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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6화 (86/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6화 - >

흑장미라, 장미나 백장미를 문양으로 사용하는 가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흑장미는 처음 봤다. 담고 있는 의미부터가 불길한 만큼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알아?”

“들어는 봤습니다. 최근 서쪽에서부터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어둠의 길드가 있다고. 아마 그 쪽인 듯합니다.”

어둠의 길드.

한 마디로 겉으로 드러나면 안 되는 일들을 주력으로 하는 길드를 말한다. 당연히 대부분 수배전단에 올라와있고 인식이 인식이니만큼 붙잡히면 사형 혹은 그에 준하는 벌을 받게 되지만 세상만사 걸리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뒤가 구린 일이니만큼 보수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고 공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라지지 않을 단체이기도 했다.

“동생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네.”

수도에 상주하는 백작가의 후계자를 암살하는 일이다. 그것도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선금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값이 들었을 터,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어떻게 할 거냐? 네가 원한다면 이 자들의 잔류 사념을 붙잡아 놓을 수는 있는데.”

“부탁드립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취임식 이후에는 요긴하게 사용할 곳이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를 죽이려고 한다면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법. 익숙하지 않은 마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죽은 이의 잔류 사념을 보관하며 생각했다. 짧지만 많은 일이 윌랜드에게 벌어질 것 같다고. 살아서 돌아간 암살자들이 의뢰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의뢰인에게 보고할 테니까.

“가지고 있어.”

“이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대로 끝나진 않을 거야. 그들로서도 목숨이 달린 일이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너를 제거하려고 들겠지. 뭔가 수상쩍다 싶을 때, 마력을 불어넣어. 최대한 빠르게 도착할 테니까.”

“······형님.”

“징그러운 표정 짓지 말고.”

그것도 모자라 신체 능력을 올려주거나 위기 시 방어막을 전개하거나 생체, 마력 반응을 은폐하는 등 각종 유틸리티 아티팩트 뿐만 아니라 정말로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공격용 아티팩트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빌려주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피해는 발생하겠지만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 정도를 보상하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조심해라. 먹는 것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어지간하면 항상 호위를 다수 대동해. 그 혹독한 테라 방벽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런 놈들에게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윌랜드를 저택까지 데려다준 뒤, 그의 방을 한 번 둘러봤다. 백주대낮에 조금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고 암살을 감행한 놈들이었다. 윌랜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의뢰인과 협력해 그의 방에 수작을 부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네.”

윌랜드가 죽을 것이라 확신했던가, 눈앞의 하나를 보는 것에도 벅차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거나. 어느 쪽이건 현명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암살자들에게는 실력에 대한 확신이, 의뢰인에게는 그 확신에 걸맞은 돈을 들인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원래 현실이라는 건 예상대로 되는 일이 적은 법이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공간 내의 마정석을 활용하여 방에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한 각종 장치까지 설치해주고 난 뒤에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바빴던 만큼 아마 그 쪽도 상당히 바쁠 것이다. 상정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으니까.

#

“······뭐라고?”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영주는 두 발로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쾅-

“그걸 지금 말이라고······!”

초조하게 작전의 성공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윌랜드의 형제들이 상석에 앉아있었던 이의 분노의 말을 시작으로 불안에 빠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들로서도 이번 작전의 성공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맥스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맡겨만 달라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그 원망은 계획의 입안자에게로 몰렸다. 의뢰를 맡기기 위해 들어간 선금만 해도 얼마인가. 그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 없으니 이 곳 사람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은 필연. 결국 성공했으면 모를까, 돈은 돈대로 쓰고 계획은 대실패를 해버렸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것이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한 번 실패했을 뿐입니다. 취임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겨우 한 번? 그 한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이런 일을 겪고도 윌랜드, 그 자식이 지금처럼 좋은 기회를 내줄 것 같으냐!”

딱 한 번이었다. 그 한 번을 위해 소영주의 자리를 빼앗기고도 숨죽이며 고개를 숙였던 것인데, 한 번 암살의 위험을 겪은 이상 윌랜드도 이번처럼 좋은 기회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맥스웰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에도 그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봤자 목소리만 높일 뿐이지.’

적어도 윌랜드가 죽을 때까지 혹은 취임식이 치러지기 전까지 그들은 한 배를 탄 동지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윌랜드를 죽이지 못하면 미래가 없는데, 고작 말 몇 마디에 움츠러들 것이 뭔가.

“차라리 잘 됐습니다. 한 번 실패한 이상 소영주는 우리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된 이상 쓸데없이 눈치를 볼 필요도 없겠죠.”

“어림도 없는 소리! 그의 곁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대제자가 있다고. 이번 일을 해결한 것도 그 자인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매번 붙어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비를 했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암살당해 죽은 이들이 왜 그리 많겠습니까?”

“이야기가 안 통하는구나! 어디 한 번 잘 해보거라! 나는 나대로 길을 찾겠다!”

상석에 앉아있던 이가 분노에 가득차 방을 빠져나가자 안아있던 다른 이들도 하나둘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남게 된 맥스웰은 그들을 비웃었다.

‘뭐 어쩌려고?’

다른 길을 찾겠다고?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을 걷고 싶었으면 여기까지 오면 안 됐지. 벼랑 끝까지 온 이상 길은 두 가지밖에는 없다. 뛰어내리거나 돌아가거나. 게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크라머라는 성을 잇지 못한 순간, 그들의 가치는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선금의 세 배. 뱉어내기 싫으면 의뢰를 이행하라고 해. 무슨 수를 써서든 윌랜드의 목을 가져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

“손 뗀다.”

“하지만 의뢰를 이행하지 않으면 선금의 세 배를 물어내야 합니다.”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선금으로 막대한 양의 돈을 받아놓았다. 아무리 급격하게 세를 키워가는 중이라고는 하나, 아니 오히려 세를 불려나가고 있기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들어갈 돈이 많다는 이야기와도 같았으니까.

“대제자가 개입했다며, 손해가 더 커지기 전에 손 떼라고.”

“하지만 단주님. 지금 단에는 그 정도의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를 왜 찾아? 어차피 곧 죽을 놈들에게 그만한 돈은 아깝지. 대충 구색만 맞춰주면서 시간을 끌어. 그러다가 이번 일의 증거만 의뢰 대상에게 넘기면 그 쪽이 알아서 처리해 줄 테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계약 위반이라고 외치는 것도 목이 붙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혹은 그 정도로 목소리가 크거나. 이번 일이 밝혀지면 목이 잘리거나 최소한 오지로 유배될 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애초에 레닐이 개입한 이상, 본래의 계약은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고작해야 돈을 위해 마탑과 싸우라니, 자살행위도 그만한 자살행위가 없을 테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

“잘 대처하고 있나본데.”

다행히 그 뒤로 윌랜드로부터 구조 신호가 넘어오는 일은 없었다. 윌랜드가 잘 대처하고 있거나 생각 이상으로 흑장미를 문양으로 삼는 길드가 무능했거나. 어쩌면 의뢰를 포기했을 지도 모르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내 이름이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당장 내 코가 석자인데.”

할 일이 너무 많다. 마음 같아서는 내 몸이 두 개 혹은 세 개, 아니 한 열 개쯤만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랬다면 일처리 속도가 몇 배로 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단 지성으로 생각지도 못한 방안이 떠오를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 느리게나마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는 점이 피로 속에서도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대제자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과를 확인할 차례, 아르민의 뒤를 쫓아 피와 땀을 쏟았던, 사방팔방 익숙하지 않은 곳이 없는 연구소에 도착했다. 그 중앙에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상, 속칭 타이탄 Prototype Mk.I이 두 발로 당당히 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볼품없네.”

“외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

겉모습은 투박했다. 이걸 본 대부분은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외형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성능, 성능이었다.

“조정은?”

“어제와 차이는 없습니다. 그래도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실패라도 하면 또 뭐가 문제인지 찾을 때까지 고생일 텐데. 한 번에 성공하자고.”

심혈을 기울여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시도했는데 실패한다면 그 충격은 쉬이 해소할 수 없을 테니까. 또한 무엇인 문제인지 찾는 것 또한 어려우리라. 다행히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시작해볼까.”

아직 엔진은 꿈도 못 꾸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외골격 뿐, 비어있는 타이탄의 심장을 대신하여 내가 심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한 세월 걸리겠군.’

마력의 양으로만 따지면 제국에서도 두 손가락 안에 꼽힐 자신이 있었지만 이 병기를 오랫동안 기동할 자신은 없었다. 이걸 주력으로 이용할 기사들은 나보다도 보유 마력량이 적을 테니, 전투가 끝날 때까지 타이탄이 움직이려면 심장의 설계에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리라.

‘일단 그건 눈앞에 닥치면 생각하고.’

우우웅-

일말의 과정을 거쳐 타이탄과 나의 동기화를 끝냈다. 꽤나 새로운 감각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야와 거리감에 살짝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심장으로부터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프로토타입의 크기는 5m가 넘는다. 그 거대한 몸에 빽빽하리만큼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모습은, 마력이 공급되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활성화되는 모습은 단언컨대 마법사라면 감격에 빠질만한 광경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잠시 감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감상은 여기까지, 중요한 건 위력이다.’

단순히 외견만 대단하면 안 된다. 이만한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위력이 없다면 외견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엔진도 없고 몸 전체에 그려진 마법진도 개선할 점이 남아있으리라. 그래도 미래를 향한 가능성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아. 내 말 잘 들리나?”

“예! 잘 들립니다! 괜찮으십니까?”

“아직까지는. 준비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니.”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6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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