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8화 (88/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8화 - >

대륙의 중앙 일부와 북부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 그 거대한 땅덩어리만큼이나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도 많았으니, 그 나라들 중에서도 제국과 가장 가까이 밀접해있는 나라는 단연 쥬렌 왕국이었다.

쥬렌 왕국.

양 옆으로 아우베스 왕국과 브라하임 왕국이 있었으나 아우베스 왕국은 쥬렌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는 있으나 휴즈만의 존재로 인해 제국과 국경을 직접 마주하지는 않고 있었고 브라하임 왕국은 쥬렌 왕국보다 더 긴 국경을 제국과 마주하고 있었으나 그 중 대부분이 로체 산맥이 차지하고 있어 실제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지형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국경 전체가 사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지형으로 이루어진 제국 - 쥬렌 왕국. 덕분에 쥬렌 왕국은 항상 제국을 향해 경계심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서쪽과 북쪽은 각각 바다와 몬스터의 대지, 두 방향으로는 힘을 뻗고 싶어도 뻗을 수 없었으니 제국이 움직인다면 그 대상은 무조건 쥬렌 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견된 이들로부터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건 없나?”

“여기 있습니다!”

단순히 쥬렌 왕국만의 힘으로 제국을 막아설 수는 없다. 쥬렌 왕국의 모든 역량을 군사력에 쏟아 부어도 영토와 인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국력의 차이는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쥬렌 왕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제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 따로 있을 정도로 제국의 움직임에 민감했다. 그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움직여야 주변 나라들과 협력을 하건, 협상을 하건 왕국을 지킬 수 있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지난 몇 년의 시간은 그들에게 있어 일에 깔려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제국의 만인지상, 유일한 존재인 황제가 병으로 앓아누웠고 그 자리를 노린 황자들 간의 암투. 황제가 언제쯤 죽을 것이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황자들의 성격과 행보를 생각할 때, 조국에 가장 이득이 될 미래는 무엇인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니.

일이 많으면 사람을 보충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냐만은 정보를 다룬다는 일의 특성상 함부로 사람을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다른 마음을 먹어도 큰 상처로 돌아올 테니까.

“결국 3황자가 패권을 잡았군.”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쉽게 됐어. 조금만 대치가 길어졌다면 내전까지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논하기도 전에 그들은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들이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상황, 다른 누구도 아닌 3황자가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력권이 반대였다면 모를까, 아르센 공작의 감시를 뚫고 직접적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들은 1황자 혹은 2황자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다. 1황자는 무능하지는 않았으나 유능하지도 않았다. 성격 또한 강단이 없고 유유부단하였으니 그가 제국 남부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긴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또한 야망 또한 크지 않았으니 섣불리 전쟁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2황자는 정반대였다. 유능했으나 그 유능함은 위에 선 자로서의 유능함이 아닌 명령을 받드는 이로서의 유능함이었으니 제아무리 야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할 바가 못 되었다. 오히려 야망과 젊은 혈기가 성급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 터이니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3황자는 달랐다. 우선 그의 배경은 제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는 아르센 공작이었으며 위에 선 자로서의 능력 또한 충분했다. 그 능력에 걸맞은 야망 또한 있었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결단을 내릴 줄 아는 과감함도 있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명분에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틈을 노린 과감한 결정으로 싸움을 끝내지 않았는가. 그 뿐이랴, 채찍과 당근을 통해 제국 내부의 혼란을 빠르게 정리했으니 이 다음에 내보일 행보가 무엇일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다행히 그 뒤로 제국은 가만히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들은 더 경계를 끌어올렸다. 차라리 몸을 부풀렸다면 모를까, 그 움츠림이 단순히 힘이 부족해 움츠리는 것이 아닌 기지개를 펼치기 위한 사전준비라는 것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

“황제가 마탑주의 제자에게 연구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요청하라고 했다고?”

“예. 마탑주의 제자인 레닐 드라그닐과 제국의 마스터, 지크 후작의 독녀 간의 결혼식에서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레닐 드라그닐.

그 이름은 쥬렌 왕국의 정보부에서도 특급으로 다루는 이름이었다. 단순히 마탑주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는 일급은 충분하되 특급은 부족했다. 일급을 특급으로 격상시킨 것은 본인의 실력. 서른이 되기도 전에 6서클이라는 경지에 오른 전후무후한 실력자였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만큼이나 미래가 두려운 인재였다.

그런데 레닐이 주도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황제마저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레닐이 연구를 시작하고 황제가 그 연구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건 황제가 레닐을 시켜 연구를 시작하게 했건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연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내었나?”

“아직까지는 소식이 없습니다. 방비가 워낙 단단한지라 실력 있는 이들도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야 한다. 얼마의 재물이 들던, 몇 명이 죽건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 말처럼 얼마의 재물이 들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건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몇 백 배, 몇 천 배의 피해가 발생할 테니까.

#

“으음······. 어렵구나. 어려워.”

세 시간. 하루 중 1/8을 차지하는 시간이며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 비중은 거의 배 가까이 올라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성과가 쉬이 나올 리 없었다.

“쯧쯧.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퍼붓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그 모양 그 꼴인 게다.”

“······거 참, 그럴 시간에 조언이라도 한 마디 더해주시는 게 저에게도 위대하신 존재께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조언은 이미 수차례 해준 것 같은데? 고작 이까짓 거에 발이 묶인 네 놈이 멍청한 탓이지. 네 놈은 숨을 쉬는 데에도 조언이 필요하냐?”

할 말이 없다. 그녀는 정말로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조언을 해줬을 것이다. 방금 말처럼 숨을 쉬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코와 입이라는 기관을 설명하고 공기를 들이키는 방법을, 다시 내뿜는 과정을 어떻게든 말로 설명한 격. 문제가 있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설명이 곁들여지더라도 물고기가 물 밖에서, 아가미가 아닌 입을 통해 숨을 쉴 수 없었을 뿐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할 걸 그랬나.’

제아무리 노력했다한들 쏟아 부은 시간이 짧다면 어떻게 성과가 나겠는가. 그녀의 말처럼 조금 더 수련에 매달렸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몰랐다.

‘옆에서 재촉이 끊이지 않으니 덩달아 나까지 조급해지는군.’

사실 나에게 용언에 관한 건은 그리 급한 일이라고 볼 수 없었다. 지금 내게 최우선 목표는 몬스터의 대지를 정벌하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한 타이탄의 개발이었으니까.

또한 세 시간이라면 긴 시간은 아니었어도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 노력이 부족했다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백 년이라는 시간을 입에 올렸을 만큼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옆에서 끊이지 않고 재촉을 이어가니 꽤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4, 5, 6, 7서클에 오르는 과정 중 쉬운 일이 있었던가. 기연과 행운이 겹쳤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 바탕에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면 그 기연과 행운을 붙잡을 수 있었겠는가.

제아무리 지지부진하여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져도 가능성이 있다면 기회는 언젠가 올 것이다. 그리 믿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수밖에. 그게 지금까지 내가 난관들을 해쳐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들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제야 한 걸음 내딛었구나. 그 한 걸음이 뭐가 어렵다고 그리 시간을 보냈는지.”

회(回)

술잔에 담긴 물을 회전시키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 긴 시간 동안 이것만 부여잡고 있었는지, 세차게 회전하는 물을 보고 있자니 그 동안의 노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대단한 진보는 아니었다. 여전히 의지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았고 물을 회전시킴에 있어 마력을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녀가 처음 물을 움직여보라고 했을 때, 타박을 받았던 것과 지금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동안 각인을 다뤄오며 무심결에 잠들어있었던 고정관념을 깨트렸다는 것이 중요했고.

화르륵-

손에서 불과 물, 바람과 흙, 빛과 어둠이 뿜어져 나오며 춤을 췄다. 아직은 채 몸에 익지 않아 보잘 것 없었으나 이걸 계속 발전시켜나간다면 나는 마법사라는 칭호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이가 될 수 있으리라.

“뭘 만족한 듯 웃고 있어?! 고작 그거 했다고 벌써 정상에 도착한 것 같냐? 이제야 한 걸음 간신히 떼었으면서 어딜 벌써부터 다 이룬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다시 자리에 안 앉아?!”

물론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같잖게 보일 뿐이었으니 자그마한 성과는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더욱 채찍질을 하게 만들었다. 정말 스승으로서는 부적합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Mk.I의 개량은 난관도 있고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해결책은 없더라도 미봉책 정도는 있거나 개량을 멈추더라도 아쉬운 대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나 개인의 수련 또한 일단 한 단계 벽을 뛰어넘자 그것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보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수준의 막막함은 없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들으셨습니까?”

그러던 중 들려온 소식은 나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아니 그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황제 폐하께서 아르센 공작가를 공국으로 승격시킬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미 정계에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알잖아. 연구 때문에 바깥을 향해서는 귀를 닫고 있었어. 그건 꽤나······놀라운 소식이네.”

공국이라,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어디까지 사전에 계획되어있던 것일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8화 -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