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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4화 (84/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4화 - >

“누가 마력으로 움직이래! 그걸 못하는 녀석이 어디에 있냐! 의지로, 의지로 술잔 안에 담긴 물을 움직이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더니 듣도 보도 못한 수련법을 들고 왔다. 손도 대지 말고, 마력도 활용하지 말고 술잔 안에 고여 있는 물을 움직이라니, 참신하다면 참신하고 어처구니없다면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 한 채, 술잔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하는 대로 의지를 불태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하는지 모르겠네.”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의 움직임 또한 없었다. 그러나 술잔의 물은 그녀의 의지대로 시계방향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은 물론 상하좌우로 떠올라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여주는데 어찌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말처럼

“노력! 노오오오려어어억!”

노력하는 수밖에.

그녀는 말했다. 용언이란 곧 세상을 움직이고자 하는 사용자의 의지라고. 마법사가 마력을 매개로 마법을 피워내는 것처럼 용언 또한 사용자가 의지를 매개로 용언을 피워내는 것이라고.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들어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었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추가로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마력을 느꼈냐고, 물론 아니었다. 의지를 다루는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닿을 수 없는 하늘처럼 느껴질 뿐, 한 번이라도 닿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여전히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태도로 술잔을 지금의 수련을 바라봐야하는지 알려준 말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이 곳이 소설 속에서나 보던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 마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던, 그 어린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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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초심이고 나발이고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새로운 수련법을 들고 온 지,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창문 밖으로는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건만 그 동안 쏟은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술잔 안의 물에는 조금의 변동도 없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

그녀가 워낙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력을 외쳤기에 내가 기울일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쯤 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녀가 용언을 완벽하게 다룰 줄 안다고 하더라도.

‘스승님이랑 비슷한 케이스지.’

그녀는 천재다. 나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있는 천재. 그녀가 태양이라면 나는 달빛 아니 반딧불이, 아니 그조차도 되지 못한 불 꺼진 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그녀가 가르침이라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들은 그녀 수준의 혹은 그녀가 고민한 만큼 약간 떨어지는 이들이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사실 순서부터가 잘못되긴 했지.”

마법을 예로 들어보자. 마법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마력을 깨우쳐야했다. 마법이란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력을 일정한 형식으로 배치하는 방법이었기에, 마력을 움직이지 못하면 제아무리 마법에 빠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레나는 용언 또한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을 움직이는 것처럼 용언을 쓰기 위해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마법사가 마법을 배우기 전 마력을 느끼는 것처럼 용언 또한 의지를 느낄 수 있어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슨 수로?’

무슨 수로 의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용언을 발휘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봤음에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에도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력을 깨우칠 때, 그랬던 것처럼 내 주변에 의지를 집중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끄응.”

톡톡톡톡-

고민이 깊어질수록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속도도 점점 빨라져만 갔다.

“집중해! 집중!”

심지어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술잔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었다.

‘지금 이 방식으로는 안 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원시인에게 돌도끼로 나무를 베라고 한다면 돌도끼를 만드는 방법부터 알려줘야지, 무작정 나무를 베라고 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뿐. 지금 나에게는 돌도끼를 만들 방법을 아는 것이 필요했다.

“저기 세레나님.”

“노력! 노오오, 왜?”

“의지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겁니까?”

“아니,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른다고?”

아니, 맨 처음 백 년을 이야기했던 것이 누구인데 고작 두 달을 가지고 이런 말이 나오다니, 두 달이라고 해봤자 사전에 예상했던 시간에 비하면 기껏해야 0.2%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둔하기 짝이 없는 너를 위해 한 번 더 이야기해주지. 네가 생각하는 의지란 뭐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행동입니다.”

“그래! 바로 그게 의지의 의미지. 하지만 어중간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이 일대, 세계가 네 의지를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강렬하게 의지를 불태우라고!”

여전히 추상적인 대답이다. 의지를 수치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더 강렬하게 의지를 불태우라니, 이 얼마나 대책 없는 말인가.

‘어쩔 수 없지.’

천재들에게서 그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분명 그들은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하면 헤매는 경우를. 별 수 있나, 천재에게는 범재 혹은 둔재가 헤매는 부분이 왜 헤매고 있는지조차 모를 텐데.

‘방법을 찾아야 해. 천재가 아닌 범재의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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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있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다. 앞서 걸어간 사람이 없다는 것.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앞에 어떤 함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어느 것 하나 막막하지 않은 점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뒤를 돌아봐야 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면 보나마나 앞으로 걸어갈 길도 잘못되었을 터,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멀고 험하더라도 올바른 길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왜 이 길을 걸어왔는가를 떠올린다면 목적지 또한 알 수 있겠지.

‘무언가를, 무언가 놓치고 있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레나가 등장한 이후, 이 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기울였음에도 한 걸음이라도 나아갔는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걸어가야 하는 길이 길이니만큼 이 개월이라는 시간은 내가 한 걸음을 걸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먼 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본능이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게 뭘까······.’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짧게 끝날 고민이었다면 이리 문제가 되지도 않았겠지. 그 때, 아르민이 고민이 있다는 듯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대제자님. 문제가 조금······.”

“문제?”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아르민도 이런 순간이 여러 번 반복되자 안 되겠다 싶으면 나를 찾아왔다. 그에게는 난제와도 같은 문제가 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일 때가 많았으니까.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는 고민과 고민, 노력과 노력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타이탄 프로젝트는 연구를 통해 개인의 성장을 도모하는 쪽이 아닌 결과로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쪽이었으니까.

“문제가 뭔데?”

세레나가 나타난 이후로 타이탄 프로젝트에 조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십사 시간 중 세 시간, 그러나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하지만 세 시간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이 개월이 넘는 시간이 흐르며 수많은 문제점을 고쳐나갔다. 어느 정도 틀을 갖춘 지금, 또 어떤 문제가 발목을 잡았기에 나를 찾아왔을까.

“외골격을 만드는 과정에서 든 의문입니다.”

“의문?”

“외골격의 크기가 5m를 넘어가지 않습니까. 무게 또한 엄청나고요. 제아무리 마력의 힘을 빌린다지만 짧은 시간을 기동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마력이 필요할 겁니다. 유의미한 기동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겠죠. 외골격을 만드는 것보다 그것을 탑승자를 뒷받침해줄 핵을 만드는 일이 더 급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문제는 아니다. 자동차의 엔진을 설계하는 일에 비하면 외골격을 설계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외골격에 먼저 착수한 이유가 있었다.

성과.

짧은 시간이나마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기에는 이 방법이 옳았으니까. 또한 엔진을 만드는 일은 제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본격적으로 제국에서 타이탄 프로젝트를 밀어주기로 했을 때,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을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생각한 걸 대제자님께서 생각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지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수고하게.”

탁-

그 때, 아르민이 방을 빠져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멍청한. 7서클에 오르면, 나이를 서른이나 먹으면 뭐하냐. 아직도 중요한 걸 빼먹고 다니는데.”

#

나는 왜 용언을 배우려고 하는가, 그녀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게 용언을 가르쳐주는 대신 나는 또 다른 드래곤 앞에서 그 성과를 내보인다는.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내게 용언을 가르쳐준다고 하였는가. 그녀의 동족이 그녀를 향해 호들갑을 떤다고 했기 때문, 그렇다면 왜 그녀는 ‘호들갑’을 떨었는가.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각인.

모든 것은 각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곁다리로 밀려나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해야 되는 행동은 새로운 절벽을 오르는 일이 아닌 기존에 오르고 있던 절벽을 끝까지 오르는 것. 그녀의 욕심에 나까지 휘둘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가.

그녀 또한 말했다. 각인은 용언의 마이너버전이라고. 용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마법과는 격이 다른, 용언과 마법의 중간단계라고 할 수 있는 기술. 그렇다면 각인을 대성(大成)한다면 용언의 가장 밑 부분에 불과할 지라도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틀린 생각은 아니네. 일리가 있는 말이야.”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4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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