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3화 - >
그녀를 폭군이라 비유하긴 했으나 그녀가 정말로 앞뒤 가리지 않는 안하무인의 폭군이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대화로 볼 때, 인류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높았다.
적어도 드래곤과 인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순순히 뜻을 꺾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의견을 제시할 만큼의 여유는 있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할 말은 그걸로 끝?”
“예.”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게 제의를 한 게 아니야. 명령을 내린 거지. 너한테 선택지를 준 게 아니라고.”
“최소한 명령을 따를지, 거역할 지에 대한 선택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대가가 네 목숨과 이 곳의 모든 인간들이 한줌 잿더미가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스르륵-
그녀의 허리로부터 붉은 비늘이 인상적인 꼬리가 삐져나오더니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고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꽁꽁 묶이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그녀가 내뿜는 기세는 이 일대를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 더욱 놀라웠지만.
‘뜨겁다.’
테라 방벽이었다면 모를까, 제국의 수도에서까지 갑옷을 입고 생활할 만큼 이 곳의 사정이 박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입고 있는 옷이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그조차도 몸을 휘감고 있는 꼬리로부터 느껴지는 열기로부터 몸을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단지 꼬리뿐만이 아니었다. 귀 위로 솟아나있는 두 개의 뿔과 얕게나마 보이는 비늘, 세로로 쭉 찢어져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보이는 눈까지.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함께 거침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제 코가 석자인지라 저와 상관없는 다른 이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명령에 따르자니 죽느니만 못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살아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테니까. 게다가 나는 내 목적만 이루면 너한테 간섭할 생각은 없어. 배운 것을 가지고 인간들의 왕이 되건, 조용히 살아가건 네 마음이라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에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합니다.”
“지금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짐에도?”
금방이라도 나를 찌부러트릴 듯이 꼬리가 조여든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는 나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렇게 되면 위대하신 존재께서도 영원히 ‘별 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떤 애송이’로 남게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꽈악-
선 넘을 뻔했다. 그래도 넘지는 않았다.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붉은 꼬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주어지는 압력이 압력이다보니, 열기가 열기이다보니 몸에 부하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건방진······. 이대로 네 놈을 죽인 다음 내 말에만 따르게 만들 수도 있다.”
리치.
고위급 마법사가 자의로 혹은 타의로 부활한 언데드를 일컫는 명칭.
그녀의 말은 걸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숨을 쉬는 것보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봤자 분풀이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그렇게 부활한 이상 생전의 기억과 경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테니까요.”
그녀의 목표를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로 강한 지가 내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나를 또 다시 찾아와 용언을 가르쳐준다고 할 정도로 열망이 있었다. 거기에 목표를 위해서라면 감정 정도는 억누를 수 있는, 본능보다 강한 이성도 보유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 사실이 필요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너의 목숨 또한 오늘까지겠구나. 결과가 똑같다면 내 기분을 거스른 너를 죽이는 것으로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야겠으니.”
“그런 의미에서 위대하신 존재께서 한 발자국만 양보해주신다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줄다리기를 하자는 것이냐?”
나를 죽이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 이건 서로에게 Lose-Lose가 될 뿐이었다. 서로에게 Win-Win이 되는 결론을 찾아가야하지 않겠는가.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번 말해보거라. 네가 말하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보다 쉽게 여기까지 왔다. 전설에 따르면 레드 드래곤은 성격 또한 색과 비슷하게 불같다고 들었는데. 개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나보지. 어찌 되었건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위대하신 존재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대신에.”
“대신에?”
“세 시간.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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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할까?’
세레나는 본인을 상대로 협상을 하고자 하는 건방진 인간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거래를 입에 담은 순간 죽여 버렸을 터, 하지만 인간이 입에 담은 말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떤 애송이라······.’
동시에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꺼지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내쫓은 동족의 모습이.
‘그럴 순 없지.’
이건 그녀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일. 게다가 그녀로서도 꽤나 흥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긴 삶을 살아가는 만큼 이렇게 중간중간 등장하는 흥미로운 일이 아니면 삶이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놓쳐버리기에는 아쉬웠다.
“기뻐해도 좋다. 나를 설득한 첫 번째 인간이 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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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결되기가 무섭게 새로운 난제가 생겼다고 해야겠지.
“아니, 이걸 왜 못하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게으름을 피워?”
낯익은 느낌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을 때가 딱 이러했다. 천재만의 감각을 둔재는 이해하지 못하는 법.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로서는 억울할 뿐이었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자, 내가 용언을 다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지?”
“의지입니다.”
“그래. 용언이란 곧 세상을 바꾸고자 나의 의지가 현실화된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자꾸 마력을 끌어올리는지 모르겠네. 마력은 단순히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아니,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라니. 이 무슨 쌍팔년도 정신론도 아니고. 그런 말 몇 마디로 해결이 될 것이었다면 인류의 탄생 이후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치 않은 산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이유가 없잖은가.
작은 원망과 답답함을 담아 의자 위에 앉아 나를 다그치는 붉은 고양이를 쳐다봤다.
“뭘 쳐다봐? 집중 안 해?”
뒤따르는 다그침에 다시 한 번 눈을 감은 채, 그녀가 말하는 의지를 불태웠다. 도대체 그녀가 말하는 의지의 현실화가 무엇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붉은 털의 고양이로 변해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요청했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동안 그녀와 수행을 해야 한다.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이상 아무리 잘 감춘다고 하더라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고, 이상한 소문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으니 내 속만 터져나가겠지.
그래서 다른 이들이 이 광경을 보더라도 나 혼자 수련을 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그녀의 모습을 사역마의 모습으로 바꾼 것이었다. 마법사가 사역마를 두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집중해!”
물론 시간 낭비에 가까운 수련에만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타이탄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으나 하루 중 세 시간의 시간이 빠진 것은 의외로 큰 타격이었으니 그 여파는 고스란히 아르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민이 기초를 잡아놓으면 내가 살펴본 뒤, 수정할 것이 있으면 수정하고 문제가 없으면 진행을 시키는 식으로. 자연스레.
“이, 이걸 저 혼자서 하라고요?”
“그 동안 많이 봐왔잖아. 많은 건 안 바래. 기초만 잡아놔. 막히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지 물으러 와도 되고.”
“그, 그럼 레닐 님께서는요?”
“난 그 동안 할 일이 있어서.”
“끄어억.”
아르민의 앓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지만 원래 이런 건 밑에 사람이 조금 더 고생하는 법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구색은 잡힐 터이니, 그 때는 인원을 충당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조금만 더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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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오크를 데려놔도 너보다는 잘하겠다!”
하루 세 시간의 수련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다. 가르침이 워낙 애매모호한 것도 있었으며 애초에 그녀도 백 년이라는 시간을 예상했던 것처럼 하루이틀로 결과가 나올 만큼 쉬운 목표도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이걸 왜 못하는 거지?’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놀란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데, 잠 한 번 제대로 자기 시작하면 백 년 쯤이야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간이었지만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문제는 도대체 레닐에게 어떤 가르침을 줘야 하는지 그녀로서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녀로서는 레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초원의 사자가 바다의 물고기에게 어째서 대지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입을 열어 저 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다그치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고민에 빠졌다. 하는 걸 보니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녀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아!”
며칠, 몇 주의 고민 끝에 작은 깨달음과 함께 그녀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라면 저 아둔한 인간도 자신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
뒤적뒤적-
그녀의 손이 아공간으로 들어가며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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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술잔이잖아.”
술잔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조금 많이 화려한 술잔이었지만. 내가 물어본 건 어째서 보지 못했던 술잔을 꺼내놓았냐는 것이었다. 그런 뜻을 담아 그녀와 술잔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녀가 뭐하냐는 듯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을 해줘야 하나? 움직여.”
“예?”
“움직여보라고.”
뭐 어려운 일이라고.
술잔의 물은 마치 무중력 공간에 놓인 것처럼 동그랗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떠오른 물은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누가 마력으로 움직이래! 그걸 못하는 녀석이 어디에 있냐! 의지로, 의지로 술잔 안에 담긴 물을 움직이라고!”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3화 - > 끝