곤하트를 바치겠다고.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시원하고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대답이었다.
“뭐, 별로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인간에게 있어 난제와도 같은 문제가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으니. 종족의, 수명의 차이가 이토록 거대했다.
“내놔 봐. 어느 정도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봐줄 테니까.”
내게서 관련 서류를 앗아간 그녀는 잠시 주의 깊게 지켜보더니 이내 펜을 들어 무언가를 수정하고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어깨너머로 그 내용을 지켜보던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술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식.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방향성.
누군가는 생각해봤을 지도, 상상해봤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혹은 능력의 한계로 실패를 거듭했기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됐나?”
그러나 동시에 난해하고 어려웠다. 이대로라면 이걸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고 추앙받는 스승님도,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대단할지 모를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해 그녀는 명쾌한 해답을 내려줬다.
“마법으로 못 하겠다 싶은 부분은 용언으로 때워. 게다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건 아닐 텐데?”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을 마법으로 만들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지, 적당히 각인으로 치환한다면 내 수준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니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나는 최대한 타이탄 프로젝트에 각인을 적용하지 않고 오직 마법으로만 구성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도 타이탄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규격 외의 수준은 아니었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내 몸은 하나뿐이었다. 나 혼자서 타이탄의 제작을 맡았다가는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모자랐을 테니까. 그렇기에 외골격을 제작함에 있어 각인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동력원에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렵고 난해하나 각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하루에 하나 만들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부분은 다른 마법사들에게 맡기고 각인이 필요한 부분만 내가 신경 쓴다면 한 달에도 수십 개는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황제라고 하더라도 나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섣불리 건들일 수 없게 되리라.
‘보안적인 측면에서도 탁월하네.’
드래곤이 상대편에게 있지 않는 한, 동력원을 완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설령 누군가 동력원을 입수하여 복제하려고 해도, 연구하려고 해도 스승님마저 결국은 포기한 각인을 따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이너버전에 불과하겠지.
“그러네요. 그게 낫겠어요.”
“아싸. 그럼 이거 내가 가져간다? 저번처럼 이걸 빌미로 수련 게을리 한다는 말 나오기만 해봐.”
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수정한 연구 자료를 거침없이 탐독했다. 서류에만 존재하는,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마법으로 가능한 부분은 놔두고 불가능한 부분은 대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의 흰 부분은 사라지고 검은 글씨로 채워지기를 반복한 끝에 나는 오두막을 무너뜨렸다.
#
“이건······.”
“동력원. 뭔가 건져온다고 했잖아.”
“아니, 어떻게······.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간 만들어냈던 어떤 결과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력. 조조는 당황, 놀라움, 경이로움, 당혹 등등의 감정이 섞여있는 미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럴 수밖에. 아마 조조가 아닌 다른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똑같은 표정을 지을 터, 그러나 그들을 납득시킬 가장 좋은 방법이 내게는 있었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거든.”
“깨달음? ······설마 너?!”
“운이 좋았지.”
기사와 마법사들은 두고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표현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마력의 힘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해주니까.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또 한 번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을 두고 그들은 초인이라고 불렀다.
“자자,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거야? 이걸로 끝이 아니잖아.”
동력원이 완성되었으나 아직 결과는 모른다. 과정도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동력원과 외골격 간의 동기화 작업을 거쳐야 했고 실제로 탑승한 기사가 동력원의 마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도 실험해 봐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들에 비하면 자잘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 그 결과를 보기까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를 위해 가져온 동력원을 다른 이들에게도 공개하자 순식간에 연구소가 부산스러워졌다.
“이런 식으로 이게 가능합니까?”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아니, 다른 건 둘째 치고 이 부분들은 뭡니까? 보고 또 봐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설명이 어려워. 비전이기도 하고 지금 너의 수준에서는 괜히 머리만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
동시에
“허억!”
“저, 정말이십니까?”
“도대체 그간 무슨 경험을 하신 겁니까?!”
내가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밝히고 증명하자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동력원에 대한 반응이 자신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낸 천재를 바라보는 듯했다면 지금은 마치 규격 외의 괴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라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 그보다 두 눈으로 직접 봐야하지 않겠나. 움직이지. 아, 미하일 경을 불러주겠나?”
비어있는 퍼즐 한 조각을 끼워 넣는 것처럼 쏙 들어가는 동력원. 사전에 준비해두었던 과정이 트러블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수십 번도 더 넘게 검토한 내용이었지만 하늘이 돕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자그마한 변수조차도 없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미하일 경. 갑작스럽겠지만 타이탄에 탑승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완성이 되었거든요.”
“예?”
“완성이라기에는 아직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큰 틀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 만큼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니 재촉할 수밖에요.”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9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