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92화 - >
“미하일 경, 준비 되셨습니까?”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넘게 해왔던 일이 아닙니까. 보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하여 실수할 만큼 단련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미하일 경만 믿겠습니다.”
애석하지만 이 뒤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조연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이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타이탄과 미하일 경이 그 동안 쏟아온 피와 땀을 믿는 수밖에.
우우웅-
크게 심호흡한 미하일이 타이탄에 탑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이탄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탑승자와 타이탄 간의 동기화가 성공하여 전신에 음각되어있는 마법진에 마력이 공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쿵-
아주 짧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길었던 시간이 지나고 거인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인은 맨 몸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허리춤에 메여져있던, 거인이 손을 뻗음으로 인해 대검, 아니 거인의 입장에서는 평범한 크기의 바스타드 소드가 마치 하나의 존재인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저것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지만, 연구가 되긴 되어야겠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드는 것조차 어려운,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사용가능할 리가 없는 크기의 대검. 장인들조차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크기에 꽤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크기만 커졌으니 만드는 과정에야 변함이 없다지만 말 그대로 크기가 몇 배는 커졌으니까.
웅성웅성-
들린다. 거인의 등장에 요동치는 구경꾼들의 고동소리가.
보인다. 거인의 등장에 놀라워하는 구경꾼들의 표정이.
느껴진다. 거인의 등장에 부산스러워지는 구경꾼들의 호들갑이.
읽힌다. 거인의 등장에 복잡스러워지는 구경꾼들의 생각이.
“지금 보시는 이것이 지금까지 비밀리에 연구되었던 신병기, 타이탄입니다. 이족보행병기로서 기사들의 전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며······자세한 사항은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지금 받은 충격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시연회의 분위기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사전에 정해두었던 신호를 타이탄에 탑승해있던 미하일에게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연회가 시작되었다.
‘후. 지금까지 해온 대로만······.’
방아쇠는 당겨졌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미하일의 역량과 타이탄의 위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두 자리 수가 넘도록 연습을 했고 세 자리에 가까운 점검을 했지만 최후의 순간, 존재조차 모르는 존재에게 기도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부웅-
수도 없이 보았기에 나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황실기사단의 제식 검술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타이탄의 몸을 빌려 펼쳐졌다.
크기로부터 나오는 막대한 힘을 품은 검은 공간을 찢어발길 듯 강맹했고 제국에 대한 충성심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들만이 입단할 수 있는 황실기사단의 제식 검술답게 화려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와 반대로 내 속은 조금씩 타들어만 갔다.
‘제발, 제발.’
타이탄이 두 손에 쥐고 있는 검에서는 거대한 오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이탄의 크기로는 별 대단할 것 없는 오러였지만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저게 무슨 비효율적인 행동이냐는 질타를 받기에 충분한 크기.
모든 것이 완성된 상황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게 정상적인 상황일 테니까. 그러나 시연회를 펼치는 현재, 타이탄에는 동력원이 없었다.
‘이론대로라면 이번 시연회 정도는 무리가 없겠지만.’
물론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시연회 자체를 기획하지 않았을 테니까. 마정석을 적당히 배치하여 미하일을 백업할 수 있도록 장착은 해두었다. 이론상으로도, 연습 과정에서도 시연회를 펼치는 시간 정도는 충분히 감당 가능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사고가 터지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는 긴장감으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기대 속에서 제식 검술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대로만 끝나면 타이탄의 위력을 선보이기에 아쉬운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거인이 크기에 걸맞은 대검을 들고 오러까지 내뿜으며 멋들어진 검술을 펼치는 광경은 보기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닐 수 없겠으나 정작 중요한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주기에는 2% 부족한 감이 있었다.
물론 일정 경지 이상의 실력자들은 꽤나 흥미진진한 얼굴로 시연회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까지 연구를 진행하고 양산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지금 결정하라하면 대부분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리라.
“들여보내.”
“예!”
아르민에게 신호를 주어 미리 준비시켜놓았던 오거를 들여보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테라 방벽 북쪽의 몬스터의 땅 출신 오거는 아니었기에 기사 두셋이면 무난하게 잡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운이 좋다면 혹은 기사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혼자서도 잡을 수 있을 테고, 물론 무리를 해야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 마리의 오거는 제아무리 황실기사단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단독으로 맞서기 불가능한 수준의 적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정도로.
그러나 지금, 미하일은 세 마리의 오거를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최소한 무리 없이 잡아내는 정도의 활약을 펼쳐줘야만 했다. 그래야만 제국의 중진들을 모아놓고 시연회를 펼칠 만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었다.
“힘드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황제 폐하의 체면에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 쓰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제 모든 것을 쏟아 붇겠습니다.”
황실기사단의 일원이자 충성심 깊고 실력 있는 이를 보내 달라했을 때, 황제가 택한 인물인 미하일 경. 잘하면 황제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며 못하면 황제의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에게 있어 최고의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것만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비장하게 말했던 다짐처럼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단칼에 오거의 목을 베더니 남은 두 마리의 오거를 상대로도 압도적인 전투를 선보였다. 그 모습은 평범한 기사가 오크를 상대하는 것 같아서 아르민은 긴장감으로 굳어있던 얼굴에 턱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옛날에 보았던 히어로물을 보는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전생, 그 중에서도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 보았던 가면 쓴 히어로가 괴인을 무찌르는 내용의 만화가 현실로 구현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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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초대를 받은 그들이 처음 느낀 감정은 흥미로움이었다. 즉위 이후 정기적인 소집을 제외하면 별다른 대외활동이 없었던 황제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제국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일 터, 그 흥미로움은 선보이려는 물건의 제작자가 레닐이라는 사실에 기대감으로 불타올랐다.
레닐이 누구인가.
요새는 잠잠하지만 서른이 되기도 전에 6서클이라는 전후무후한 성장을 보여준 유망주, 아니 스타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이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황제를 등에 업고 진행해온 연구와 그 결과물이라니.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있다는 소리는 곧 가장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볼 줄 안다는 소리와도 같았기에 초대받은 이들 중 초대를 거절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초대한 사람도 사람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해서. 기대가 되어서. 그리고 그 호기심과 기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충분한 보답을 받았다.
‘저게 뭐야?’
‘골렘? 고작 저걸 보여주려고?’
거대한 거인이 걸어 들어왔을 때, 실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골렘이 그렇게까지 흔한 볼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놀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황제가 벌이는 시연회라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그 실망감은 곧 초대장을 받았을 때의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골렘이라고 생각했던 거인이 마력을 끌어올렸으니까. 이 순간, 이 정체불명의 병기를 설명하는 레닐의 말은 그들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 다음 보여줄 광경에 모든 시선이 쏠렸기에.
‘허허. 살아생전 이런 광경은 처음이군.’
‘이건······. 과연 황제 폐하답다고 해야 할지. 차기 마탑주답다고 해야 할지.’
‘기사가 탑승했다고 했나?’
기대 속에 이어진 광경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황실의 검을 상징하는 황실 기사단의 제식 검술은 실용성도 실용성이지만 화려함도 일품이었다. 그걸 거대한 거인이 펼치고 있었으니 눈을 뗄 수 없었다.
오거와의 전투 또한 마찬가지. 오거라면 산의 폭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오러를 검 외부로 두를 수 있는 기사들이 아니라면 도망치는 게 최선이라고 불리는 몬스터가 아닌가. 제각기 영지를 경영하는 이들답게 오거의 강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인 앞의 맥없이 목을 내어주는 오거들은 정말 그들이 알던 오거가 맞는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시연회가 끝났을 때, 좌중들은 그 흔한 박수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을 만큼 충격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오늘 이 시연회를 위해 노력해준 황실 기사단의 단원, 미하일 경에게 작은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이탄의 조종을 끝마친 미하일 경의 손을 잡고 레닐이 좌중들 앞에 섰다.
부들부들-
마주잡은 손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미하일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에 제일 먼저 황제가 박수로 화답했다. 감동을 받은 건지, 힘들기 때문인지 손의 떨림이 더 심해졌지만.
짝짝짝짝짝-
“괜찮습니까? 힘들면 지금이라도 무대 뒤로······.”
“멀쩡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앞에 계시는데 기사된 자가 뒤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를 위해 회복(回復), 두 글자밖에는 선물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박수야말로 미하일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난 시간의 노력에 걸맞은 보답이었으리라.
“지금까지 ‘타이탄’의 시연회였습니다.”
“훌륭했네. 내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말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어.”
“폐하의 지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 그대들도 물어볼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자유롭게 질문해도 좋소.”
지금까지 미하일과 타이탄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의 주인공은 황제도, 미하일도, 타이탄도 아닌 레닐이었다.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타이탄은 보여 지는 장점만큼이나 숨겨진 단점도 많은 병기였으니까. 지금부터 그 단점을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꾸고 그들을 등불에 홀린 불나방처럼 만들어야 했으니까.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의외로 쉬울 수도 있는 일.
척-
“기사들을 위한 병기라고하니 내가 하나 묻지.”
그 첫 번째 순서는 제국의 세 자루 검이라 칭송받는, 현재 남부의 군권을 지휘하고 있는 권터 후작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92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