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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9화 (89/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9화 - >

공국이 그리 신기한 이름은 아니다. 역사서를 잘 뒤져보면 전례가 없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인류 역사가 몇 천 년이고 그 동안 흥하고 망했던 나라가 몇 개인데 제아무리 공국이 흔치 않다지만 전례가 없었겠는가. 놀라운 건 이번 일이 가져올 파급력과 그걸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결단을 내린 과감함이었다.

“공국, 공국이라.”

누구 생각일까. 아르센 공작? 황제? 어느 쪽의 생각이건 양쪽 모두가 혹할만한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랬으니 진행 중일 터이고.

“절묘한 타이밍이네.”

이 모든 원인은 아르센 공작가가 더 이상 하나의 가문으로만 남기에는 너무 커졌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제국 제일의 영지에 손꼽혔던 곳이 아르센 영지였다.

또한 3황자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는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곳 또한 아르센 공작가였으니 논공행상이 마무리되었을 때, 아르센 공작가는 너무나 큰 영향력을 제국 전반에 끼치게 되었다. 어쩌면 새로운 황제보다도 더.

신임 황제에게는 불만족을 넘어 위기감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사적으로 황제와 아르센 공작은 사위와 장인의 관계였으나 한낱 돈에 눈이 멀어 부모형제간에도 피를 보는 것이 인간이었으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권력이라는 재물 앞에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3황자를 지지한 조건이 공국으로의 승작이었을 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나 지금의 황제가 죽고 나면 다음 황제는 아르센 공작가의 피가 섞여 있으리라. 그러나 아르센 공작은 공국으로의 독립을 택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건가?’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또한 지금의 황제가 자리를 물려주려면 수십 년은 걸릴 터, 그 사이 쏟아지는 견제와 불편함을 견딜 바에야 깔끔하게 독립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 아르센 공작가를 제아무리 용이라 하나 꼬리라고 하기에는, 공국이 제국에 비해 위상이 낮다지만 뱀이라고 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았으니 용의 몸통, 호랑이의 머리 정도는 쳐줘야 맞는 말이겠지만.

황제에게도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영토는 조금 줄어들겠지만, 아르센 공작가가 제아무리 보통의 영지와는 비교불가라고 하더라도 제국 전체와 비교하면 일부일 뿐이었으니까. 그것으로 자신의 통치에 방해가 될 귀족들의 중심을 쳐낼 수 있다면 충분히 이득이겠지. 떼어준 영토야 전쟁을 통해 넓히면 된다는 야망을 가진 이였으니까.

또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공국이라는, 평소에는 멀리해도 긴급 시에는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는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도 주게 되는 셈이니까.

생각해보니 아르센 공작이 싫다고 해도 황제로서는 밀어붙여볼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공국으로 승작하게 되면 영지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해질지 몰라도 전체적인 영향력은 감소할 테니까.

“흥미진진하네.”

아직까지는 신권이 황권보다 강하다. 지금의 황제가 지금의 구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한데,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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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건 나는 신경을 끈 채로 연구를 계속 진행해나갔다. 사실 공국이라는 이야기가 정계에서 흘러나왔다고는 하나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만큼 간단한 일도 아니고 설령 자고 일어난 사이에 아르센 공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큰 영향을 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내 하루는 어느 날과 다름없이 특별할 것 없는,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연구뿐인 시간이었다.

“고생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고.”

“예예······. 대제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연구소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렇기에 오늘 하루도 어느 날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워 잠에 들려할 때, 일은 발생했다.

위잉위잉-

잠을 깨우는 경종이 울려 퍼졌다. 윌랜드가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한 이후로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연구소의 경비를 강화해놓은 덕을 이렇게나 일찍 보게 되다니,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자 옆에 누워있던 그녀가 물어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연구소에 강제로 침입하려고 했어. 미끼일지도 모르니까 호위를 더 강화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마. 알았어?”

낮지만 결코 없다고 할 수 없는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한 뒤, 곧바로 어둠에 몸을 맡겨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의 특성상 비교적 외진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기에 저택에서의 거리는 꽤나 먼 편이었지만 더 이상 나에게 거리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탁-

“조용하군.”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붉은 경적과 달리 연구소 외부는 주변을 감싼 어둠에 걸맞게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고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일 뿐, 한 번 경보에 걸린 이상 내가 초기화를 하기 전까지 연구소의 경비대책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 궁금한데.”

연구소는 외부 모습만 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 없는 건물이었다. 물론 그 거대한 크기만큼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할 수 있었지만 주변으로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어 용무가 없다면,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즉 지금 연구소에 침입한 놈들은 어떠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침입했다는 이야기. 단순한 잡도둑이었다면 아무리 빈 건물이라지만 외부장식 하나 없는, 크기만 한 창고보다는 다른 곳을 노리겠지.

물론 건질만한 물건이 없나 들어와볼 수도 있겠지만 그저 그런 잡도둑이라면 진즉에 경보는 1단계로 격하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경보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는 건 내부에 움직임이 있거나, 잡도둑 수준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곳까지 들어왔거나. 다행히 정말 중요한 곳까지는 뚫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잡도둑치고는 본격적이네.”

외부에 존재하는 경비 체계가 뚫렸다. 평범한 방식으로 뚫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 눈에 들어오는 일.

“마력, 그 자체를 동결시킨 건가? ······아니야 이건······.”

연구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꽂힌 말뚝. 수법이 기묘했다. 우선 경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비 체계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간에 커트 당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종류의 마법을 구성하다보면 필수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요소들이 몇몇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말뚝들은 그 요소들을 방해함으로서 마법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티팩트였다.

“프로의 솜씨야.”

평범한 마법사가 경비 체계를 확립했다면 눈 뜨고 코 베이는 격이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침입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며 탈출 후 말뚝만 회수한다면 경비 체계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침입한 사람은 있는데 침입한 흔적은 없는 완벽범죄가 될 테니까.

그러나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한 점이 있다면 내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 그게 그들의 불운이고 오늘 침입이 실패로 끝날 첫 번째 이유가 되리라.

“자, 얼굴 좀 볼까?”

녀석들의 도구는 마법의 흐름을 고정시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각인까지 제어할 수는 없었다.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미완성의 각인이라고 하더라도 소위 격이 달랐다. 그건

읍읍-

무형의 줄에 꽁꽁 묶여 바닥에 고정된 침입자의 모습이 증명했다.

“운이 좋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녀석에게 하는 말이었지. 그나마 초입에서 붙잡힌 덕분에 구속으로 끝났을 뿐, 더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실력 있는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없는, 마법사의 공방에 함부로 들어온 대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경비 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으니 남의 피와 땀의 결정체를 날로 먹으려 하는 자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

위잉위잉위잉위이이이······.

책상 내부에 존재하는 경보 알람을 끄자 머릿속에서 울려오던 경종이 뚝 그쳤다. 연구소의 심처라 할 수 있는 연구소장실까지 도달하며 만난 침입자는 총 여섯 명. 그 중 네 명은 경비 체계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두 명만이 살아남아 의식을 온존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둘 중 하나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입에 숨겨둔 독을 삼켰지만 즉사가 아닌 이상 내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검은 달이라······.”

살아남은 침입자 두 명은 황실기사단에게로 보냈다. 내가 심문을 맡아도 되겠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내가 하나 다른 이들이 하나 효율이 비슷하다면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었다. 설마하니 수도에서 벌어진 일을, 수도의 방위를 책임진다 할 수 있는 황실기사단에서 가벼이 처리하진 않겠지.

‘어디서 정보가 세나간 거지?’

녀석들의 어깨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검은 달의 문양이 문신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 놈들에 대해서는 외부 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아내는 오랫동안 수도에 머물며 정보를 지크 후작가로 보낸 만큼 알고 있는 정보들도 많아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것저것 주워듣게 되니까.

검은 달.

지난 번 마주했던 흑장미 길드가 서쪽에서부터 떠오르는 신성이라면 이 놈들은 한 마디로 터줏대감이었다. 오랫동안 제국의 어둠에서 암약하며 수많은 사고를 친 범죄자들. 인신매매, 마약, 밀무역 등 손을 거치지 않는 범죄가 없었지만 워낙 치밀하고 실력도 좋아 머리는커녕 꼬리만 붙잡고 있는 실정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마주할 줄이야.

‘역시 그 때인가?’

나와 아내의 결혼식 당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던 황제의, 연구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요청하라던 말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 외에도 나의 행적들을 통해 정보가 빠져나갔을 기회는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들이 왜?’

그들은 확실히 위험한 존재다. 법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는 한낱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할 수 있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위험한 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며 일망타진할 수 없었던 이유 또한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닌 점조직 형태로 워낙 넓게 퍼져있기에 몸통을 붙잡기가 어려웠을 뿐, 몸통만 붙잡을 수 있다면 녀석들 따위는 언제든지 박멸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곳이 마탑이었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대담하게 이런 짓을 저질렀다? 물론 이득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놈들이니 ‘안 걸리면 된다.’ 라는 마음으로 시도했을 수는 있다.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자세히는 몰라도 가치 있는 연구이겠거니 생각하며 빼돌리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리 치밀하던 놈들이 ‘가치 있을 수도 있다.’ 라는 가능성에 지금까지 어지간하면 피해왔던 마법사를 건드리는 짓을 벌였다고? 나의 뒤에 마탑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상당히 미심쩍었다.

‘일단은······ 심문을 해봐야겠지.’

살려 보낸 두 명 외에도 나에겐 내 미심쩍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입이 네 개씩이나 있지 않은가. 적어도 한 명쯤은 뒷사정을 알고 있겠지.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9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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