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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5화 (85/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5화 - >

“틀린 생각은 아니네. 일리가 있는 말이야.”

생각을 정리한 뒤, 차곡차곡 정돈된 결론을 가지고 그녀에게 가져가자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내가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예?”

“네가 각인이라고 부르는 그 기술 말이야.”

착각하고 있었다고? 지금까지 잘 흘러가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 번 써 봐.”

“예.”

“······아닌데. 아무리 봐도 착각한 건 아닌데. 왜 안 되지?”

거,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의문스러워합시다. 아까 전에는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해놓고서 이제는 착각한 건 아니라니. 어느 쪽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것일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각인이라고 부르는 그 기술, 용언의 마이너버전이라고 내가 말했지?”

“예. 급은 떨어지지만 바탕이 되는 원리는 똑같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 원리가 지금까지 네가 해왔던 수련의 일환, 그러니까 의지를 발현하는 거라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너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의지를 다뤄왔었다는 거라고.”

내가 이미 의지를 다뤘었다고?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각인은 마력을 바탕으로 기동되고 있었으며 그녀의 수련에서도 전혀 몸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금방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 오랫동안 사용해온 만큼 몸도 그에 맞춰 적응했을 테니까. 내가 각인을 용언의 마이너버전이라고 말한 이유도 그거야. 용언을 순조롭게 배우게 하기 위한 교보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네가 아무것도 느낀 것이 없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틀린 선택은 아니겠지.”

“······교보재.”

한 마디로 튜토리얼. 맛보기를 통해 몸의 대응력을 높인다는 발상에서 질병과 백신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어째서 각인을 만들어내었는가. 또한 어째서 나에게 이 힘이 주어졌는가.

‘모르겠군. 모르겠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각인에 대한 꿈을 꾼 지도 자그마치 십 년. 그 때도 단서 하나 알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알 수 있을 리가. 그 뒤로 각인에 대한 꿈을 꾼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붙잡고 매달려봤자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붙잡고 매달렸을 때, 성과가 나올 일에 매달리는 것이 옳은 선택일 테니까. 정말로 누군가 내게 이 힘을 선물한 것이라면, 그녀의 말처럼 용언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서 각인을 내게 선물한 것이라면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 무언가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너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나마 의지를 다루고 있었어. 관건은 그걸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지. 지금까지는 몰랐으니 그렇다고 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네게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있어야지요. 그래야 위대하신 존재께서도 자신 있게 동족 앞에 나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갓 각인에 대한 경험을 얻었을 때 나는 3서클의, 언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마법사였다. 그 때의 나는 기껏해야 한 글자의 뜻을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테라 방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4서클에 도달했고 동시에 각인 또한 성장하여 두 글자, 한 단어의 뜻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 5,6서클이 되어 각각의 뜻을 연계하여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7서클이 된 지금, 각인은 내게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몬스터의 대지에서의 격전으로부터 근 일 년. 몸 상태는 만전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당당하게 7서클이라고 외쳐도 될 정도로. 그 말은 즉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도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그러나 달릴 준비가 되었다고 하여 무작정 달릴 수는 없었다.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느리게나마 꾸준히 달리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이도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너무나 확고한 이정표가 존재했다.

용언.

각인이 용언을 익히기 위한 준비 단계라면 그 목적지는 결국 용언이 아니겠는가. 용언과 각인의 차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상적인 길과 비슷하게나마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세레나의 존재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주변에서 그 누구보다도 용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 존재였으니.

“입이 아플 정도로 많긴 하지만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역시 범위지. 범위.”

“범위?”

“한계가 없다고. 생각에는 한계가 없지. 당연히 그걸 이루고자하는 의지에도 한계는 없어. 하지만 너는 어떻지? 상황과 조건에 얽매여있지 않아?”

그녀의 말이 맞다. 각인은 만능처럼 보이지만 꽤나 조건을 탄다. 물건이 가진 원래 목적을 증폭시키는 데에는 마법으로 따라올 수 없는 효율을 보여주지만 조금이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일에는 그리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불어 대상에도 상당한 제한이 붙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 물건일 것. 그러나 용언은 달랐다. 그녀의 말처럼 생각에는 한계가 없었고 당연히 조건 따위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설령 모순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한계를 탈피하라는 건 아니야. 그렇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각인이 아니라 용언이라고 불러야 할 테니까. 하지만 하나씩 줄여나가야겠지.”

사실 더 이상 글자니 단어니,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의미였으니까. 은폐(隱蔽) 대신 숨어라 라는 말로도 효과를 보기에는 충분했다. 단지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각인을 사용해왔을 뿐.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목표는 대상의 적용범위를 넓히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힘든 길이 되겠군요.”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걷지 않은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는 쉬웠던가. 애초에 각인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 모든 것이 처음 맞이하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말처럼 노력이 필요했다. 노력이.

#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수련과 연구를 병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외부를 향해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다행히 정변으로 인한 혼란은 빠르게 잦아들었고 황제도 제국을 정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을 찾아간 친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뭐, 별 문제는 없겠지.”

조조도 서른에 6서클을 바라보는 마법사였다. 나만 아니었다면, 아니 지금도 이름을 널리 알린 뛰어난 마법사인 만큼 금지(禁地) 수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다칠 일은 없었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슬슬 나나 아르민이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새로운 인원의 충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마법사가 조조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

이 시간에 누구지? 찾아오겠다는 사전 연락도 없었던 만큼 경계심을 살짝 끌어올렸지만 들어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방문을 환영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무슨 일이야?”

“이걸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윌랜드 크라머. 어느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가 직접 나를 찾아와 전해준 것은 한 장의 봉투였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가주 취임식?”

“예. 근래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습니다.”

“크라머 백작님께서는 괜찮으신가?”

“일을 멀리하시고 충분한 휴식과 요양을 취하시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축하를 해야 하나? 그토록 가주의 자리를 원했던 윌랜드이니 만큼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으나 사이가 좋건 나쁘건 가족이 아닌가.

“그나저나 이걸 전해주려고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고?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될 텐데, 한 영지를 책임질 사람이 그렇게 발이 가벼워도 되겠어?”

“형님이 상대라면 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발이 무거울 순 없을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윌랜드는 돌아갔다. 나 이외에도 취임식을 위한 초청장을 보낼 사람이 많을 테니까. 초청장을 보관한 뒤 다시 연구에 집중하려던 순간,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레나가 입을 열었다.

“친해 보이는데.”

“아는 동생입니다.”

“안 쫓아가 봐도 되겠어?”

“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녀석이 이 곳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다수의 인간들이 녀석을 쫓던데?”

아차 했다. 형제간의 권력싸움. 3황자가 정쟁에서 승리한 이후, 확고하게 자리를 굳혔다고 들었기에 동시에 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에. 그러나 하나의 목표만을 두고 달려온 이들이 그리 쉽게 포기할까. 막말로 윌랜드만 없으면,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일인데.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물론 윌랜드가 약한 건 아니다. 호위도 동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얼마나 준비를 했겠는가. 시간이 있었던 만큼 그 쪽도 충분한 준비를 했을 터,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기를 빌었다.

‘어디로 간 거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는데, 서둘러 챙겨온 지도를 꺼내고서 윈랜드로 추정되는 마력 반응을 찾았다.

“북동쪽.”

“감사합니다!”

과연, 지도의 범위를 한정짓고 더 먼 곳까지 살피자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마력반응이 다량으로 검출됐다. 아직은 괜찮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마력부터 이상이 생길 터, 지도에 보이는 반응은 충분히 괜찮았다.

챙- 챙-

다행히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도 윌랜드는 괜찮았다.

#

“생각보다 잘 싸우던데?”

“테라 방벽에서 죽을 위기를 거쳤던 게 도리어 죽을 위기에서 저를 살렸습니다. 자네들도 괜찮은가?”

“저희는 괜찮습니다!”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자네가 돌아간 뒤, 자네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마력이 느껴졌지. 혹시나 해서 쫓아왔는데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아아.”

도망친 녀석들을 쫓진 않았다. 자리를 비웠다가 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녀석들의 정체를 밝히는 건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동료들의 시체가 현장에 남아있는 만큼 어려울 것도 없었다.

‘흑마법은 특기가 아닌데.’

흑마법이라고는 하나 금지된 마법은 아니다. 흑마법도 결국 마법의 한 갈래일 뿐이었으니까. 그 특성상 범법자가 된 흑마법사가 많을 뿐,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면 평범한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수배를 받는 건 똑같았다.

“아마 제 동생들이 보낸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애초에 그것을 염려하여 따라온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싸늘한 시체가 된 녀석들의 품을 뒤지다보니 그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흑장미?”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5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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