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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7화 (87/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7화 - >

쿵- 쿵-

시작은 걷는 것부터. 미리 지반을 단단하게 다져놓았음에도 그 압도적인 무게에 바닥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연구소가 중심지와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연구소 주변에 내부의 소란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꽤나 난리가 났으리라.

“우, 움직인다. 움직인다고!”

아르민에게 있어 평생의 숙원이었을 타이탄이 두 발로 서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아르민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비록 타이탄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결과물이었지만 그 광경만큼은 그가 바라던 광경이었기에. 단순히 거대한 골렘이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기에.

쿵- 쿵- 쿵- 쿵-

나는 내 마력이 허락할 때까지 타이탄을 움직였다. 단순히 걷기 뛰기에서부터 인간의 몸으로도 펼치기 어려운 자세들까지. 그렇게 열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 거대한 몸과 셀 수 없이 수많은 종류의 마법을 유지하는 건 무척이나 어러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하.”

“괜찮으십니까?”

심장이 아련하다. 마력 회로와 코어도 오랜만에 느끼는 피로에 어색함을 느꼈다. 짧은 시간 내에 다량의 마력을 소모했을 때 느껴지는 현상이었다.

‘리미트를 설정해두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군.’

안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정신론과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으로 점칠된 인생이 기사들의 삶이었다. 그들이 지금과 같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행동할 선택지는 결코 후퇴가 아닐 터, 귀중한 인력인 기사들을 자폭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리미터는 달아두는 편이 현명했다.

“조금 피곤하네.”

“괴,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굉장하기는. 가야할 길이 천릿길이던데.”

“······예?”

“그러면 내 입에서 대성공이라는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 고작해야 이 정도로? 네가 생각한 타이탄의 가능성은 겨우 저 정도였어?”

직접 움직여보니까 더 잘 알겠다. 지금 눈앞에 있는 타이탄은 외형이 아무리 화려할 수 있어도,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도 고작해야 프로토타입, 가야할 길이 한참이나 남은 시제품일 뿐이라고.

“고쳐야 할 점이, 아니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조금만 쉬웠다가 갈 테니까, 자료들 준비해놔.”

“예, 예!”

#

눈을 감고 쉬고 있으니 텅 빈 마력 코어에 마력이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부터 또 야근에 매달려야 하리라. 새롭게 얻은 이 몸과 마력 덕분에 하루 이틀 쯤 밤을 새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몇 달이나 지속되면 제아무리 마력으로 피로를 푼다고 해도 몸에 좋은 영향이 갈 리가 없었다.

“할 일이 산더미야.”

개선해야 할 점이 산더미다. 그리고 일부는 지금도 해결책을 찾았거나 찾고 있었다. 그러나 해답을 찾았다고 하여 무작정 적용할 순 없었다. 이걸 수정함으로서 다른 마법에 영향은 가지 않는지, 가성비는 괜찮은지 등등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았으니까.

‘반응이 느렸어. 천천히 움직이면 괜찮겠지만 작업용도 아니고 전투용으로서는 실격이야. 동기율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 돼.’

어디 그 뿐일까, 애초에 골렘은 복잡한 동작을 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썩 만족스러운 움직임까지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라면 괜찮겠으나 전장이란 격한 움직임이 기본이 되는 곳 아닌가. 보완이 필요했다.

더불어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었으니 크기였다. 정확히는 거대한 크기로부터 나오는 거리감. Mk.I의 크기는 장장 성인 남성 키의 3배. 그 말은 즉 팔과 다리의 길이도 3배, 머리까지의 길이도 3배라는 뜻이었다.

평생을 2m가 안 되는 키로 살아왔다. 그런데 5m가 넘어가는 거대한 덩치 속에서 기존보다 3배에 가까운 거리까지 마력을 순환시키는 일은 의식하지 않으면 실수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덩치를 줄이거나 사용자가 적응하거나.’

이 이상 덩치를 줄이는 건 힘들다. 조금 더 연구를 감행하고 마법의 발전이 따른다면 모를까,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필요한 마법을 구현해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파괴력과 마력의 소모가 적당히 밸런스를 이룬 최적의 크기였기에.

모든 것을 신경 쓸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려면 연구 기간을 두 배, 아니 세 배로 잡아도 무리이리라. 적당히 노력으로 커버 가능하거나, 치명적인 결함이 아닌 이상 유도리있게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했으면 기사들도 노력해야지. 어딜 마법의 이기를 누리려고만 그래?’

연구실로 돌아와 미리 아르민이 준비해둔 자료들을 분리했다. 개선이 필요한 부분, 당장은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 부분, 아예 잘라내야 하는 부분 등등. 빠른 속도로 쌓여가는 일거리에 아르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네요.”

“기뻐해라. 개선할 점이 많다는 이야기는 곧 성장의 여지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니까. 짧게 걷고 대단치도 않은 보상을 얻기보다는 힘들고 멀더라도 대단한 보상을 얻는 게 좋지 않겠어?”

“맞는 말씀만 하셔서 어떻게 부정할 수가 없네요.”

해야만 하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채찍만 때려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그 동안 내가 가장 중요해온 것은 다름 아닌 효율. 최대의 효율을 위해서는 적절한 휴식은 필수였다.

턱-

“가자.”

“네? 어딜······?”

“집에. 삼 일 동안은 휴식이다. 연구소에는 발도 들여놓지 마. 깨끗하게 머리를 비우고 삼 일 뒤, 원래 모습으로 연구소로 돌아온다. 알겠어?”

뭐, 그러다가 심심하면 머릿속으로 개선 방안을 생각해도 좋고. 그러나 뒷말에 상관없이 오랜만의 휴식을 보장받은 아르민은 누가 봐도 신났다는 움직임으로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제아무리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힘이 들지 않는 건,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 테니까.

사각- 사각-

홀로 남은 연구실에서 마저 자료를 정리했다. 최소한 문제점은 모두 적어놔야 돌아와서 곧바로 작업에 착수할 수 있을 테니까.

달각-

그렇게 해가 지기 전, 나도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얼마 만에 해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

햇빛이 참 밝다. 공기도 맑고 봄치고 날씨도 따뜻한 것이 외부활동을 하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날씨가 없으리라.

“축하한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저번에도 못 갔는데 이번에는 와야지.”

크라머 백작의 직위 계승식은 성대하게도 열렸다. 일부로라도 힘쓴 듯한 모습. 허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안심할 수는 없는 법. 원래 거의 도착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더 이상의 수작은 없을 겁니다.”

“없다고?”

“예. 저를 습격했던 길드에서 사람을 보냈더군요. 제 동생 중 한 명인 맥스웰이 저를 암살해달라고 한 증거까지 동봉해서요.”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신용이 생명인 주제에 신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언제나 이득인 쪽으로 행동하는 녀석들 아닙니까. 형님이 개입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의뢰를 강행하는 것보다 저에게 붙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잘 해결됐다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윌랜드가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녀석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손자. 그러니까 윌랜드의 아들을 품에 안은 크라머 백작이 천천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빠른 시일 내에 쾌차하셔야지요. 스승님께서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크라머 백작의 표정은 빈 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문의 성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가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허허. 이 늙은이의 은퇴식에 대제자가 자리를 빛내주다니, 고맙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윌랜드의 말처럼 계승식은 아주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제아무리 급해도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는 이 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크라머 백작가의 주인이 바뀌었다.

#

취임식에 참석한 하루를 제외한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결혼 이후에도 일이 많아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짐으로 존재했기에. 그녀도 마법에 꽤나 소양이 있었던 터라 할 이야기는 많았다. 물론 타이탄 자체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기에 정통파인 그녀로서는 꽤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안녕하십니까!”

“푹 쉬었어?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할 체력은 회복했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피로에 대한 최고의 보약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충분한 휴식이었다. 삼 일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로 푹 쉬었는지 눈가에 가득했던 다크 서클도 많이 줄어있었고 얼굴 자체에 활력이 차있었다.

“자, 시작하자. 관련 자료들 다 가져와!”

제일 먼저 살필 부분은 외골격을 가다듬는 일. 일단 기본적인 토대가 완성이 되어야 그 위에 뭐가 되었든 쌓을 것이 아닌가. 땅을 제대로 다지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기둥과 벽, 화려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어봤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사람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골격은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뼈나 금속이나, 단단한 재질이니까요. 문제는 뼈를 뒤덮고 있는 살, 근육이었습니다. 그 유연함은 금속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참 딜레마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서는 금속 특성상 여유로운 공간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면 외부 공격에 취약해진다. 내구도도 감소할 테고. 둘 모두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던, 정 안 된다면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후자가 맞겠지.’

전투에 있어 자유로운 움직임은 필수. 애초에 관절은 약점 부위가 아니었던가, 약점이 조금 더 큰 약점이 되는 것뿐이었다. 약점을 보완하려다가 강점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둘 모두를 잡을 방법을 떠올리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쉬울 리가 있겠는가. 아르민도 곤란함에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겠지요. 그래도 다행인 건 미봉책은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인원들이 들어오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아주 비관적이진 않습니다.”

“그것 참, 다행인 소식이네.”

“어쩌겠습니까. 밑바닥부터 쌓아올리는 일이 숙명이지요.”

그래. 숙명.

기존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기존에 없던 노력이 필요한 법. 이 정도에 무릎 꿇을 것이었다면 진작에 수십 번은 포기했으리라.

언제나처럼, 그러나 삼일 간의 휴식이 꿈이었다는 것처럼 연구실 안은 자료를 뒤지는 소리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연구소를 빠져나갈 때의 하늘은 삼일 전과 달리 햇빛이 아닌 달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7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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